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맥스
다음 만남이 이런 곳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 했다. 간담회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자 병원에선 정국이 쓰러져 실려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화 기록 상단에 떠 있어서 보호자라고 인식한 것 같았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언론에 노출되어 정국에게 가십이 쏟아질까 염려되어 사람을 보내려 했지만, 그래도 직접 가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섰다.
덤덤한 척, 데스크에서 위치를 확인했다. …보호자 되시나요? 간호사의 물음에 찰나의 고민을 하다 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그래, 반쯤은 보호자겠지. 하며 말이었다. 알아본 사람들의 눈이 하나 같이 둥그렇게 뜨였지만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과로라고 했다. 입원실 문을 열고 자리로 가자 헬쓱해진 얼굴로 미동 없이 누워 있는 정국이 보였다. 링거를 맞는 정국을, 석진은 물끄러미 눈으로 담았다. 고작 25살밖에 안 된 아이한테서 고스란히 삶의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착잡한 기분에 깊은 숨이 절로 나왔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은 석진은 정국의 머릿칼을 매만져 주었다. 단지 미약한 동정만은 아니었다.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순간부터 머리가 아팠다. 시야가 똑바로 확보되고 처음으로 보인 건 어딘가 낯선 새하얀 천장이었다.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니 주변에 링거가 있어서 어떻게 봐도 병원이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몸쪽을 보자 병원 이름이 적힌 밋밋한 환자복이 보였다.
“… 어떻게 된 거지.”
아팠다. 억지로 입을 열어 쉰 소리로 한 마디 뱉었을 뿐인데 온 몸이 쓰렸다. 통증을 무릅쓰고 살짝 고개를 들기 위해 목에 힘을 넣었다. 예상대로 힘들었다. 이런 최악의 모양새는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비면서 지금까지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가뜩이나 잘 시간이 부족한데 요즘따라 밤을 꼴딱 새다시피 했다. 해가 지고 날짜가 바뀌기 직전까지 공부하다 바로 야간 아르바이트를 가느라 또 수면을 취하지 못 했다. 고작 1시간 퍼질러 자다가 다시 카페에 갔고… 결국 눈 앞이 흐려졌지. 이제 기억 났다. 힘 풀린 것만 생각 나고 그 이후는 전혀 기억에 없는 걸로 보아 의식을 잃은 걸 보고 민우가 구급차를 부른 듯했다.
아니, 잠깐? 나 병원비 낼 돈 없는데. 병원비는 커녕 고작 몇 푼 되지 않는 전기세도 밀리는 처지였다. 카페에서 잘리면 어떡하지. 정국이 잔뜩 미간을 구겼다. 현실을 떠올리긴 싫지만 회피할 수도 없었다. 아르바이트 마저 못 하면 빚더미에 앉는 것도 시간 문제일 텐데. 아픈데 마음 놓고 잠깐 아플 수도 없었다.
이런저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 깊게 우러나온 한숨만 쉬고 있으니 병실로 누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의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던 정국이 사뭇 놀란 눈을 했다. 이젠 넋이 나가다 못해 헛것까지 보는 줄 알았는데 정말 석진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머리를 굴리려던 찰나 통화기록에 빽빽할 석진의 이름들이 스쳐 지나 갔다. 몸을 일으키고 싶은데 기운이 나지 않았다. 다른 환자가 있으면 그 소음에 묻혀 있기라도 할 텐데 옆자리가 빈 입원실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석진은 짐짓 진지한 눈빛을 그렸다. 선계약 후만남. 딱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결혼이란 중대한 타이틀을 논의하고도 고작 네 번째 만남이었다. 몇 번 더 만나 보길 원한 건 사실이다. 그치만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
코딱지만큼 남은 허세는 있어서 꽤 오랜 시간 질질 끌고 있었는데. 이런 산송장 몰골이라니. 어쩐지 멋쩍기보단 조금 서러웠다.
“몸은 어때요.”
두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석진은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불투명한 흰색 수액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정국은 그저 끄덕거렸다. 맨살을 꿰뚫은 바늘이 아프기도 전에 돈 걱정뿐이었다. 비싼 주사일 텐데.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런 정국을 눈치챈 석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아픈데 돈 걱정뿐이네 온통.”
“… ….”
“여기까지 올 땐 병원비 대신 내줘야겠단 생각 정도는 하고 왔어요. 됐죠?”
