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차은성이는-"
택운은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학연을 바라보고 학역은 그런 그를 마주 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려.
볼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게 몇 잔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취했나 싶기도 해.
택운이 눈을 꾹- 감았다 뜨더니 제 혓바닥을 슬쩍 깨물어.
"차은성이는- 이상한 여자야-"
문득 그가 배시시 웃어 보여.
그 모습에 학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려.
"뭐래 이게"
"차은성이는 이상해.... 바보 같아-"
학연은 슬금슬금 술잔에 손을 뻗는 택운을 보더니 그제야 술병으로 눈을 돌려.
'뭐야? 이 자식 언제 이렇게 마셨데?' 그렇게 생각하며 재빠르게 택운의 손에서 술잔을 뺏어.
"야 지금 네가 더 바보 같아"
"아니, 진짜-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차은성이는"
"뭐가,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 한결같아 바보같이"
"그건 이상한 게 아니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사실은 다- 알고 있고"
"......"
"그리고-" 택운이 제 눈을 꾹- 꾹- 누르며 말해.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으응 그냥 빙글빙글 눈 앞에서 맴돌아"
"......"
"따뜻하고- 막- 간질간질-"
무언가를 상상하듯 눈을 감고 웅얼거리던 택운은 이내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휙- 들어 올려.
학연은 그런 그를 보고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가 이내 다시 배시시- 웃는 택운을 보고는 쯧- 쯧- 혀를 차.
어쩐지 시간 보니 분명 빈속인 거 같은 데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급하게 마시더니 완전 취한 것 같아.
택운의 학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꽤나 귀여운 눈웃음을 지어.
그러더니 한 마디 툭- 내뱉어.
"그러니까, 뽀뽀"
"뭐어?"
"뽀뽀- 하고 싶다-"
택운은 폭탄 같은 그 한 마디를 던지더니 이내 풀썩- 책상에 엎어져.
학연은 그 모습을 보고 한 편으로는 놀라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어이가 없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러고는 한참을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는 택운에 그제야 멘붕이 왔는지 택운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며 소리쳐.
"으아아아악-! 정택운 일어나!"
"뽀...뽀"
"이 웬수가 진짜!!!"
*
어떻게 집에 온 건지 모를 택운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비틀비틀- 현관으로 걸어가.
머리가 띵- 해서 그런지 비밀번호를 몇 번이나 틀리고는 현관에 머리를 대고 끙끙대다가 겨우 열곤 집으로 들어가.
그래도 비에 젖어 찝찝했는지 반쯤 나간 정신으로 용케도 잠 잘 준비를 마치고는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드러누워.
외투는 그냥 방바닥에 던져버리고 웃통을 벗고 누운 택운은 이내 제 곁에 이불을 꼭- 끌어안고는 눈을 감아.
새근 새근- 아이 같은 그의 숨소리가 어울리지도 않게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
그의 귓가에는 칭얼거리는 학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빗소리가 맺히는 것 같기도 하더니
이내 잔뜩 날 선 현아의 불평이 웅웅- 울리는 것 같기도 해.
그러다 문득 나긋나긋 귀에 맺히는 은성이의 목소리에 택운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어.
그래, 이제는 나긋나긋 귀에 박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취해 택운은 잠에 빠져들어.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는 그녀가 그의 꿈결에 속삭여주었던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어느새 찾아든 햇볕과 손 맞춰 그녀를 깨워.
은성이는 죽은 듯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잠을 자고 있었어.
어제 비를 맞은 탓인지 몸이 뜨거워서 쉽게 눈이 떠지지가 않아.
온몸이 너무너무 무겁고 으슬으슬 추운 게 꼭 몸살에 걸린 기분이야.
은성이는 낮은 신음을 뱉어내며 몸을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써.
'못 일어나겠어-'
은성이는 눈도 뜨지 못하고 속으로 끙 끙 앓아.
몸이 너무 무거워서, 너무 뜨거워서 차마 일어날 수가 없어.
