14
옆에서 들려오는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도 아랑곳 않고 은성이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걸어가.
남자는 그런 그녀를 흘끗-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도 모르게 씩- 웃어 보여.
그러고는 빙글- 돌아서더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집에 다 온 거 같은데, 언제까지 그렇게 땅만 보고 걸어갈 거예요?"
그의 그 장난기 가득한 한 마디에 그제야 은성이는 고개를 들어.
어느새 도착했는지 아파트 로비 앞에 서 있어.
"아, 고마워요. 우산 씌워줘서"
"그럼 그럼! 고마워해야지! 그 뭐다냐- 엄청 그래 보였거든"
"...뭐가요?"
"그니까- 엄청 비에 맞은 고양이 같았어요"
"처량해 보였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 아니"
그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해.
은성이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고, 그는 그녀의 표정이 재밌었는지 꽤나 예쁜 눈웃음을 뽐내.
"집에 데려가고 싶었다고"
"네??"
은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자 남자는 픽- 웃더니 이내 입술을 움직여.
은성이는 그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꽤나 고민되는 얼굴로 그를 바라봐.
그런 그녀의 표정을 아랑곳 않고 남자는 재밌다는 듯이 빙글빙글 웃을 뿐이야.
능글능글 빙글빙글-
"자-, 그래서 이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하실래요?"
"어...."
"어렵죠? 그럼 어렵지 않게 번호나 줘요"
"번호요?"
"네, 번호요. 얼마나 간단해, 휴대폰에 톡톡 찍기만 하면 되잖아"
"저 결혼했는데요"
"누가 사귀자 그랬어요? 나중에 커피나 한 잔 사줘요. 내가 연락할 테니까"
"그..."
"이래 보여도 내 시간은 금인데"
문득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은성이는 눈을 깜빡이다가 뭐 별일 있겠냐는 생각에 "알았어요" 하며 손을 내밀어.
남자는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네고, 은성이는 자신의 번호를 그의 핸드폰에 저장해.
꽤나 뿌듯한 듯한 얼굴로 그가 자신의 전화를 받아들어.
"나중에 톡 할게요. 차단하지 말고"
"....."
"그럼, 좋은 밤 보내길!"
윙크도 찡긋-
*
집으로 돌아온 은성이는 축축한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쓰러지듯 드러누워.
'아- 진짜 되는 일 하나도 없는 날이다' 하고 생각하며 애써 이불로 몸을 칭칭 감아.
몸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것만 같아. 괜히 눈을 꾹 감고 싶어져.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녀는 고민하기 시작해.
그러니까, 왜 진짜 불행처럼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는 가에 관하여 말이야.
진작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그러고도 남았을 텐데 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건지,
은성이는 답지 않게 혼자서 끙끙 앓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어긋나 버린 일 인걸.
이미 아닌 척해봐야 상처는 받았고, 모른 척해봐야 솔직하게 그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는걸.
숨길 마음은 없어, 숨길 생각 따위도 해본 적 없고.
다만 그냥 미워서 그래, 자꾸만 함부로 휘두르려 드는 그가 밉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들이 너무 미워서 그래.
'헷갈리게 하지나 말던가' 은성이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생각해.
입술이 화끈거리고 열대야도 아닌데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가는 것 같아.
그녀가 숨이 막힌다는 듯 이불을 펄럭거리며 몸을 뒤척여.
...문득 일 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져서 은성이는 한숨을 삼켜.
그래, 말해 뭐 해, 잠이나 자자.
*
"오- 네가 웬일?"
저벅저벅 바에 들어선 택운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학연은 닦던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동그랗게 떠.
택운은 그가 그러든지 말든지 의자에 털썩- 앉더니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는 눈을 비벼.
비가 꽤나 많이 오는지 바를 채우는 음악의 선율 사이사이로 빗소리가 스며들어.
"술 마시러 왔지 왜 왔겠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택운에 학연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떠.
그러고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잔을 채워줘.
"피곤해 보인다?"
"...응 좀"
"신혼치곤 얼굴이-"
학연이 제 손을 얼굴에 대고는 위아래로 슥- 슥- 흔들어 보여.
택운은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잔에 입술을 대며 낮은 한숨을 흘려.
꽤나 심란해 보이는 택운의 얼굴이 낯설어서 학연은 괜히 걱정이 돼.
"뭐야... 부부싸움이라도 했어?"
"부부싸움은 무슨"
"근데 왜 그래? 답지 않게 한숨도 쉬고"
"피곤해서"
"투잡 뛰니까 피곤하지"
꽤나 날카롭게 찌르는 학연의 한 마디에 택운은 슬쩍 그를 바라봐.
그렇다고 변명을 딱히 하는 것도 아니야. 변명할 게 있어야 변명을 할 것 아니야.
학연은 그런 택운을 마주 보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아까 닦던 잔을 다시 집어 들어.
서로 모르는 게 없는 사이인데 쓴소리 한 마디 던져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어.
"술은 왜 마시러 왔냐. 문현아 때문이야?"
"아냐, 그냥 마시고 싶어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게 퍽이나 그러시겠다"
"...."
"뭐야- 뭘 그렇게 쳐다봐-"
자신을 빤히 보는 택운에 학연은 기분이 이상했는지 괜히 말꼬리를 늘려.
택운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학연을 바라보고,
학연은 그런 택운이 낯설다가도 괜히 걱정되는지 낮은 한숨을 푹- 내뱉어.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이럴 때 고민 들어주라고 있는 말 아니겠어.