괜히 정곡이 찔린 정국은 부정하고 싶었으나 피곤에 찌들어 살았어서 입도 벙끗 못 했다. 집에 가 봤자 또 바로 밀린 아르바이트나 갈 자신이 뻔했다. 그저 이것저것 몸 상태를 확인하고 침대 헤드에 기대 앉히는 그 손길을 따라 그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자체가 낯설어서 입술이 매말랐다.
“… …민폐 끼쳐서 죄송해요.”
“무슨 민폐.”
“저 때문에 괜히 먼 걸음 하시고….”
“전 정국 씨는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요?”
쩍쩍 갈라지는 정국의 목소리가 안쓰러운지 예민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정국은 그런 석진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어색했다. 몸을 혹사하더라도 돈을 버는 게 무조건 우선이고, 다른 여유 따윈 없었다. 재헌 외에 도움을 받아 본 적도 없었다. 냉담한 시선을 마주한 후로는 마음의 문을 닫고, 꼭 틈 하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런 배려와 걱정을 받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작은 호의에 갈피 못 잡고 거세게 흔들리는 걸 보니 문득 정국은 자신이 아프긴 아픈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플 때면 꼭 마음이 무너질 것처럼 느슨해졌으니까. 그래서 한없이 더 창피해져만 갔다. 석진의 눈빛은 마치, 그 모든 류의 감정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전 정국 씨보다 열 살이나 많은 사람이니까 잔소리라고 느껴도 한 마디만 할게요. 아니, 할게. 이런 존댓말도 솔직히 어색하고 우스워. 결혼 얘기는 먼저 꺼내놓고 선 긋는 거 같아서 말이야.”
축 처진 몸을 응시하던 석진이 천천히 목소리를 내었다.
“스스로한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마. 염치 없어도 괜찮고, 눈치 없는 척 해도 돼. 그래도 욕할 사람 아무도 없어. 다들 그렇게 살아가.”
한숨과 함께 한 박자 쉬어 가는 석진을 보며, 정국은 누군가의 말을 이렇게 길게 듣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를 생각해 보았지만 쉬이 떠올릴 수도 없었다. 정말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 ….”
“전 정국 씨가 잠깐 기대도 좋다고. 위로가 필요하다면.”
가진 감정의 무게가 점점 버거워 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풀리지 못 했던 설움들이 점점 쌓여만 갔다. 그 위로 한 마디에 울컥, 울음이 차올랐다. 입술을 깨물어도 소용 없었다.
25년을 버텨온 몸이라서 설마설마 했지만, 결국 일은 터져버렸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던 정신력에도 한계가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차라리 어디 크게 부딪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는 그 짧은 1분의 순간에 숨이 막혀 왔다. 괜찮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괜찮은 척을 하는 건 아닐까. 나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여기서 답을 내리지 못 한다면 결국 거절로 받아들인 석진과 흐지부지 멀어지고 다시 혼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너져 내릴 거 같은 방 한 구석에 등지고 누워 적막함이 엄습할 것 또한 잘 알았다. 정말 당연한 것들이었는데, 지금은 무서웠다. 짧은 충고가, 혹은 일련의 위로들이 낯설지만 한편으론 따뜻했다.
그리고 나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도 괜찮지 않을까.
서로 원하는 방향은 다른 곳에 닿아 있었지만, 목표는 같았다. 옆 자리를 채워 주는 것. 이혼을 예견하고 만나도 좋으니까,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다. 지금만큼은 너무도 절실했다. 눈물의 결정이 툭, 떨어졌다. 금세 바지를 적시고, 적신 그 위를 또 축축하게 만들었다.
“결혼하자고 말씀하셨던 거 ….”
“… ….”
“… 혹시 아직도 유효해요?”
결국 더 이상의 진전은 무리라고 생각했던 정국의 입에서 먼저 나온 결혼 얘기에, 석진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정국은 별다른 말없이 울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오밀조밀 모인 감정에 정국의 어깨가 떨려 왔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눈물을 머금은 새까만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긴 시간 고민해 온 것이 허무할 정도로 간결한 답이었고, 과연 이래도 되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오롯이 정국의 머릿 속에서 정리한 결론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이순간에 원하는 바를 떠올려 봤을 때 생각 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결혼. 그 두 글자가 몰아쳤다.
