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봄바람 살랑살랑-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것을 은성이는 창가에 앉아서 가만히 구경하고 있어.
병원에서 퇴원한지 며칠이 지났고 일상은 다시 잔잔한 수면처럼 잦아들었어.
은성이는 평소처럼 아침상을 차리고 방으로 들어가고, 택운은 평소처럼 혼자서 식사를 해.
은성이는 저녁이면 거실에서 책을 읽고, 택운은 씻고 나와 괜히 소파 끝에 앉아 그런 그녀를 바라봐.
은성이는 말수가 줄었고 택운도 애써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아.
그저 우물쭈물거리다 한 마디 툭- 던질 뿐이야.
그러면 은성이는 그제야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하고, 택운은 가만히 듣다 한 마디씩 던지지.
그러니까 뭔가 되게 간질간질한데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
서로 눈치 보는 거라기에는 너무 적막하고, 싸우고 있다 하기엔 조금 다른 긴장감이 감돈다고나 할까?
한 사람은 점점 더 무던해지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런 그녀가 신경이 쓰여 죽겠어.
왜 신경이 쓰이는지 뭐가 그리 신경이 쓰이는지 확실히 인정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말이야.
주말에 택운은 느지막히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며 방에서 나오다 거실 소파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는 은성을 쳐다봐.
그러다가 느릿느릿하게 그녀에게 걸어가서는 풀썩- 소리가 나게 소파에 앉아.
마치 자신이 왔다는 것을 일부러라도 알리려고 하는 듯 말이야.
그 말없이 던진 추파가 통했는지 은성이 고개를 돌려 택운을 바라봐.
택운은 졸린 척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응시하며 입술을 움직여.
"뭘 그렇게 봐"
"그냥 벚꽃잎 떨어지는 게 예뻐서요"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그렇다고 사시사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 다시 창가를 보는 은성에 택운은 딱히 할 말이 없어.
괜히 탁상 위의 신문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택운의 귓가에 문득 은성이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
택운은 고개를 들고 은성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은성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택운을 보며 씩- 웃어 보여.
창가로 스며드는 빛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만 같아서 택운은 눈을 끔뻑여.
마치 무엇에 잠깐 정신을 뺏기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야.
"택운씨 오늘 아무것도 안 해요?"
"...왜?"
"나는 좀 나갔다 오려고요"
은성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택운은 그런 그녀를 눈으로 좇으며 입술을 잘근거려.
저렇게 기분 좋아 보이는 은성을 처음 보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이상해.
막 복숭아꽃 터지듯 예쁘게 웃는 것도 그렇고, 오늘따라 화장도 안 한 것 같은데 입술은 왜 저렇게 붉은지...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택운은 놀라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렇지 않게 헛기침을 하며 한 마디 툭- 내뱉어.
"이홍빈 만나게?"
"글쎄요-"
"글쎄요는 뭐가 글쎄요야, 만나면 만나는 거지"
"만날 수도 있고, 안 만날 수도 있고"
"자꾸 말 흐릴래?"
문득 택운이 욱- 해서는 은성을 보며 짜증을 내.
은성이는 그런 그가 우스워서 풋- 하고 웃더니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마디 하더니 문지방에 멈춰 서.
"왜 짜증을 내고 그래요??"
"...내가 언제"
"아닌가 내 착각인가? 하긴 택운씨가 왜 나한테 짜증을 내겠어, 관심이 없는데. 그렇죠?"
"....." 택운은 은성을 가만히 흘겨보며 입을 꾹- 다물어.
그런 택운을 보며 은성이는 빙긋- 웃더니 다시 입술을 움직여. "아- 나쁜 남자한테 어디 가는지 가르쳐주긴 싫었는데-"
"..... 이제 안 궁금해"
"그래요? 그럼 말고요"
그렇게 말하며 이내 방으로 들어가는 은성을 택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봐.
아니, 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꽤나 아픈 눈으로 입맞춤하는 자신을 바라보던 은성이었는데
이번에는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뻔뻔하게 나오는 게 택운은 은근 자존심 상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속으로는 은성이 무슨 생각을 하지는 궁금해서 죽겠으면서도 택운은 쉽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지 못해.
얼마 동안 서성댔던 걸까? 어느새 방문이 열리고 가벼운 봄옷차림의 은성이 문을 열고 나와.
은성이는 부엌에서 얼쩡거리는 택운을 바라보고 택운은 그녀를 보자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를 훑어.
"왜 그러고 있어요?" 은성이 가만 망부석처럼 서 있는 택운을 보며 물어.
"너..."
"응...?"
"....." 택운은 말을 하다 말고 은성을 가만히 째려봐.
문득 은성이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택운을 바라봐.
택운은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는 '씨-' 하며 가는 소리를 내고
은성이는 그런 택운을 보며 나긋나긋하게 말해.
"오늘 한가해요?"
