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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저기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학생 말이야, 맨날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인다며?
분명 남자 학생 하나가 혼자 사는 집인데 매일 여자가 드나든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그 집에 들러 청소와 빨래를 해주는 가정부의 말을 들어보면 갈 때마다 침실의 문은 닫혀있고 그곳에선 늘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온다며. 그러다 요 며칠간은 큰소리가 들려왔다는 주민들의 말이었다. 무언가 쨍그랑 깨지는 소리도 들렸고 찢어지는 여자의 비명도 들린다나. 그래서 한밤중에 경찰차가 왔던 날도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놔. 놓으라고 했다, 김태형."
"...."
"놓으라고!"
그 소문들의 주인공들이 드디어 입장하고 다시금 큰소리가 들려온다. 버티려 해도 남자의 힘은 버거웠는지 질질 끌려 결국 태형의 집까지 온 여자는 거칠게 그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더욱 거친 말들이 입에서 쏟아졌다.
"아, 시발. 존나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그녀의 손이 빠져나간 제 손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올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를 공허하게 쳐다보았다. 며칠간 그녀는 태형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놀러 온 지도 오래되었고 함께 체온을 섞으며 뒹군지도 오래되었다. 그녀는 그것이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할 때면 항상 나긋하게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었다. 서로의 몸이 가까워질수록 사이는 더 끈끈해지고 단단해진다고 그렇게 믿으라고 했다. 관심이 고팠다, 사랑이 고팠다. 함께 뜨거운 체온을 나누고 나면 더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영원할 거라고 믿었는데 항상 사랑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녀가 자꾸 변하는 것 같았다.
"전화는 왜 안 받았어."
"내가 니 전화라면 발발거리면서 꼭 받고 그래야 되냐?"
"내가 옷 이렇게 입고 다니지 말라고 했지."
"아, 존나 빡치게. 니가 무슨 상관이냐고."
흘러내리는 자신의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그녀는 끈적한 침을 바닥에 쭈욱 뱉었다. 보통 자신의 나이 때보다 성숙했던 그녀는 요즘 클럽에 꽂혀있었고 병신 같은 것들은 그녀가 아직 미성년자인 것도 모르고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딴 더럽고 역겨운 곳, 불을 활활 질러 날려버리고 싶었다. 분명 전엔 안 그랬는데 오직 내게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었는데. 다 망쳐버렸어. 그녀는 그리 길지 못 한 차림새를 달고 다녔다. 가려져 있는 곳보다 살색이 더욱 확연히 잘 드러나 보이는 그런 옷들을, 그녀는 좋아했다. 클럽에 다니고부터는 거의 속옷 같은 옷들만 걸치고 다녔고 단둘이 함께 있을 때면 벗기기도 쉽고 만지기도 쉬워서 그러려니 했지만 밖으로 나돌 때 그런 옷을 입고 다닌다면, 굴러다니는 남자들의 눈을 다 뽑아버리고 싶었다.
내 거야. 내 거라고.
"들어가자."
"놓으라고, 새끼야."
다시 잡혀진 손목을 아까보다 더 매정하게 쳐내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굳게 다물려진 입안은 더욱 세게 물어 서로 닿아있는 이들이 으득- 어긋났다. 오직 나를 채워줄 수 있는 건 그녀뿐인데.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 한다. 멀어지려 한다.
"그래도 참고 데리고 있어주려고 했더니. 시발, 이제 질려서 못 해먹겠네. 너란 새끼 존나 질려."
"...."
"그쯤 눈치 줬으면 알아서 짜져야 하는 거 아니냐? 뭔 새끼가 눈치도 존나 없어요."
늘 입이 거칠었던 그녀였지만 그런 독한 말의 화살은 내 쪽을 향하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잦아지는 것 같았다.
"아, 시발. 솔직하게 말할까? 나 다른 남자랑 잤어."
"... 뭐?"
"다른 남자랑 잤다고."