* * * * * *
어쩌다 결혼
저 경악에 찬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 결혼이 정말 얼마나 21세기 대한민국에 얼토당토 안 하는 스토리인지, 또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전개인지 실감이 났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람은 목에 서슬퍼런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이라곤 안 할 법한 재헌이니까. 선의로라도 절대로 씨알도 못 하는 강경 진실파, 그렇게 불리는 친구였다.
확실히, 스스로가 미쳤다고 느껴졌다. 예전부터 갖가지 고민을 다 털어 놨었다. 정말로 모든 고민이랄 걸 탈탈 털어서 먼지 한 올 안 나올 만큼 속내를 다 내비친 친구였다. 가정사를 넘어 앞으로 더한 것은 없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 표정은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래, 이왕 마음 정한 거 이유나 좀 묻자. 김 석진 부회장님이야, 돈이 차고 넘치는 걸 이제서야 알았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회유가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갑자기 왜 확신이 선 거야?”
재헌은 정국 쪽으로 눈길을 주다 커피나 벌컥벌컥 들이키며 말을 내뱉었다.
“…글쎄.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선택지는 내 인생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거든. 근데 지금 이 상황은 이지선다쯤은 되는 거 같아. 거절할 수도, 승낙할 수도 있는데,”
“… ….”
“내 처지에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아무래도 직접 내뱉고 보니 확실히 결혼이 싣는 무게감이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극히 평범한 부류가 한순간에 재벌집에 섞여 들어가는 일은 없었으니까. 드라마였어도 말이 되냐며 욕 한 바지 퍼부었을 텐데, 본인의 상황이 되니 말이 쏙 먹혀 들어갔다.
“뭐… 어쨌건 알았어. 내가 네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니고 피차 이렇게 될 일이었을 거야. 근데.”
“… ….”
“정말 후회는 안 하겠어? 곧 팔자 필 사람 치고는 낯빛이 너무 어둡다 너.”
재헌은 역시 촉이 대단했다. 정국의 행동거지만 보고 모든 걸 추론해 낼 만큼 여전히 촉이 좋았다. 처음 봤을 때 하고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한결 같아서 좋다고 해야 할지, 속마음을 들켜서 착잡하다고 해야 할지. 어찌 됐든 정국만큼이나 재헌 또한 어두운 얼굴울 했다.
속사정을 들킨 게 부끄럽지만 정국은 애써 다 티날, 솔직하지 않은 답을 했다. 괜찮을 거야. 하고 말이었다. 후회 안 해. 후회해. 둘 중 하나도 아닌, 애매모호한 중간의 감정을 실토했다. 돈이 없는 건 사실이고, 그토록 온기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근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라. 지금 네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잘 아는데, 기대가 크면 그만큼 힘들어진다는 거 알잖냐. 딱 지금 마음 정도로만, 너도 더 깊어지지 말라고.”
말을 마친 재헌은 꼬리를 무는 주제를 피하려는 듯 대답을 듣지도 않고 뒤로 돌아 강의실을 빠져 나갔다.
공강 시간 동안 밀린 잠이나 좀 자야겠다. 혼잣말은 이렇게 하고 눈을 감았지만 별로 졸리지 않았다. 석진의 도움으로 병원비 문제도 해결했지만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주변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두 번째 문제고, 그것 말고도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석진과 결혼 준비를 차차 해 나가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수고로움은 모두 석진을 비롯한 미래그룹이 해결해 줄 테지만 정국이 걱정하는 건 적응의 문제였다. 몸 하나 덜렁 와도 될 만큼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재력인지, 서민으로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집 구석이었다.
별로 억울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팔려 가는 심정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좋은 기회를 잡은 것에 고마울 정도였다. 그저 전혀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간극을 맞춰 나갈 수 있을지가 걱정될 뿐. 어찌됐건 부부니까, 그 정도는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려는데 복잡한 생각이 얽혀서 머리가 아팠다. 그만 정말로 자야겠다. 이미 물이 엎질러졌다면 엎질러진 건데, 사서 걱정하지 말고 미래는 나중 일로 미뤄둘까. 정국은 팔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정국은 오늘 아침부터 긴장을 했다. 파파라치 컷처럼 일부러 열애 사진을 찍고 언론에 퍼뜨려 작업에 돌입할 것이라는 문자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못 느꼈지만 정국은 저도 모르게 페이스가 말려 결혼을 위한 든든한 지원 사격에 나섰다.