"뭐?" 은성이의 생각지 못한 제안에 택운은 멍- 해져서는 그녀에게 되물어.
"우리 같이 산책이나 할까요?"
*
은성이는 택운이 옷 갈아입고 나오길 기다리며 현관에서 신발을 신어.
딱히 무슨 큰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거나 아니면 애써 행복한 척 자신을 포장하려 하는 게 아니야.
그냥, 뭐랄까 원래 자신으로 돌아가는 거라고나 할까?
아무리 화를 내고 걱정하고 싫어해도 택운이 현아를 만날 것이라는 걸 알아.
아주 처음부터 잘못 맞춰진 이 관계가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건 이미 택운과 나눴던 몇 번의 키스로 증명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정택운은 이기적이고 나쁘고 이해할 수 없는 남자지만 그의 말대로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고,
참 억울하게도 그의 잘못보단 그의 입맞춤이 더 많이 생각나게 되었으니까.
'그래, 이건 분명 썩은 싹이야' 하고 은성이는 가만히 생각해.
하지만 뭐 어쩌겠어.
마음이랑 포기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은성이는 분명 마음을 고를 텐데.
그게 상처가 딸려오는 일이라고 해도.
아니면 뭐.... 끝을 보고 있는 걸 수도 있고.
문을 열고 나오는 택운의 발소리에 은성이는 생각의 회로를 멈추곤 그를 바라봐.
검은 생머리를 쓱- 쓸어넘기며 나오는 모습이 얼마나 근사한지.. 문득 속에서 부글부글 짜증이 솟아나.
'진짜 더럽게 잘났어 아무튼-'
*
택운은 벚꽃이 만개한 길거리를 은성과 함께 걷고 있어.
기분이 이상한 게 잘 생각해보니 이런 데이트 같은 일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어.
그것도 그런 게 현아와는 늘 짙은 어둠이 깔리고 난 뒤에야 만나곤 했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걷고 있는데 문득 은성이 툭- 하고 그의 팔뚝을 쳐.
택운은 뭔가 싶어서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그녀를 내려다봐.
"천천히 좀 갑시다-" 은성이 말꼬리를 늘리며 그를 흘겨.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홱- 돌리는 은성에 택운은 신경 쓰여서 은근슬쩍 발걸음을 늦춰.
참 이상한 이 여자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연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화젯거리를 찾고 있어.
그렇게 신기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장소에 온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눈을 굴리며 쳐다보는 게 꼭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에 택운은 웃음을 꾹- 눌러.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뭐가요?"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흠- 오랜만에 산책 나와서 그런가, 다 신기한데요?"
"신기할 게 뭐가 있어, 사람 많고 시끄럽기만 한데"
"그래도 보기 좋잖아요. 손잡고 가는 연인들도 예쁘고 산책 나온 강아지도 귀엽고"
"별로"
택운이 퉁명스레 단답으로 대답하자 은성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저어. "괜히 데려 나왔어-"
"데려 나오긴, 그냥 할 거 없어서 나온 거야"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야- 너 아까부터 자꾸!"
그의 한 마디에 몇 발자국 앞서가던 은성이 빙글- 돌더니 이내 택운을 마주 보며 멈춰 서.
불현듯 평소처럼 가라앉은 그녀의 표정에, 잔잔한 듯 단단한 그 눈빛에 택운도 이내 멈춰 서서는 입을 꾹- 다물어.
아- 참 적응이 되지 않아. 차은성이의 저런 담담함을 마주할 때마다 택운은 기분이 이상해.
아픈 말을 할 때 그녀가 담담해진다는 것을 택운은 이제야 알 것 같아.
"그래도 내가 이러는 게 더 편하지 않아요?" 하고 은성이는 택운에게 물어. "감정 소모도 적고 그냥 실없는 얘기에 웃으면 되니까"
"......" 그런 그녀의 마음에도 없는 말에 택운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슬쩍 고개를 기울여. "나는 편하지, 근데 너도 편한가?"
택운의 그 질문에 은성이는 그저 씩- 웃으며 돌아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을까요?"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작은 미소라던가 목소리라던가 그런 의미 없는 것들이
자꾸만 자꾸만 마음에 번지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신경 쓰여...'
*
집에 돌아온 택운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제 옆의 은성을 또 훔쳐보고 있어.
아까 낮에 은성이 한 말이 내심 신경 쓰이는지 계속 눈길이 가서 자신도 죽을 것 같아.
은성이는 그런 택운의 속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과를 깎더니 제 입에 하나 집어넣고 오물오물 맛있게도 먹고 있어.
문득 은성이 고개를 돌려 택운을 바라보고, 택운은 무슨 잘못한 애처럼 놀라서는 얼른 고개를 돌려.
"사과 먹어요"
은성이는 눈치채지 못한 듯 그렇게 말하며 사과 한 쪽을 택운에게 건네.