나만 사랑한다고. 내 곁에만 있겠다고 했는데. 그런 그녀가. 태형은 여자의 어깨를 꽉 눌러 잡았다. 더 이상 도망가지 못 하게 꽉. 그럼 여자는 몸을 비틀어 그에게서 빠져나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어떻게 그래. 나한테 어떻게 이래? 나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그게 사랑이라고 했으면서. 어떻게 다른 남자랑, 아니지? "
"와 존나 어리다, 진짜. 내가 니 엄마야? 그만 좀 징징거려."
"...."
"얼굴 좀 반반하고 침대에서 잘 구르길래 좀 놀아줬더니 비빌 곳이 없어서 자꾸 들러붙어."
"...."
"태형아, 누나가 그랬지? 나 다른 남자랑 잤다고. 이제 너 싫다고."
여자는 태형의 신발 바로 위 시멘트에 침을 퉤하고 뱉었다.
"다신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
"기분만 존나 잡쳤네."
여자는 제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잡을 수도 없이 빠르게 태형의 곁에서 멀어졌다.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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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나갔다. 더 이상 나를 채워줄 사람이 없다. 외로워. 누군가 아무나라도 내게 와서 날 채워줬으면 좋겠어. 사랑을 채워줬으면 좋겠어. 그 누구라도.
"태형아, 무슨 일 있어?"
"...."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 응. 나 좀, 도와줘."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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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요,"
어색할 거라고 생각한 건 크나큰 계산 착오였을까. 박지민이 어떤 사람인지 잠시 잊고 괜한 걱정을 했었나 보다. 아까부터 뭐가 그리 좋은 것인지 걷는 내내 방방 뛰며 평소보다 더욱 통통 튀는 목소리로 주절주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냥 자신이 이곳에 들어와 겪었던 일들, 지금 자신에게 떠오르는 웃겼던 일들. 물론 나는 여전히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은 박지민 혼자 밀어내기에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김태형과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걸을 때는 다른 남자들과 다른 이유로 몸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을 했지만 박지민과 걷고 있는 지금은 몰려오는 긴장감도 없었고 딱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분명 술이 들어가 긴장이 풀린 것도 있겠지만 박지민, 이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그를 향해 품고 있는 김태형과 다른 내 감정도 한몫 했을 것이고. 별 영양가 없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뜨문뜨문 올라오는 김태형을 애써 밀고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나와 함께 걷고 있는 것은 박지민이고 그는 여자친구까지 있는, 나쁜 놈이니까.
"벌써 왔네...."
그러게 내가 가깝다고 말하니까. 한 이십분쯤 걸었을까 걷는 중에도 쉬지 않고 뱉어낸 이야기가 아직도 남았는지 잔뜩 아쉬운 투로 쩝쩝 입맛을 다셨다. 멀리서 빌라가 보이고 이제 혼자 갈 수 있다며 그를 보내도 기왕 온 거 끝까지 임무를 수행할 거라고 나를 따라왔다. 결국 현관 앞까지 온 그는 입술을 쭈욱 내민 채 나를 보냈다.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아서.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이 쓸쓸해서 어쩌나. 결국 거절을 해버릴 걸 괜히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피해를 주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그럼... 들어가세요."
"네."
말을 하면 퐁퐁 공기 중으로 알콜이 날아가서 금방 깬다고 들었는데 마주 보고 선 그의 얼굴은 아직도 발그레했다. 이제 시간은 12시를 향해 달리고 있는데 그런 그가 제대로 집으로 갈 수 있을지 슬쩍 걱정이 되었다. 하도 착한 사람이라 가다가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 거절하지 못 하고 돈을 뜯기거나 흠씬 두들겨 맞으면 어떡하지. 이제 택시를 타면 할증이 붙어 값이 더 오를 텐데 집까지 가는 길이 멀면 어쩌지 금전적인 쓸데없는 걱정도 함께 들었다.
"저, 박지민씨."
"네?"
"조심히... 가요."
"그럼요."
그런 쓸데없는 걱정이 밀려들자 전날 그에게 오지랖이 넓다며 잔뜩 뭐라고 했던 것이 민망하게 스스로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갔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조심히 들어갈 것을. 괜히 그런 말을 했을까 그의 눈치를 보면 그는 살짝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활짝 웃어 보인다. 누가 잡아갈 거 같아.
