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으 어어어어????" 다급한 재환의 목소리가 들려. "잠깐 잠깐만!! 아 차차차은성씨!!"
K.O.
흥겨운 음악소리와 함께 따라란- 붉은 글씨가 패자를 놀리듯 화면에 차올라.
재환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 화면을 보다가 "으잉-" 귀여운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여.
은성이는 그런 그가 웃겨서 소리 내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줘.
"잘 좀 해봐요 재환씨-"
"지금 놀리는 거죠?"
은성이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재환이 벌떡 일어나더니 입술을 삐죽거려.
은성이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재환은 "흥!"하고 콧김을 뿜더니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아.
"한 판 더 해요"
"벌써 이 게임만 5판 짼 거 알죠?"
"내가 이번 판은 꼭! 이긴다!"
"그 말도 여러 번 했는데-"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한 판 만 더--"
"알았어요- 대신 이번 판이 마지막이에요!"
은성이는 한 마디에 재환은 입을 앙- 다물고 눈을 빛내며 알았다며 고개를 크게 끄덕여.
은성이는 그런 그를 보며 못 말린다는듯 웃어.
타다다닥- 게임기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신나게 울려 퍼져.
입술을 꼭- 깨물고 게임에 집중하는 재환의 눈에서 불꽃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그의 반해 은성이는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고는 꽤나 자신만만한 얼굴로 버튼을 누르고 있어.
"아... 아아아--"
"자 이제 끝!"
다시 볼 필요도 없이 참패를 맞은 재환은 입술을 쭉- 내밀고는 일어나는 은성을 바라봐.
은성이는 그를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여. 그제야 재환이 한숨을 폭-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완전 속았어"
"뭐가요?"
은성이는 투명한 유리판에 잔뜩- 눌린 그의 얼굴을 보며 물어.
인형 뽑기 앞 은성이는 까만 고양이 인형이 가지고 싶었는지 동전을 몇 개나 써가며 시도하지만 툭- 툭- 아쉽게 떨어질 뿐이야.
재환은 그녀의 옆에서 인형 뽑기 기계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중얼거려.
"오락실 처음이라 그랬잖아-"
"게임 처음 해 본다 그러진 않았어요"
"그게 그거죠, 완전 사기꾼이네 차은성씨"
"나도 완전 속았네, 게임 엄청 잘 한다 그래서 기대했는데"
"하! 진짜 너무한다 진짜!"
재환이 두 팔을 벌려 인형 뽑기 기계를 껴안으며 인상을 찡그려.
은성이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그런 그의 손목을 슬쩍 잡으며 이야기해.
"자꾸 그렇게 얼굴 비비지 마요, 지지야"
은성이는 말에 재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려.
그러고는 기계에서 떨어지더니 은성을 바라보며 뿌리치기 어려운 눈웃음을 지어.
"지지가 뭐야 지지가. 완전 아기 대하듯 말하네"
"아? 내가 그랬어요?"
"네- 네가 그랬어요-"
"미안 미안해요. 기분 나빴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는 은성이의 모습에 재환은 진짜 웃음을 참기가 힘들어.
'조금만 더 놀려볼까' 그런 짓궂은 생각이 꾸물꾸물 그의 마음속에 차올라.
재환은 혹시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 눈을 굴리고 있는 은성이의 팔을 꼭 껴안으며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내.
"으잉 나 저거 저 인형 가지고 싶어어"
"재...재환씨 왜 이래요!"
"저거 저거 재환이 저 인형 가지고 싶다아아아아아아아"
"으앗! 조용! 그만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인!형! 인!형!"
"인형? 어떤 인형요? 어디??"
"크....큭 푸하핫하하하"
재환이 참지 못하고 당황해서 인형을 찾는 은성을 보고는 허리까지 숙여가며 웃음을 터뜨려.
그제야 재환이 농담하는 걸 알았는지 은성이는 차게 식어서는 멋쩍은 탄식을 뱉어내.
".....아...."
"진짜-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그만...."
"은성씨 지금 토마토 같아요"
"됐어요. 저리 가요"
"진짜 귀여워--!"
발갛게 달아올라 씩- 씩- 거리는 은성이의 어깨를 슬쩍 껴안으며 재환이 이야기해.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박수까지 쳐가면서 웃더니 그만하라는 은성이의 말에 애써 숨을 꾹- 꾹- 눌러가며 웃음을 참아.