분명 알람이 울릴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점점 정신은 희미해지는 것만 같고,
억지로 뜬 눈에는 뿌연 흐릿함만 감돌다가 이내 천천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그러다가 문득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감각에 안간힘을 쓰며 몸을 뒤척여.
숨이 너무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는지 이내 그녀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천근만근인 눈을 억지로 떠.
"으...으악!"
장난 같지도 않은 그녀의 비명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울려.
택운은 한창 꿈속을 헤매다가 문득 들려오는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뜨고는 얼른 몸을 일으켜.
그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기가 무섭게 퍽-! 하고 밀치는 충격에 이내 볼품없이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져.
택운은 놀라서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바닥을 나뒹굴다 인상을 쓰며 발로 채인 듯 한 제 어깨를 감싸.
"아...으으..."
택운이 한껏 얼굴을 찌푸리며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이내 얼빠진 얼굴로 침대를 응시해.
바닥에는 제 외투가 나뒹굴고 있고, 상체는 나신인대다가 머리는 부스스한 게 꼭 새가 알이라도 낳을 것만 같아.
택운은 큰 손으로 눈을 비비며 제가 나가떨어진 침대를 끔뻑이며 쳐다봐.
어느새 날이 개었는지 창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 그는 눈을 가늘게 떠.
'창문이 저쪽에 있었나...?'
생각의 회로가 끊긴 듯 제대로 맞춰지는 것 하나도 없고, 술을 너무 마셨는지 속도 쓰려.
목은 갑갑한 게 갈증이 나서 죽겠고, 어제 학연의 바에서 몇 시에 나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
택운은 한참을 그렇게 눈을 비비며 빛이 쏟아져내리는 창문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낯설게 다가오는 이 방의 풍경과
그 아래, 그러니까 침대 위에서 아른거리는 실루엣에 슬슬 몸을 피며 눈을 둥그렇게 떠.
"뭐...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택운이 문득 벌떡 일어나며 소리쳐.
당황했는지 발음이 잔뜩 뭉개져서는 꼭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그가 물어.
은성이는 반쯤 벗고 있는 택운의 모습에 자신이 꼭 두르고 있던 이불을 그에게 던지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해.
"내가 묻고 싶거든요?!"
"뭐?"
그녀가 있는 힘껏 던진 이불을 주섬주섬 받아들며 택운이 미간을 구기며 물어.
잠옷을 입고 있는 은성이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어서 그런지 택운은 괜히 신경이 쓰여.
"여기 내 방이에요!"
은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쉰 목소리로 그에게 말해.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택운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방을 훑어.
몇 번을 봐도 바뀌는 건 없어, 이곳은 분명히 은성이의 방이고 자신은 반쯤 벗은 채로 은성이 던진 이불을 두르고 있어.
택운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어젯밤을 되짚어보려 애를 써.
분명 집에 들어와서 씻고, 눕고, 잘 잔 것 같은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왜 내가 여기 있어?"
"그러니까요! 택운씨가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물어봤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알면 내가 놀라서 걷어찼겠어요?"
하긴... 은성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냥 자기 방에서 자고 있었을 뿐인데.
택운은 숙취에 머리가 띵- 해서는 얼빵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어.
따르릉- 따르릉- 귀청을 울리는 알람 소리가 울려.
은성이는 얼른 알람을 끄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러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휘청- 하다가 이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에게 다가가.
택운은 괜히 움츠러들어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여.
그런 택운을 꾹- 꾹- 밀어내며 은성이 중얼거려.
"빨리 나가요-"
"야- 야- 밀지 마-"
엉거주춤 꾸물대며 택운이 칭얼거려.
맨살에 닿는 그녀의 손이 엄청 뜨거워서 택운은 기분이 이상해.
슬쩍- 은성이의 얼굴을 훔쳐보니 아까보다 얼굴도 더 빨개진 것 같기도 하고, 온몸에 열이 나는지 뜨거운 기운이 폴폴- 올라와.
은성이는 곁눈질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택운에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뱉어.
"빨리 가요 오늘 별로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녀의 한 마디에 택운은 이불로 꽁꽁 싸맨 몸을 돌리더니 눈을 가늘게 떠.