여기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먼저 등을 보이고 들어가 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닐 듯싶어 그가 먼저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으면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먼저 가라고 해도 불 켜지는 것까지만 보고 간다며 고집을 부리고 기다렸다. 후- 짧게 한숨을 쉬고 알겠다며 먼저 등을 돌렸다. 아직도 뒤에서 나를 보고 있을 그를 남겨두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리고 띵- 도착했다는 소리가 작게 울린 뒤 그를 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봬요!"
하며 팔을 높이 들어 훨훨 흔들었다. 그런 그에게 짧게 까딱, 고개를 끄덕여주자 문은 천천히 닫히며 그를 눈앞에서 가렸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불을 환하게 켰고 우리 집에 불이 켜지는 것까지 보고 간다던 박지민도 드디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성격이라면 정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불을 먼저 켰던 것도 있었다.
가끔 야근이 잡혀 회사에 남아있는 경우 말고는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별로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도 금방 헤어졌고 혜주와 만난다고 해도 꽤 부지런한 그녀는 일찍 잠에 들어야 해서 늦게까지 놀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야근의 이유로 이런 시간에 집에 들어왔고 그럴 때면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피곤함이 훅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는 거. 오히려 개운했다. 약간의 알콜이 들어가 알딸딸하기는 했지만 박지민과 함께 걸어오는 동안 찬바람도 쐬서 머리도 맑았다. 기지개를 쭈욱 편 후 다음 출근을 위해 얼른 씻고 자려고 욕실 문을 열면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뭐 잊은 게 있나, 방금 전 헤어진 박지민일 거라는 생각에 별다른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 어...."
"방금, 왔어요?"
"네?"
나도 참 바보 같지. 그래도 한 번쯤은 의심을 했어야지. 아무리 박지민이 맞다고 해도 문을 열기 전에 한 번쯤은 고민을 했어야 했다. 방긋 웃으며 나를 반길 박지민을 생각하고 문을 얼어재낀 나는 더욱 깜짝 놀랐다. 하필이면 그게 김태형일게 뭐야. 그와 걷는 길 내내도 자꾸 생각이 나서 애써 떨쳐버리려고 욕까지 해댔는데 그런 김태형이 눈앞에 서있었다. 그렇게 욕을 해댔음에도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반가움과 달리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웃고 있지도 않았고 대뜸 내게 방금 왔냐고 물을 뿐이었다.
"혹시 방금 나간 남자,"
"아, 박지민씨?"
"하, 맞네."
현관에서 우리 집 불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박지민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내게 대답을 들은 김태형은 콧방귀를 치며 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게 왜. 그게 뭐가 어때서. 함께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는 나를 꽤나 힘이 들어간 눈으로 쳐다보았다. 역시나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라니까. 그냥 집으로 들어가면 되었을 것을 굳이 우리 집 초인종까지 눌러 나를 불러내었다. 그리고 역시나 나 또한, 내게 다시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며 매정하게 문을 닫지 못 하고 있었다. 그랬어야 했는데, 그에게 말했던 것들을, 내가 다짐했던 것들을 지키기 위해 문을 닫았어야 했다. 그의 입이 다시 떨어지기 전에 그렇게 했어야 했다.
"원래 그렇게 집까지 남자를 데리고 오고 그러나?"
"...."
"저 남자가 그때 그 남자야? 아니, 다른 남잔가."
"김태형씨."
"왜, 아주 집안까지 데리고 들어오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자신의 입만 나불거렸다. 그의 말에 나까지 눈썹이 씰룩거렸다. 낯설었다. 달리던 버스에서 끝내 내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지 않자 차갑게 식어버린 말투로 날 두고 내려버린 날도, 자신을 불러 세운 내게 다가와 핸드폰을 낚아채 나 대신 전화를 받았던 날도 방금처럼 표정이 어두웠던 적은 없었다. 눈앞의 김태형은 무엇엔가 잔뜩 화가 났지만 애써 누르려는 듯 보였다. 대체 왜. 뭐 때문에 화가 나는 걸까. 나는 왜 그에게 이런 말들을 듣고만 있어야 하는 걸까. 나 또한 그와 비슷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슬쩍 올려다보면 여전한 표정으로 나를 대할 뿐이었다.