재환은 눈을 흘기는 은성을 바라보다가 제 눈가를 쓱- 비비며 이내 입술을 움직여.
"은성씨 삐쳤어요?"
"아니요"
"삐친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내가 저 인형 뽑아주면 화 풀래요?"
"......"
"고양이 인형 가지고 싶죠? 내가 뽑아줄게"
"저거 안 되던데..."
"내가 뽑아준다니까? 못 믿어?"
그러는 와중에 은성이의 가방 안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
은성이는 가방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꺼내고 거기에 반짝이는 이름을 읽어.
재환도 어느새 슬쩍- 그녀의 액정을 바라봤다가 금세 눈을 돌려.
'정택운'
꽤나 낯선 그의 이름이 액정에 확실히 새겨져.
은성이는 그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재환은 웃음을 거두고는 이야기해.
"남편인가 봐?"
"네"
"나가서 받고 와요. 내가 인형 멋지게 뽑아놓을 테니까"
재환의 말에 은성이는 살짝 웃으며 뒤돌아 나가.
재환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흠-" 소리를 내며 인형 뽑기 기계 앞으로 다가가.
"한창 재밌었는데 말이야"
*
시끌벅적한 오락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제법 어두컴컴해.
재환과 꽤나 즐겁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는 사실에 은성이는 속으로 조금 놀랐어.
은성이는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해.
"...여보세요?"
"아! 받았다! 안 받는 줄 알았네"
"여보세요?"
"은성씨 안녕하세요?"
"... 누구세요?"
"저 차학연입니다. 택운이 친구요. 기억나세요?"
은성이는 곰곰이 그 이름을 뜯어보다가 이내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하도 이쁜 이름이라서, 그리고 까맣고 동글동글 수려하던 학연의 인상에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어.
"네, 기억나요 학연씨" 그녀가 낮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해.
"다행이다. 아니 아 잠깐만 야! 야야야!" 부드러운 학연의 목소리가 문득 다급하게 바뀌어.
"학연씨 괜찮으세요?"
"아-- 진짜--!, 저기 은성씨 지금 여기로 와줄 수 있어요?"
"네?"
"나는 괜찮은데 정택운 얘가 안 괜찮아서요"
"택운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좀 신나서.. 어어어? 야! 가만히 좀!"
"여보세요? 학연씨?"
"은성씨 내가 주소 찍어 보내줄게요! 와서 봐요! 끊어요!"
뚝- 급하게 끊긴 전화에 은성이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미 소리가 사라진 전화기를 응시해.
얼마 지나지 않아 학연이 주소는 보내고 은성이는 그걸 읽어내려가며 다급하게 택시를 잡아.
택시에 올라탄 은성이는 출발하고 나서야 재환이 생각나서 걱정으로 잔뜩 상기된 얼굴이 되어 재환에게 문자를 보내.
'까톡-'
오락실 문가에 서서 팔짱을 끼고 택시를 타는 은성을 바라보던 재환은 들려오는 문자 알림에 핸드폰을 확인해.
'재환씨 나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요 진짜 미안해요 오늘 재밌었어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점 하나 찍지 않고 보낸 문자를 읽어내려가며 재환은 한 쪽 입꼬리를 쓱- 올려.
"아쉽네-"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고는 고개를 젖혀.
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뜨며 제 손에 들려있는 작은 고양이 인형을 바라봐.
"너는 가엽게도 나랑 같이 우리 집에 가야겠다-"
*
다급하게 택시에서 내린 은성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하에 위치한 바 안으로 뛰어들어가.
Close라는 표시가 문 앞에 걸려있는 조금 어두운 바 안에는 잔잔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어.
은성이는 가쁘게 계단을 뛰어내려가서는 지친 얼굴로 카운터에 기대 있다가 발소리에 재빠르게 고개를 들어.
"학연씨!"
"왔어- 흐엉 드디어 왔어-"
학연은 놀란 얼굴로 뛰어들어온 은성을 보며 울먹이는 소리를 내.
은성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 안을 살펴.
분명 문 닫을 시간도 아닌데, 그래 피크라면 피크일 이 시간에 일부러 그랬는지 손님 한 명 보이지 않아.
다만 저기- 소파 뒤로 기다란 다리만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어.
"무슨 일이에요?"
버선발로 뛰어나오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학연을 보며 은성이 물어.
학연은 당황하는 얼굴로 울상을 지으며 그녀 앞에 서서 우물쭈물거려.