그러고는 버릇이 어디 갈 세라 굳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해.
"원래 그렇게 집에서도 자주 보던 사이는 아니지 않나?"
은성이는 그의 한 마디에 그의 몸에서 손을 떼고는 지긋이 그를 바라봐.
그래, 확실히 열이 많이 나긴 하나보다 웅- 웅- 이명이 들리는 것 보니.
"...어제저녁에는 좋았어요?"
"뭐......?"
"다음부터는 그냥 현아씨 집에서 자고 와요, 괜히 실수해서 놀라게 하지 말고"
"야- 야... 잠깐만"
택운은 잠깐 생각하다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어.
그러다 말을 채 마치지도 않고 식은 눈으로 입술을 꾹- 깨물더니 주섬주섬 이불을 걷어 은성이에게 안겨줘.
은성이는 제 이불을 받아들고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침대로 돌아가.
택운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더니 문을 열고 나가.
시간이 모자라.
함께 정리할 시간이 너무 모자라.
택운이 나간 뒤 은성이는 침대에 다시 누워.
이불로 온몸을 감싸고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써.
"나쁜 놈"
은성이 작게 중얼거려.
'머리 아파-'
*
지각이 분명해진 시간에 택운은 대충 옷을 차려입고는 거실로 걸어 나와.
언제나 그렇듯 고요한 집인데 괜히 기분이 이상해서 택운은 미간을 찡그려.
부엌으로 걸어가는 그 몇 걸음이 이상하게 낯설어.
그러다가 오늘 은성이 아침을 차려놓지 않았다는 게 생각나서 가만히 서서 그녀의 방문을 바라보다가 현관으로 나서.
도대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 진짜 아무것도. 내 마음도 네 마음도 말이야.
늦은 오후, 사무실에 앉아서 업무를 보던 택운은 계속 울려대는 전화에 얼굴을 찡그리며 화면을 바라봐.
무슨 일인지 학연이 잔뜩 문자를 보내왔기에 택운은 괜히 찝찝해하며 톡을 켜.
*야 야 정택운
*야 정택운 주정뱅이 정택운
왜
*어제 잘 들어갔냐?
그 한 마디에 택운은 또 괜히 아침 일이 생각나서 기분이 이상해.
ㅇㅇ
*그래, 내가 대리비까지 내가면서 집에 보냈는데 잘 들어갔어야지
*야 정택운
왜
*뽀뽀는 했냐? ^^
뭐?
*뽀뽀했냐고 뽀뽀 제수씨랑
뭐라는 거야 미쳤어?
*기억 안 나? 뽀뽀뽀를 그렇게 불러재끼더니
누가 내가?
*그럼 정신 멀쩡한 나겠냐
장난치지 마라 바쁘다
*이게 왜 이래, 나도 이런 장난 질색 이거는 정뽀뽀씨
*읽씹하지 마
*야 정택운
*정뽀뽀!
*읽씹하지 말라고!
*야!
택운은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핸드폰 전원을 꺼버려.
그가 이내 눈을 꾹- 감더니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 애를 써.
'뭐였지? 뽀뽀는 웬 뽀뽀?'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다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그가 얕은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푹- 숙여.
아른아른 거리는 은성이의 입술. 간질간질 미친 것 같았던 첫 입맞춤. 뛰던 심장.
'뭐야 이거.. 뭐야.. 진짜'
"으아악- 미친놈"
이내 택운이 제 머리를 감싸며 쓴소리를 뱉어.
한참을 그렇게 책상에 머리를 박고 택운은 색- 색- 숨을 몰아쉬어.
'아 이거 무슨 BPM이 첫사랑하는 고딩도 아니고 왜 이러냐고'
괜히 하릴없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택운은 속으로 중얼거려.
학연이 저렇게 이야기하니까 무슨 취중진담이라도 한 것 같아 기분이 싱숭생숭해.
아니 그건 둘째치고 이게 말이나 되? 키스 한 번.. 아니지 아니지 두 번 했다고 이러는 게?
심지어 두 번째거는 별로 좋아서 한 것도 아니었단 말이야.