"와, 술 냄새도 나네."
"...."
"이 늦은 시간까지, 남자랑 술이나 먹으러 다니고,"
내게 살짝 가까이 다가오더니 킁킁 흘리는 냄새를 맡았다. 그런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너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 그만해요."
"뭘 그만해."
"지금 엄청 주제넘는 거 알아요?"
"...."
"내가 왜 그쪽한테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자격도 없는 말을 뱉어댔다. 내가 그의 화를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 되려 화가 났다. 좋게 끝내고 온 회식자리에 기분이 몹시 좋았는데, 그는 하루의 끝을 망쳐버리고 있었다. 처음 문을 열고 그를 마주했을 때,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보지 못 했을 땐 오늘 하루를 마무리까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들었다. 애써 피하고 있었지만 보고 싶었던 얼굴을 마주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그였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내 앞에 주제넘게 참견하며 이유도 모를 화만 내는 이 남자는 내게 무척이나 낯설었다. 다짜고짜 내게 그런 말들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마음대로 나를 오해해버리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와 함께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방금까지 좋았던 기분을 나까지 망치고 싶지 않아 나오려는 화를 억지로 눌렀다. 물론 나도 그의 어이없는 말들에 기분이 나빠진 것을 당연했다. 하지만 그에게 뭔가 이유가 있겠지. 애써 침착하려 했다.
"대체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예요?"
"너는 왜 그러는데."
"내가 뭘."
"그러면 안 되잖아."
그의 눈은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갔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 싫은데, 그런 눈 보기 싫은데.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가 화가 난 이유는 뭘까.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해버리자 그는 한걸음 내게 다가오며 문을 닫아버렸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잠궈버리는 도어락 소리가 났고 둘만 갇혀버린 공간에 벌써부터 숨이 막혀왔다. 한 발짝씩 내게 더 다가오는 그를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다. 턱턱- 숨이 막혔다. 이 공간에, 남자와 단둘이, 김태형과 단둘이 갇혀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온몸이 경직이 된 듯 딱딱하게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려 해도 몸이 벌벌 떨려왔다. 주먹을 꽉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이건 무서움일까 떨림일까 두려움일까. 아님 습관적인 내 증상에 관한 것일까.
"그 새끼 뭐냐니까."
"...."
"뭔데 여기까지 끌고 왔냐고."
무서움이었다. 내가 김태형을 처음 보았던 날, 온몸에 오소소 돋았던 소름이 말해주듯 무서움에 그 자리를 피했었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내 감정은 그때와 같다는 걸. 자꾸 내게 다가오려는 김태형 때문에 나 역시 뒷걸음질만 칠 뿐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밀리고 있자니 끝없는 두려움 속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잔뜩 떨리는 몸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고 목소리 역시 발발 떨려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격 없는 말인 거,"
"...."
"알아요?"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겨우 꾹꾹 눌러 뱉어냈다. 내가 왜 당신한테 그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데. 그저 내가 걱정되었던 마음에 나를 데려다주러 온 아무 잘못 없는 박지민은 왜 김태형에게 욕을 들어야 하는 것이며. 단지 현관 앞에서 박지민과 마주쳤단 이유로 남자가 꼬여있는 그런 여자로 취급하는 것도 싫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게 화를 내는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지만 그 이유는 김태형이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그는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옆에 있으면서 내가 단지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런 오해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럴 자격, 절대 없다.
