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마이징
S U R M I S I N G
"김여주, 우리 오늘 숙제 뭐 뭐 있냐?"
"한국사 수행평가, 미적분 교과서 중단원마무리 풀기, 그리고...그런데 이런 건 네가 좀 챙기면 안 돼?"
"난 잘 까먹잖아."
"공책에다 써 놓으면 되잖아."
"그냥 네가 알려주라. 응?"
내가 네 알림장이냐?! 라고 소리칠 뻔했을 때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담임 덕인 줄 알아. 툴툴대며 책상 옆에 걸려 있던 가방을 집어서 교과서 몇 권을 넣었다. 민윤기는 얄밉게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산만한 분위기에 담임선생님은 항상 지니고 다니시는 기다란 나무 막대기로 교탁을 몇 번 내려쳤다. 그제야 학생들의 고개가 교탁 쪽으로 돌아갔다. 물론 한 사람만 빼고,
'한국사, 미적분, 또 뭐 있어?'
가방을 세워 얼굴을 가리고 나에게 입 모양으로 다른 숙제가 없냐고 민윤기가 물어왔다. 공부를 놓을 거면 아예 놓던지, 할 거면 제대로 하던지. 이건 뭐 내신을 나 하나에 의존하는 수준이라서 그를 매정하게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나머지 숙제를 입 모양으로 열심히 설명해줬다.
'고마워.'
민윤기는 내가 알려준 대로 교과서를 챙기고 다시 나에게 머리를 틀어 고맙다고 말했다. 기본적인 싸가지는 있는 놈이라 미워할 수도 없다. 그리고 명색이 6년 친구인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6년 동안 나를 필요할 때만 찾는 것 같아 서운해도 나는 그를 내 인생에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내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서 있는 애써 외면하고 싶은 그 감정 때문이다.
"와, 풀냄새 진짜 심하다. 여주야 나 토할 것 같아."
"그럼 토해."
"너무하네."
민윤기와 나는 이웃 주민인 사이기도 해서 항상 하교를 같이했었다. 여름 장마가 전날 그친지라 아직 거리가 눅눅하고 풀냄새가 공기에 진동했다. 어렸을 때는 코를 부여잡고 서로 경쟁하듯이 집까지 뛰어갔었는데 이젠 몸뚱어리가 무거워져서인지 역하면 역한 대로 나는 숨을 참으며 걸었다. 반면에 민윤기는 농한 풀냄새가 아직도 싫은지 오만 인상을 쓰며 걸음을 재촉했다.
"들어가."
"응."
"그래."
"응."
"응."
"응?"
우리는 심심하면 집에 곧장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인사를 길게 하곤 했다. 민윤기가 먼저 들어가라고 인사하면 나는 '응'이라고 답했고 그의 다음 말에도 '응'이라고 답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면 서로 같은 소리만 내게 됐는데 우리의 모습이 퍽 웃겨서 같이 키득댔었다.
"근데 우리 진짜 바보 같아."
"응, 너만."
"김여주."
"왜?"
민윤기는 웃느라 숙어져 있던 허리를 곧게 일으키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제거했다. 자신의 집 현관문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를 불렀다.
"요즘 엄마가 집에 잘 안 들어오셔."
"우리 아빠도 그러셔."
"아마 지금도 안에 안 계실걸."
"근데?"
"냉장고에 수박 있는데 먹고 가. 너 수박 좋아하잖아."
원체 입이 짧은 녀석이고 집에 어머님도 잘 안 들어오시니 같이 수박을 해치울 사람이 없었나 보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민윤기는 열쇠로 집 문을 땄다. 망설임 없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려는 나를 팔로 가로막더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다급하게 말한다. 우리 사이에 서로 창피할 게 있냐고 물었더니 거실에 빨래가 널려져 있다고 했다. 아. 그런 거라면 기다려줘야지. 얼굴이 이유 없이 달아올라서 나는 큼큼거리며 뒤돌아섰다.
"10분만."
"이제 들어 와도 돼."
집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콧잔등에 땀이 약간 맺힌 채로 민윤기가 문을 열어줬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발을 움직이며 거실로 들어서 소파에 앉았다. 민윤기는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그것을 익숙한 듯이 반으로 잘라 한 쪽은 투명 랩에 싸서 냉장고에 도로 넣어놓고 나머지 한쪽을 쟁반에 숟가락 두 개와 함께 들고 와 탁자에 놓았다.
"그거는?"
"뭐?"
"헐. 민윤기 너 설마 잊은 거야?"
"내가 뭘 잊었다는 거야."
"나 수박 먹을 때 항상 같이 먹는 거!"
그게 뭐지? 머리를 긁적이며 숟가락을 집어 들어 수박을 파먹으려는 그의 하얀 손을 가볍게 쳐냈다. 여름이면 항상 자주 수박을 먹곤 했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는 거지. 이건 절대로 내가 괜히 울컥한 게 아니라 서운할 만한 일이다. 한참을 째려보자 그제야 민윤기가 후다닥 부엌으로 들어가 냉동고에서 미숫가루 봉지를 꺼내왔다.
"진짜 미안."
"됐어. 우리 우정이 이 정도지 뭐."
"아, 여주야."
"뭐."
"삐지지 마."