학연은 의자를 끌어다가 택운과 바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그러고는 다소곳이 팔짱을 끼며 눈을 깜빡여.
"진짜 제수씨랑 싸웠냐"
"언제 봤다고 제수씨야"
"결혼식 날 봤잖아, 그럼 제수씨지"
"됐고, 그런거 아니야"
"들어준다 할 때 말해라. 답답하게 굴지 말고"
"......."
"아니면 뭐, 문현아 때문이야? 왜 너 결혼하니까 싫데?"
"....그럼 좋겠냐"
"뭐야 진짜 문현아 때문이냐-" 학연은 택운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흘겨.
"....모르겠어" 문득 택운이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려.
"뭘?"
"그냥... 귀찮아서"
"뭐가? 아! 좀 제대로 좀 얘기를 해!"
"나도 모르겠다" 택운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겨. "자꾸 신경 쓰여서 죽겠다"
"문현아가 아니면 제수씨가"
"......"
"아 답답해 죽겠네-" 학연이 참다못해 제 가슴을 퍽- 퍽- 두드려.
"차은성이"
"...어?"
"차은성이 신경 쓰여 죽겠다고"
되묻는 학연의 질문에 택운이 이내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해.
학연은 생각보다 예상치 못 했던 택운의 한 마디에 벙쪄서 그를 바라봐.
택운은 이내 마주 보던 그 눈길을 돌리고 잔을 입에 대.
학연은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내쉬어.
그러고는 얼굴을 굳히더니 꽤나 현실적이고 차가운 충고를 내뱉어.
"할 거면 하나만 해, 괜히 순진한 제수씨 상처 주지 말고"
"편들긴"
"편 안 들게 생겼냐? 뭐가 아쉽다고 너 같은 놈이랑 정략결혼하는지 이해도 안 됐었는데"
"걔는 왜 이렇게 편이 많데" 택운이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해.
"네가 호구라 그래"
"야... 씨"
"그래서 제수씨는 신경 쓰이고 문현아는 아직도 만나고?"
"몰라"
"모르긴 뭘 몰라. 똑바로 대답해-"
"... 아 진짜 모르겠어. 현아 만나면 자꾸 차은성 얼굴이 아른거린단 말이야.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오- 네가 이제야 양심이 조금 찔리나 보다"
"너 죽을래 진짜"
"잘 생각해봐- 네 진심이 뭔지"
"차학연 너 그렇게 얘기하는 거 들으면 문현아가 참도 좋아하겠다"
"말하려면 가서 말해, 나는 원래 문현아 안 좋아해"
학연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손을 들어 보여.
꽤나 사람 보는 능력이 뛰어난 학연은 현아를 원래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
그녀가 매력적이지 않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아니면 나쁜 사람이라거나,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어.
그래, 문제가 있다면 너무 매력적이었다는 거지, 그리고 너무... 욕심이 많기도 했고.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나왔는데. 진짜 술 마시러 온 차림은 아닌데?"
"뭐...." 택운이 말끝을 흐리다가 마른 세수를 하더니 천천히 말을 꺼내. "현아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근데?"
"근데 가기 싫어졌어"
"네가 문현아를 만나러 가기가 싫어져서 오는 길에 차를 돌렸다고?"
"...응"
"문현아에 죽고 살던 네가?"
"네가 언제 죽고 살았냐?"
문득 울컥해서 이야기하는 택운에 학연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그랬다고. 그냥 피곤하고, 신경 쓰이고 그렇다고"
"아- 하-"
학연은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는 슬쩍 웃음 아닌 웃음을 흘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인 택운을 보면서 슬쩍 입꼬리를 올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현아는 마치 뭐랄까... 선악과 같달까?
목적이 있는 과일처럼 분명 달콤하겠지만 베어 무는 순간 타락하게 되는 그런 거 있잖아.
눈에 빤히 보이는 레퍼토리에 진절머리 나겠지만 뭐겠어 그녀가 노리는 게.
과연 사랑이라는 그런 순수한 감정일까? 아니면 택운이 들고 있는 물질적 권위일까?
어떤 게 그녀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까?
눈에 빤히 보인다고 학연은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따로 훈수를 두고 싶지는 않았어.
그저 지켜보며 택운이 빠져나오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모든 아름다운 꽃들이 그렇듯 그녀의 향은 꽤나 매혹적이라 차마 홀리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택운은 자신이 고삐를 잡고 있는 듯 행동하곤 했지만 결국 그를 움직이던 건 현아였고,
이 썩어빠진 관계에서 택운이 빠져나오길 속으로 바라고 있던 학연은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은근슬쩍 말을 꺼내.
"그래서, 차은성씨는 어때?"
"...응?"
아니나 다를까 택운이 고개를 슬며시 들며 학연에게 되물어.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볼에 학연은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는 택운이 귀여워서 쿡쿡- 낮은 웃음을 흘려.
'생긴 건 무슨 시크의 절정같이 생겨서는 은근히 귀엽다니까 진짜'
"제수씨는 어떤 사람이냐고 너한테"
"...나한테?"
"그래 지금 한 거의 삼 개월인가? 같이 살아보니 어떠냐?"
"차은성이는"
"응응"
"차은성이는...."
너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니?
*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찰칵,
네 얼굴이 켜졌어
[나희덕 / 불투명한 유리 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