"자격,"
무슨 말을 꺼내려다 말고 그는 더 도망가지 못 하게 내 허리를 감싸오며 입술을 부딪혀왔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이 그에게 당겨지고 순간 훅- 하고 숨이 멈추었다. 얼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퍽퍽 쳐도 그는 더욱 나를 자신 쪽으로 당길 뿐이었다. 여전히 맞닿아 있는 내 입술을 콱 물었고 놀라 벌어진 입술로 그는 말캉한 혀까지 집어넣어 내 정신을 쏙 빼놓으려 했다. 계속해서 벗어나려 했다. 주먹을 꽉 쥔 채로 연신 그를 때려댔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입속을 탐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처음 해보는 좋아하는 사람과의 키스는 상상했던 것만큼 달달하지 않았다. 그건 단지 내가 남성 공포증을 이겨내지 못 해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거칠기만 한 김태형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제쯤 나도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을 포기할 때도 되었것만 그러지 못 하고 있었다. 분명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김태형이 맞는데,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자꾸 떠올라 그를 가리고 자리를 차지했다. 제발 누구라도 지나가길 바랬던 그날, 누군가라도 날 도와주길 바랬던 그날. 내게 잔뜩 독이 올라 마음대로 옷을 벗기고 내 몸을 탐하려고 했던 그들이 자꾸 떠올랐다. 몇 분쯤 김태형 또한 자신을 쳐대는 나를 버티며 입속을 탐하다 자신도 숨쉬기가 버거웠는지 입술을 떼어냈다.
"이제,"
"...."
"되는 거지."
눈물을 똑똑 흘리는 내게 그렇게 뱉어댄 후 허리를 꽉 잡고 있던 팔에 드디어 힘을 풀었다.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에게 기대 버티고 있었던 몸은 힘이 풀려 그대로 털썩 떨어져 자리에 앉아버렸다. 끄윽끄윽-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 한 채 주저앉아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고 쭈그려 앉아서. 자꾸만 불안감이 몰려왔다. 또 다시 그들이 내게 무슨 짓이라도 하면 어쩌지. 끔찍했던 악몽이 머릿속을 더럽히고 있었다. 살려달라 소리 지르는 내게 뺨을 내리치며 억지로 입을 막았던 그 순간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몇 명이서 나를 덮쳐 꼼짝 못 하게 만들었던 그 순간을.
"김아미."
"하지마... 하지마! 저리 가!"
자꾸만 떠오르는 악몽을 떨쳐내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으면 어깨에 닿아오는 손길에 더한 두려움이 몰려와 얼른 쳐내버렸다. 보다 더 심하게 몸이 떨려왔다. 숨이 할딱할딱- 제대로 쉬어지지도 않았다. 그냥 그때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게 정신이라도 잃어버리고 싶었다. 이미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내게 입을 맞춰왔던 사람이 김태형이었다는 사실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난 그저 겁에 잔뜩 질려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어린 중학생의 그날로 돌아가있었다.
"아미야."
"하지마...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입에선 연신 그날을 떠올리며 살려달라고 빌었다. 분명 보았다. 그날 내 와이셔츠를 뜯어내려고 꺼내들었던 날카로운 그것을. 그리고 그것으로 날 더욱 움직이지 못 하게 만들었다.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이 다시 떠오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울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그렇게 살려달라고 빌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내가 잘못했어. 하지마. 제발.
어느새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 늘 들었던 목소리로 나를 불러주는 김태형도 사실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저 내 주위는 김태형이 아닌 날 괴롭히려 몰려든 그들이 감싸고 있을 거라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겁을 먹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그렇게 정신이 반쯤 나간 듯 몇 분을 더 목 놓아 울었다. 그 생각이 더는 나지 않을 때까지, 더는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이제까지 애써 강한 척하며 참아왔던 눈물을 죄다 뽑아냈다. 이제 그들이 없다고, 나를 괴롭힐 사람들은 더 이상 없다고 안심이 들 때까지 울어재꼈다. 김태형과 같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손을 쳐냈고 더는 그의 목소리도 손길도 없었다.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는지 내내 촉촉했던 볼이 말라 가고 눈앞이 또렷해지며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후- 후- 천천히 숨을 내쉬다 끔찍한 기억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김태형이 떠올라 고개를 들어보면 마치 꿈을 꾸었던 것처럼 그는 사라지고 늘 혼자였던 집엔 여전히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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