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왕 효과
어떻게 너를 미워해. 너의 대답을 듣지 못한 나는 그 자리에 여전히 머물러있다. 머리를 아프지않게 벽에 박았지만 아파오는건 나였다. 너는 아직도 서 있는지 작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더 이상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를 낭떠러지로 내몰아야하는건지 아니면 너가 일어날 정도로만 손을 내주어야할지 나는 아직도 고민을 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미팅 시간에 맞춰 오늘은 조금 늦게 문을 나선 나는 익숙한 얼굴에 잠시 발걸음을 멈춰 그를 바라보았다. 곧 도어락 번호를 누르던 그도 낯선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쳐다보고선 꽤 놀란 듯 다가왔다.
"여기는 무슨 일이세요?"
"아… 아침에 전화가 와서 받으니까 애 목소리가 완전 다 죽어가길래. 회사 가는거야?"
"네."
의외의 이야기였다. 전정국이 아픈건 꽤 오래된 이야기였기에 아주 잠시 그를 걱정했다. 수고하라는 조교님의 말을 끝으로 내딛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하철에서 내릴 때까지 그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미팅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찾았던 민윤기씨는 옷 매무새를 정리하다 다가오는 나를 보고선 단추를 매만지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의 앞에 선 나에게 그는 열쇠키를 쥐어주고선 먼저 앞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바이어가 지내고 있는 숙소의 초인종을 누르자 곧 그 쪽의 비서분이 문을 열고선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그렇게 해외 미팅에도 끝이 보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표정이 안좋아요?"
"평소랑 별반 다르지 않는데요?"
"그래요. 그럼. 난 또 엄청 걱정하는 표정이길래."
미팅이 끝나고 내려오는 엘레베이터에서 그는 어깨를 들썩이고선 곧 입을 꾹 닫았다. 호텔 로비를 걷던 순간에도 아무런 대화는 없었다. 그리고 호텔 바깥에 위치한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갑니다. 붕대 잘 푸시고."
"네. 들어가세요."
사무적인 대화가 편한 사람이었다. 그는 딱 그 말만 남기고 어떤 미련이라는 것도 없다는 듯 발길을 돌렸고 나 또한 발걸음을 평소보다 재촉했다. 그 발걸음은 회사가 아닌 병원으로 향했다. 드디어 깁스를 푸는 날이었기에 오늘은 조퇴를 하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대기실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중 또 다시 누군가의 생각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곧 내 이름 하나에 깨져버리고 만다.
깁스를 풀고 한결 편해진 팔을 보며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팔을 휘저으며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또 다시 깊은 생각에 빠져버리고 만다. 오직 단 하나의 생각이 고정되었을 쯤 동시에 쭉쭉 뻗어지던 팔은 사슬에 묶인 듯 가만히 고정이 되어버렸고 나는 방향을 틀어 발걸음을 빨리했다.
"전화도 없이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발걸음의 도착지는 남준씨가 일하는 회사였다. 이른 시간이어서 병원에는 사람이 꽤 많이 있었기에 대기실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몇 분을 기다리고 그를 마주했을 때 그는 꽤 놀란 듯 했다.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요."
"뭔데요?"
그는 한 손에 머그컵을 들고선 나에게 앉으라며 권유했고 난 의자를 조금 약하게 끌어 앉았다. 내 앞에 앉은 그는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다고 표현을 해왔고 난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2년 전 카페에서 왜 날 데리고 나갔어요?"
"무슨 말이에요. 갑자기?"
"그 때 차라리 밉다고 했다면, 화를 냈다면…."
"말했잖아요. 그럴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그리고 포기할 이유도 못 찾았다고."
내 두 눈을 빤히 쳐다보던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였다. 자신의 말이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이제는 알게 된 그의 버릇. 그는 손에 쥐고있던 머그컵을 책상에 올려놓고선 다시 나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났으면 네가 그 자리에서 울어버릴 것 같아서."
"… …."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그 사람한텐 웃을 것 같아서."
"… …."
"밤 늦게 전화했던 날, 다른 사람한테 전화를 했었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나를 불렀고 나한테 기대서 울었고. 그거 다 그 사람때문에 그런거잖아. 우는 모습 보이기 싫어서."
어쩌면 이 사람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야 그의 습관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는 나보다 훨씬 이르게 나를 알고 있었다. 그 때 가슴 어느 구석에 남아있었던 의문에 대해 그가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에게 감추고 싶은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그가 나에게 말을 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울 땐 언제나 그를 배제했다는 점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가졌던 감정의 균열은 단순히 '그에 대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빨리 달려서 차마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부턴 조금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도 보고 다녀요."
그의 말과 함께 바깥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내민 간호사 분은 남준씨에게 눈짓을 건네주었고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왔다. 병원을 나오자 땅거미 진 하늘을 보며 한숨을 터뜨렸다. 깁스보다 더 무거운 것이 나를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깁스를 두르고 있던 것이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거운 짐이었다. 집으로 걸어가던 길은 곧 어두워지고 공기는 차가워지고 있었다. 가을이 오는 것 같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기 전 불이 켜진 약국을 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무언가에 홀린 듯 약국으로 들어간 나는 약국의 내부를 한 번 빙 둘러보곤 나에게 말을 건네오는 그녀에게 말했다.
"캐릭터 밴드 주세요."
손에 들린 밴드를 쥐고선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갔다. 그 때 나는 집 앞 가로등이 밝게 켜져있기를 바라지도 않앗고 엘레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조교님이 아직 집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층에 도착한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의 집에서 나오는 조교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얼굴을 본 조교님은 다시 한 번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고 나는 그의 앞에 섰다.