알람이 울리기 5분 전에 깨어 나서 미리 알람을 끈 정국은 오랜만에 몇 벌의 옷을 몸에 대 보며 제일 잘 어울리는 것을 골랐다. 혼자가 된 후, 이렇게 단장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고 느꼈다.
정국은 석진의 요구대로 깔끔하게 차려 입고 약속 장소 근처 카페로 걸어갔다. 카페는 대체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깔끔한 곳이었다.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 마실 줄이나 알았는데, 카페의 부드러운 커피향이 후각을 자극시키는 것이 기분이 좋긴 했다.
정국은 다양한 종류를 주문하는 사람들 옆에서 한참이나 골똘히 메뉴판을 바라보다 거금을 들여 라떼를 주문했다. 재헌 덕에 이 집 카페라떼는 한 번 먹어 봤는데 고소하니 맛이 꽤 괜찮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마를 넘어 흘러 내리는 머리캇을 손 틈새로 가볍게 흝어 올린 정국이 카페에 앉아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한 상태였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쉬다 나올 걸 싶었다. 커피를 반 이상 홀짝였을 때쯤, 정국이 이 쪽으로 들어 오는 차 한 대를 보며 문 밖으로 나섰다. 이내 뒷자석 창문이 작은 소음과 함께 내려 갔다.
“가자, 타.”
눈이 마주치자 양쪽 입꼬리를 천천히 올린 석진이 눈썹을 까딱하며 타라는 무언의 표시를 던졌다. 정국이 머뭇대며 옆 자리에 타니 실장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빨간불에 멈춰져 있던 신호가 초록불로 옮겨짐에 따라 다시 속도를 냈다.
어쩌다 보니 작은 극장 하나를 대관해 영화도 볼 겸, 파파라치 컷을 연출하기로 했다. 여유롭게 주차를 하고 나서야 실장은 차키를 빼들곤 대기하겠다고 일렀다. 바로 들어가자. 그 말에, 정국이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석진과 걸음을 나란히 맞췄다.
정국이 새카맣게 타들어가다 못해 잿덩이가 되어버린 속내를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갈수록 걸음 속도를 늦추는 석진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선적으로, 석진이 잡은 팔목에서 느껴지는 듯한 심장 박동에 등어리가 젖어들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시선을 느꼈는지, 금방 손을 풀고 한 걸음 앞서는 석진이었다.
미리 언질했던 것과 같이 대관을 한 극장은 비어 있었다. 타이밍을 딱 맞춰서 온 덕에 얼추 지금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정국이 엄마에게 끌려 가는 아이 마냥 힘을 쭉 빼고 걸었다.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은 정국이 다른 곳과 달리 팔걸이 없이 나란히 붙어 있는 좌석을 보며 신기한듯 탄식을 뱉었다. 설마 여기 좌석 다 이래요? 귓가에 작게 묻자, 석진이 조금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비서실에서 알아서 처리한 거라 어쩔 수 없었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정국이 침을 꼴깍 삼키며 그대로 한 입 가득 빨대를 물었다. 얼음물에 담궜다 나온 차가움에 혀가 얼얼한 지경이었다. 석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봤다. 정국은 귓가를 울리는 영화 시작음에 당장이라도 극장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다른 두근거림에 손바닥 가득 땀이 배어 나왔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쯤, 시계를 한 번 쳐다보던 석진이 고심한 듯 자세를 머릿 속으로 구상했다. 그리곤 어깨를 틀어 조금 더 정국에게 다가갔다.
“저기 사진기사님 보이지? 이제 사진 찍을 거야. 여기에서 앵글 따면 되니까 가만히 있어.”
지금 바로…. 입을 마저 더 떼려던 정국의 말이 순식간에 먹혀 들어갔다.
준비도 안 된 와중에 얼굴 위로 겹쳐지는 온기에 정국은 눈을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조금만 참아. 석진이 귓가에 작게 말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여럿 넋을 놓게 할 정도로 잘생겨서 입이 벌어졌다. 이 정도 파파라치 컷쯤은 괜찮을 거라고 지레 짐작한 제 머리를 한껏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용기를 내어 다시 눈을 떴을 땐 따라오는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며 다시금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차마, 알량한 자존심에 부끄럽다는 소리 한 번 내지 못 했다.