"아니.. 그냥 택운이가 전화가 왔길래..."
"네네, 괜찮아요 천천히 얘기해요"
"그러니까, 그래서 술 좀 같이 마셨는데. 막 뭐 캐내고 싶은 것도 좀 있고 해서. 아- 택운이가 원래 술을 잘 못 마셔요"
"그래서 택운씨는 괜찮아요?"
"그니까... 너무 많이 마셔가지고...."
"취했다고요?"
"네-" 학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제 머리를 긁적여. "조금 많이..."
"아..하...하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학연은 문득 들려오는 은성이의 웃음소리에 얼른 얼굴을 들어.
은성이는 가는 웃음소리를 내며 학연을 바라보다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
문득 마음이 놓인다는듯한 목소리로 은성이 이야기해.
"나는 엄청 놀랐잖아요 뭐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으으 미안해요"
"다쳤거나 뭐 잘못됐나 싶어 엄청 걱정했네.. 흐유..." 은성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안심이라는 듯 이야기해.
학연은 그런 그녀를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다가 이내 다시 울상으로 돌아가.
그러고는 소파 뒤에 삐죽 튀어나온 택운의 발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소곤소곤 은성이의 귓가에 속삭여.
"근데 조금 심각해요"
"네? 뭐가요?"
"...취한 정도가"
"지금 택운씨 자는 거 아니에요? 그냥 집에 데려가서 재우면 되지 않아요?"
"지금처럼 계속 자기만 하면 좋을 텐데, 아까는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요. 은성씨가.."
학연이 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려.
학연과 은성이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근원지를 바라봐.
부스럭- 부스럭-
그리고 갑자기 벌떡!
누가 물이라도 뿌렸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은 택운을 은성과 학연은 숨을 죽이고 바라봐.
학연은 그런 택운을 바라보며 사색이 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은성을 바라봐.
은성이는 죽은 듯 자던 택운이 갑자기 일어나자 놀랐는지 빤히 그를 응시하고 있어.
은성이 이내 소곤소곤 목소리를 죽이며 학연에게 물어.
"택운씨 지금 일어난 거예요? 제가 택운씨랑 술을 마셔본 적이 없어서 주사를 잘 몰라요"
"사실 나도 택운이 이 정도로 술 마시게 한 건 처음이라... 그러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한 마디로...?"
"지금 정택운은...."
학연이 스읍- 하며 숨을 들이마셔.
은성과 학연의 시선이 택운에게 고정돼.
의미 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고 있던 택운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고개를 돌려.
무슨 공포영화 한 장면처럼 슬로모션으로 행해지는 그의 움직임에 두 사람은 눈을 떼지 못해.
"정택운은" 여전히 택운에게 눈을 고정한 채 학연이 이야기해. "미쳤어요"
"....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던 은성이 조금 놀라 고개를 돌려 학연을 바라봐.
"미쳤다고요 저거" 학연이 진짜 미안하다는 말투로 은성이에게 말해. "미친 놈이에요"
정적이 물처럼 차올라.
잔잔한 음악도 언제 꺼졌는지 바 안은 고요하기만 해.
카운터에 늘어진 술병들과 단추 서너 개는 풀어헤친 택운의 나른함.
그리고 부스스한 머리와 발갛게 달아오른 볼 하며 모든 게 은성이에게 난처함을 선물해.
그러니까 지금 문득 발소리를 들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홱- 돌리는 택운의 모습까지도.
"........"
"택우...ㄴ...." 은성이 작게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이내 멈춰.
"어?" 그 소리를 들은 택운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입술을 움직여.
"........"
"차은성"
또박또박 택운이 그녀의 이름을 발음해.
그러고는 느리게 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그녀의 눈을 바라봐.
아주 정확히 그리고 아주 어지러운 눈동자로 말이야.
그때였을까?
그가 웃어버린 게 바로 그때였을까?
발갛게 달아오른 볼로
그렇게 예쁜 웃음을 지어버리면
그건 너무 반칙 아니었을까?
"차은성이 왔네-"
어눌한 발음의 택운이 은성을 보며 미소를 지어.
웅얼웅얼 뭉개지는 새액새액- 새어 나오는 그의 목소리.
"내 차은성이 이제야 왔네에-"
*
당신만 들어주면 돼, 그러면 돼,
나는 밤새도록 당신의 귓가에서 파도치며 출렁일 테니
당신만이 꿈의 주파수로 날 들어주면 돼
[박정대 / 해적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