손에 들고 있던 밴드를 그에게 내밀자 그는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죄송한데 이것 좀 전해주세요."
"이게 뭔데?"
"전해주면 걔가 가장 잘 알거예요."
"… 알았어."
내 손에 들렸던 밴드는 조교님 손에 들어갔고 여전히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조교님이었다. 그에게 고맙단 말과 함께 인사를 건네고 발걸음을 돌렸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시계 아직도 차고 있어? 가죽도 다 헤졌는데 끈이라도 교체하지."
그의 말에 시선이 내 손목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차던 시계였기에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제보니 고정되던 부분이 곧 끊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어 잡아당기면 끊어질 듯한 시계줄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미련이 남아서요."
"미련이 남아서 계속 그렇게 지내다가 결국 줄이 끊어져버리면? 그러면 시계 본체가 바닥에 떨어져서 아예 못 쓰게 될 수도 있어."
"… …."
"미련이 남으면 비슷한 줄로 바꿔서 쓰면 돼. 새로운 것도 좋고."
"미련이 남으면 비슷한 줄로 바꿔서 쓰면 돼. 새로운 것도 좋고."
조교님은 다 안다는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러겠다며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손에 쥐었다. 조교님께 인사를 끝으로 집으로 들어와 침대에 널브러졌다. 피곤하다는 생각이 빼곡해지며 점점 눈이 감겨왔다. 이대로 자고 내일은 아무렇지 않게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결에 잠시 눈을 뜨면 낯 익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환상인건지 환상이 아닌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몽롱함이었다. 눈 앞이 흐릿해서 누군진 잘 알 수는 없지만 곧 초점이 맞아들어간 형체는 또렷해진다. 주변이 흐릿해지고 하나의 형체가 더욱 또렷해져 누군지 알아보게 되었을 때 나는 이불에 살짝 고개를 묻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 형체를 바라보았다.
한 손에는 내가 약국에서 산 것과 똑같은 밴드를 쥐고 있었고 많이 아픈 듯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보는 형체는 내가 눈을 감자 다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그 형체는 뭐가 그렇게 슬픈지 눈물 한 방울을 바닥에 떨구고 만다. 천천히 걸어온 형체는 무릎을 굽히고선 내 시선에 그의 시선을 맞춘다.
"정국아. 나는 그게 사랑인줄 알았어."
눈을 감으면 다시 너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네가 보인다. 아직 잠에 젖은 목소리가 너의 이름을 부르면 너는 아무런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다. 그리고 나는 너의 반응에 맞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 때 나한테 사랑이란건 관심을 주고 보호하고 아껴주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게 아니더라."
교묘하게 시계침 소리와 숨소리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시 네가 사라진다.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배려하고 그것도 사랑이더라. 그리고 내가 했던 건 집착에 더 가까웠다는 걸 알기까지 무려 십 년이 걸렸어."
"… …."
"그러니까 나한테도 시간을 좀 줘.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도록 조금만 시간을 줘."
다시 네가 보인다. 소리는 곧 안정을 찾아 맞아들어갔고 마지막으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 방울을 보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
그에게 칼을 겨누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바닥으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 칼과 함께 그녀가 그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습니다. 두 눈을 감고있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를 마주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너를 죽일 수 있어."
"… …."
"그럴바에 차라리 나를 죽여."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온 그는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눈 주위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손짓이 무색하게 그녀의 얼굴은 다시 눈물로 번져갔고 그는 그녀가 다시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던 그녀는 곧 그와 시선을 나누었고 그제서야 그의 입이 열렸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이 세계가 죽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죽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당신을 미워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눈에서 마지막으로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이 칼에 닿은 순간 그녀는 놀란 듯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고 곧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는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녀가 서 있었던 모든 곳이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녀의 눈높이에 맞게 무릎을 굽혀 앉은 그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이 앨리스인걸요."
그는 그녀를 천천히 끌어당겨 품에 안았습니다. 곧 붉게 물들었던 머리는 검게 변했고 그녀가 입고 있던 의상이 푸른 색으로 변해갈 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흔들리던 세계는 곧 무너져 내려갔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와 눈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생각이 무너지면 세계가 무너진다. 세계가 무너지면 생각이 무너진다. 생각이 무너지면 당신이 무너진다. 세계가 무너지면 당신이 사라진다. 그와 그녀는 사라진다. 생각이 무너진 당신에게 그와 그녀의 흔적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
아침이라고 밝게 비추어대는 햇빛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오늘따라 강한 것 같은 햇빛에 고개를 이불에 묻어버리고 정신을 깨웠다. 어느정도 감각이 되돌아왔을 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느낌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아마 그 불편함은 손에서부터 타고 올라온 것 같다.
내 손가락에 시선이 머물렀을 때 나는 빤히 그것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손가락마다 감싸진 밴드를 보며 나는 어딘가에 장면에 의지해 웃음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암호닉이 왔습니다. |
다홍님 비비빅님 망고빙수님 몽총이덜님 분홍빛님 우유님 빰빠님 노트북님 0103님 비림님 띠리띠리님 배고프다님 골드빈님 슈기님 |
마지막 화 아닙니다!
마지막 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마지막 화가 아닙니다.
아직 2회정도 남았습니다....
중간에 나온 '붉은 여왕'이야기는 8화 정도에 나온 이야기와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번 화에서는 할 이야기는 많지만 나중을 위해 아껴두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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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암호닉 신청입니다.
이번에는 텍파를 암호닉을 신청해주신 분들께만 보내드리려 합니다.
혹시나 텍스트파일을 받고 싶다! 하시는 분들은 숫자라도 좋으니 암호닉을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