“하나 더.”
석진이 의자에 납짝히 붙은 채로 굳은 정국을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빈틈 없이 코 앞에 떡 하니 얼굴이 놓여 있어, 민폐스럽게 이리저리 몸을 비틀 수도 없는 없는 일이었다. 정국이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민망해 죽겠는데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식은 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러다 정말 체온이 닿자 정국이 화들짝 놀라서 멀어졌고, 이제 다 됐다며 거리가 두 뼘 정도 멀어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분명, 머리는 이제 다 끝났다고 명령했지만 얼굴 위로 자리 잡는 파리함은 숨길 수 없었다. 어느새 떨어진 정국이 의아한 표정의 석진을 보며 그제야 머쓱한 듯 손을 들어 부채질을 하며 콧등 위로 생긴 땀방울을 슥, 닦았다. 표정 관리를 하려 해도 붉어진 얼굴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미안.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색하게 시선처리를 하는 정국을 보고 석진이 소근거렸다. 정국은 그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잡고 웃을 뿐이었다.
석진은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한 채로 본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해외 출장을 마치고 한국 땅에 발 들이기 무섭게 파트너사와 약속이 있어 쪽잠은 고사하고, 서류를 읽어 내려가느라 눈이 뻑뻑했다.
북미를 당일치기급으로 다니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자꾸 스케줄을 감행시키는 석필이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결혼할 때까지 밀어붙일 심산인지, 순간 잊고 있던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아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제가 망나니처럼 구는 것도 아니고, 필요로 한다기에 수명까지 단축시키며 부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건데 대체 왜 결혼을 못 밀어 붙여서 안달이냐고. 생각만으로도 피로가 더해졌다.
미래그룹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면 소위 잘 나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기도 했고, 그만큼 콧대가 높은 인간들을 상대하느라 석진은 지옥에서 흐느적거렸다. 그저 젊은 부회장 잘 구슬려 이용해 먹으려는 검은 속내만 그득했다. 머리 꼭대기에 한 번 올라가 보겠다고 애를 쓰는 종자들을 봐 주기엔 석진의 성질은 그리 좋지 못 했다.
“정국 씨와 만났던 날, 하필 해성뉴스가 포착했나 봅니다. 회장님도 아시는 거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해성뉴스라면, 대한민국 명실상부 최고의 인터넷 연예 전문 매체였다. 국내에서 정보 수집력에 있어서는 독보적이기도 했다.
수시로 보도하는 스캔들 기사는 전 국민적인 주목을 끌었다. 최근에는 열애설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던데, 아이돌 쪽에서 정재계 인물로 꽂힌 듯한 행보를 보였다. 조금 뒤가 구린 정재계 인물들이 제일 무서워 하는 언론임을 알았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아직 직접 노출된 기사는 아니라 일반인들이 접근하진 못 했단 것이었다. 석진은 태블릿을 켜 비서실에서 전해준 기사 전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미래그룹 김 석진 부회장이 중동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날(4월 14일), 가장 먼저 찾은 건 의외의 일반인이었다. 김 부회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2인자로서 국내외에서 독보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해성뉴스가 일반인과의 데이트를 단독으로 포착했다. … 」
기사를 보며 피식 웃은 석진이 혈색을 반쯤 담은 입술로 별거 아니라는 듯 달싹였다.
“이상한 기사 더 나기 전에 빨리 결혼 사실 발표해야죠. 더 이상 후진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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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맥스입니다.
저번주에 업로드를 못 했어서 4,5편 연달아 올라갑니다 :)
이미 파악하셨겠지만, 시작부터 그리 밝은 분위기가 아니었고 앞으로의 전개도 비슷하게 흘러갈 겁니다.
드라마에서 볼 법한 발랄한 로코물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진중한 관계 진전을 잘 풀어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
제가 16년도에 쓴 '37.6도의 플레이트' 본편은 이미 블로그에 최종 수정판을 업뎃했고,
번외편은 아직 수정을 마치지 못한 상태인데 혹시 받으실 독자님들 계시면 댓글로 남겨 주세요.
수정 후 보내드리겠습니다!
**문의 관련해서 메일 및 댓글로 다 받습니다.
어쩌다 결혼.
written by. 맥스
2022.03.03~
지독한 클리셰를 담은 계약결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