민윤기는 나의 눈치를 살살 보며 황급히 수박 위에 미숫가루를 뿌렸다. 고소한 냄새가 맡아져서 기분이 금세 좋아진 나는 새침한 척 숟가락을 집어 들어 먼저 한 조각을 파먹었다. 안 삐진 거지? 화 안 난거지? 내가 정말로 화난 줄 알고 재차 물어오는 그에 나는 건성으로 됐으니까 어서 먹으라고 했다. 나의 답을 듣고도 나의 표정을 샅샅이 살피고 나서야 민윤기는 마음 편히 숟가락을 들었었다.
"벌써 8시네."
"그러네."
"엄마 오늘 집에 안 들어오려나 봐."
집에 들어오기 전 민윤기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나는 요즘 어머니가 바쁘시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수박을 다 먹고 배가 불러 바닥에 퍼질러 있던 민윤기가 배를 쓰다듬다 말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게. 왜 바쁜 거지?"
"그걸 네가 모르면 어떡해."
"물어봐도 안 알려주더라고."
최근 들어 민윤기의 어머니를 마주친 적은 별로 없었지만, 아파트 복도에서 만나면 항상 살갑게 대해주시던 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밤늦게 끝나는 식당 일을 하신다는 것뿐인데 그래도 매일 집에는 들어오시던 분이라는 거다.
"김여주 너희 아버지는 요즘 왜 바쁘신데?"
"...그러게."
"너도 모르면서."
"원래 바빴잖아. 그리고 아빠가 안 알려주는 걸 어떡하냐?"
"똑같네."
허무한 웃음을 피식 흘리더니 민윤기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앉았다. 잠시 멍하게 마룻바닥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파리가 꼬인 다 먹은 수박 껍질을 비닐봉지에 담아 치웠다. 집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책가방을 대충 메고 일어섰다.
"나 인제 간다?"
"잘 가."
"잘 있어."
민윤기의 집에서 나오고 바로 옆집인 내 집에 들어가니 예상대로 아빠는 없고 엄마만 있었다. 엄마는 요즘 인기라는 드라마에 집중하느라 저녁이 다 돼서 들어온 딸내미는 안중에도 없는지 나의 인기척에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다녀 왔습니다."
"어어, 여주가 왔어?"
"아빠는?"
"요즘 일이 많은가 보지. 엄마도 잘 몰라."
모르는 것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다른 집들도 이러려나. 아빠가 집에 얼굴 비추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어떤 날에는 일부러 잠들지 않으려 하기도 했었다. 혹여나 아빠가 새벽에 잠시 다녀가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밀려오는 졸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부릅떴었다.
알면 다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뭐든 너무 파고들면 안되는 법이다. 언젠가부터 아빠는 다시 집에 자주 들어오기 시작했었는데 문제는 우리 집의 문이 열릴 때 옆집의 현관 닫히는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열 번쯤 반복됐을 때 나는 상황 파악을 마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의 내가 불쌍해졌다. 그 정도로 걱정해줄 만큼 좋은 아빠는 아니었는데.
드라마에서만 보던 상황이라 나는 어찌할 줄도 모르고 몇 주 동안 혼자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었다. 아빠가 새벽에 현관문을 열 때마다 내 속은 복잡해져만 갔고 언젠가부터는 그를 향한 분노가 머릿속에 들어찼다. 확실한 건 이 일이 나 혼자만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 민윤기도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나는 민윤기와의 하굣길에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민윤기."
"어."
"요즘 집에 어머니 자주 들어오셔?"
"응."
"그렇구나."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실은 나도."
민윤기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았다. 둘 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고 그게 서로의 부모라 더더욱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은 잘 알겠는데 우리가 어떻게 나서야 하는 건지.
"엄마."
"응, 딸."
"아직도 아빠 사랑하는 거 맞지?"
"당연하지. 그런 거는 왜 묻는 거야?"
"...아니야."
FROM. DAP |
안녕하세욯ㅎ DAP입니다. 글잡에 글 처음 올려봐요. 현생에 치이는 중에 찔끔찔끔 쓰는 글이라 제 목표는 자주 오는 것보다는 완결입니다..! 완결...!!!!!!!!! 그래도 최대한 자주 오려고 해볼게요 약속. 혹시나 이해하지 못하신 독자분들 있을까봐 약간만 설명할게요. 여주와 윤기는 6년 지기 친구고 서로의 바로 옆집에 사는데 윤기의 어머니와 여주의 아버지가 언젠가부터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안 들어오시죠. 윤기와 여주는 이에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두 분은 집에 자주 들어옵니다. 하지만 아주 늦은 시간에 오시고 문제는 두 분이 동시에 돌아오신다는 점이죠. 여주는 아버지를 기다리느라 안 자고 있다가 양 현관문이 동시에 닫히는 소리를 여러 번 듣고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고 시간이 지나자 그것이 두 분의 외도라는 것을 눈치 챕니다. 윤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리 말씀 드리자면 <서마이징>은 윤기와 여주 간의 감정이 통하기까지 오래 걸릴 거에요. 앞으로 전개가 상당히 어두울 것이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을 거에요. 물론 이건 순전히 제 필력에 달린 문제지만ㅋㅋ... 이야기를 잘 풀어내도록 노력할테니 혹시라도 제 글을 좋아해주신다면 끝까지 가보아요,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