그리고 뭐 사이가 좋기라도 했어 뭘 같이 하기라도 했어? 그저 매일이 침묵의 전쟁 아니었었나?
근데 뭐야... 뭔데 이러는데?
"뭐야 정택운 왜 이러고 있어?"
어느새 들어왔는지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와.
택운은 얼른 고개를 들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현아를 바라봐.
그의 귀가 발갛게 익어있는 걸 보며 현아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구겨.
"뭐 또 보고할 것 있어?"
"내가 보고할 것 있어야만 들어왔어?"
"......"
"어젯밤에는 좀 너무했어 기다렸는데"
"피곤해서"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는 현아를 택운은 지긋이 바라봐.
그러다 문득 목구멍이 막히는 것만 같아서 슬쩍 고개를 돌려.
아- 이게 문제라는 거야,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네가 생각난다는 거.
"고개 돌리지 마-"
현아가 그런 택운의 얼굴을 붙잡으며 말해.
거봐, 차학연이 그랬지? 결국 이기고 있는 건 문현아였다고.
꽤나 진득한 소리들이 사무실을 매워.
더운지 뜨거운지 질척이는지 징그러운지 감히 정의할 수 없어.
다만 조금 더럽다는 것뿐이었어. 조금 더럽고 아주 나빴다는 것뿐.
'그래, 이게 맞는 거지' 하고 택운은 생각해.
이렇게 입술을 맞대고, 살결을 맞대고 서로를 탐하는 게 맞다고.
그러니까 혼란스러울 것 하나도 없다고.
갑자기 인생에 뛰어든 차은성이라는 세 글자 이름에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 없는 거라고.
정말?
*
'전원이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몇 번을 걸었나 몰라.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을 그 번호를 눌렀는지 몰라.
진짜 이제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자꾸만 흘러내려 눈앞도 뿌옇게 흐려져.
은성이는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제 무릎을 끌어안아.
몸이 너무 추워서 아무리 이불로 감싸도 떨림이 멈추지 않아.
벌써 세 번이나 속을 게워냈고 먹은 거라곤 물 몇 잔 밖에 없어.
평소에 아프단 말도 잘 하지 않는 은성이야.
감기에는 약 안 먹고 지나가겠지 하며 버티는 게 습관이고, 웬만하지 않으면 병원도 잘 가지 않아.
미련한 건지 아니면 강한 건지 도통 모르겠어.
근데 오늘은 조금 다른가 봐.
입술도 덜덜 떨리고 연신 식은땀을 흘리는 게 예사 아픈 게 아닌 것 같아.
하루 종일 끙- 끙- 앓다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은성이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그리고 그 많은 전화번호 틈에서 굳이 택운의 번호를 찾아 눌러.
이상하게 그가 전화를 받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해.
아무리 미워도 그래주면 좋겠다고.
근데 뭐야.
이게 뭐야.
"진짜 너무한다"
그녀가 중얼거려.
"정택운 나쁜 놈아"
그렇게 얼마간 제 무릎을 끌어안고 아이처럼 앉아있던 은성이 결국 다시 핸드폰을 잡아.
손이 떨리는지 몇 번 주먹을 꼭 쥐었다 펴더니 천천히 번호를 눌러.
신호가 채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참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
"여보세요?"
"...홍빈아 미안한데 나 좀 데리러 와줘"
"...."
"아파서.. 바쁜데 미안해"
"..."
"...."
"갈게"
"...."
"지금 갈게"
*
풀어헤쳐진 자기 앞섬을 추스르며 택운은 가만히 창밖을 바라봐.
어느새 옷을 단정히 한 현아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가슴팍을 끌어안아.
택운은 천천히 눈을 돌려 그런 현아를 바라봐.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그 얼굴로.
"문현아" 택운이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
"응?"
현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택운을 바라봐.
택운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에게서 떨어뜨려놓아.
현아는 미간을 구기며 그런 그의 눈을 응시하고, 택운은 가만히 그런 현아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우리 시간 좀 가지자"
*
절벽에 매달린 기분으로
너의 손을 잡았을까
[김행숙 /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