택운은 괜히 혼자 민망해져서는 새침하게 그걸 받아들곤 입에 쏙- 집어넣어.
아삭아삭하고 달달한 과즙이 입안에 퍼져나가.
이내 은성이는 "샤워해야겠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택운은 그런 그녀를 눈으로 좇다가 도대체 자신이 왜 이렇게 그녀 눈치를 보나 싶어 한숨을 내뱉어.
학연에게 술 주정한 게 진짜 크긴 컸나 본 지 이젠 뽀뽀뽀 노래만 들어도 속이 달아올라 죽을 것 같아.
꽤나 나쁘게 그녀에게 입 맞추며 등가교환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인지 의심될 정도야.
까똑- 까똑-!!
한참 머리를 싸매고 현실 부정을 하고 있는데 탁상 위에 올려놓은 은성이의 핸드폰이 반짝거려.
택운은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계속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메시지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핸드폰을 째려봐.
그러고는 머뭇거리며 화장실 쪽을 흘끔 대다가 손을 뻗어 은성이의 핸드폰을 집어.
'시끄러우니까 보는 거야 시끄러우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택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 액정을 뚫어져라 쳐다봐.
까만 화면에 드문드문 올라오는 메시지 박스에 택운은 신경을 집중해.
'이재환...?'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이름에 택운은 눈을 가늘게 떠.
*차은성씨 나 이재환인....
*서얼마! 나 차단한 건 아....
*그때 스무디 완전 맛있....
*그래서 혹시 내일 시간....
*이번에는 내가 살 게, 데이..
"뭐야 이건?" 차곡차곡 쌓이는 메시지를 보며 택운이 중얼거려.
화면이 잠겨있어 그런지 "...."으로 요약된 문자 내용이 내심 궁금해서 그가 은근슬쩍 눈을 굴려.
이재환이라 하면 분명 남자 이름이겠다는 생각 만으로도 좀 짜증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마지막 문자에 "데이..."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린 문장이 거슬려서 택운은 미간을 찌푸려.
"이 자식은 또 뭔데 유부녀한테 문자질이야?" 괜한 진심이 그의 입술 사이로 툭- 튀어나와.
택운은 그래도 눈치가 보이긴 하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아직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하더니 홈버튼을 꼭- 눌러봐.
아니나 다를까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화면에 택운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술을 잘근거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뭘 하고 있나 싶어서 고개를 휙- 휙- 거칠게 내저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해.
그 순간 들려오는 '까똑!' 소리에 택운은 '그래 진짜 이것만 본다' 하는 마음으로 다시 액정을 쳐다봐.
*너무 예쁘게 하고 오진 마요. 나 반해.
"어쭈?"
택운의 입술 사이로 육성의 심술궂음이 튀어나가.
택운은 핸드폰을 탁상에 내려놓으려던 것을 멈추고는 다시 홈버튼을 꾹- 누르더니 비밀번호 화면으로 돌아가.
근데 그러면 뭐 해, 은성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딱히 짐작할 만한 네 자리 숫자가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생일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택운은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오기가 생겨서는 포기할 생각은 않고 아무 번호나 눌러보자는 식으로 심열을 기울여 손가락을 움직여.
얼마나 집중했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액정을 노려봐.
"....지금 뭐 해요?"
은성이의 핸드폰을 붙들고 고전분투하고 있는 택운의 귓가에 은성이의 목소리가 들려.
택운은 화들짝- 놀라서는 눈을 땡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려 은성을 바라보고,
은성이는 아직 촉촉한 머리카락을 하고는 택운과 그의 손에 들려있는 제 핸드폰을 번갈아 쳐다봐.
"아...아무것도 안 해!"
택운이 그녀를 보며 답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해.
은성이는 그런 그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슬쩍 그에게 손을 내밀어.
"무...뭐.."
"핸드폰 달라고요"
우물쭈물 대답하는 택운을 보며 은성이 또박또박 이야기해.
택운은 그제야 은성이에게 핸드폰을 건네고 그녀 눈치를 보며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은성이는 그런 그를 수상쩍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부엌으로 향해.
한참 있다가 그녀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와.
"택운씨"
"...어..."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뭐...뭐가"
"핸드폰 말이에요"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그래요?"
은성이의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와.
택운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안절부절 하고 있어.
그러다가 이내 혹시나 은성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택운이 발소리를 줄이며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
귀가 화끈화끈한 게 왠지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
슬그머니 문을 닫는 택운의 등 뒤로 은성이의 낮은 의문의 소리가 들려와.
"근데 왜 10분 잠금이 걸렸지...?"
*
이상한 일이다.
너는 분명 하나의 빛도, 잉크도 아니었는데
내게 번짐을 알려주었다.
그 뜻을 깨우쳐 주었다.
이내 네가 내 안 가득 번지고
나는 막을 겨를이 없다.
[백가희 / 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