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감화서
w.규닝
10.
차게 얼은 흙모래를 밟고 지날 때마다 그 위에 일었던 서리가 파삭거리는 소리를 내며 깨졌다. 뒤주머니 새끼줄에 서리서리 감아 놓은 책보가 흐트러지지 않게끔 조각걸음으로 장터를 가로지르는 뒷모습이 퍽 조심스러웠다. 도중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 것이 무색하게끔 저를 따라오는 이는 그림자도 채 뵈지 않았는데 불안스러운 눈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옆과 뒤를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휴, 작게 한숨을 내쉰 성규가 멈췄던 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날부로는 혹여라도 우현을 마주칠세라, 어린 재직이 기침을 알리기도 전의 이른 시각에 반궁을 찾았다. 전날 밤에 찾아 놓은 약제 꾸러미를 약방 문 앞에 놓아두기가 무섭도록, 반갑게 알은 척을 해 오는 수복의 인사치레도 마다하고 소리 없는 썰물처럼 그 곳을 빠져나가기 며칠 째였다. 어느 날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마주쳐 버린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우현은 인상을 팩 구기며 제 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지만 성규는 매번 고개를 꼬박 숙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했었다. 보나마나 다음번에 만나면 죽을 거야! 제 이런 행동들이 우현의 화에 불을 당기는 짓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괜스레 마른 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제 속에서 이건 아니라고 외쳐오는 통에 우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우현이 말했던ㅡ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미친 것이든, 미쳤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든, 그것은 결국 한 가지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성규가 제 앞섶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분명 그 때엔 우현의 앞에다 대고 저도 그런 것 같다는 말을 가까스로 눌러 담았었지만 어쩐지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 우현은 눈치가 빨랐다.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어도 알고 있었으리라. 자신의 허리춤을 움켰던 제 손의 의미를.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저를 안았던 우현의 어깨 위에 제 얼굴을 묻고 있었다는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았어도 전해진 결론이었다.
미지근한 감로수와 같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성규에 있어서만큼은. 한겨울 통그릇에 받아 놓아 얼음이 인 물처럼 차갑다가도 밤새 아궁이에 불을 때어 놓은 탓에 뜨거워진 물처럼 정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우현은 제 속을 그리 적절하게 섞어가며 그렇게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나 보다. 결국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로 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푹 젖게 만들어왔다. 저를 향해 밉지 않게 떨어지던 타박이 환청처럼 귓가에 따라붙었다.
반궁으로 향하는 길, 버들잎을 꺾어 만든 피리를 입에 물었다. 좁다란 줄기를 통해 빠져나가는 소리가 삑삑거리며 샛길을 울렸다. 찬 공기를 탁 트며 엇나간 풀잎소리가 꼭 저만큼이나 닮아있어 아무런 생각 없이 호드기를 불어대던 성규의 걸음이 또다시 느려졌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은 마음이 꼭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쇳소리를 내며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이미 녹이 슬어 심장께로 눌어 앉아버린 쇳덩어리가 입에 문 호드기를 통해 칼침같이 째지는 소리를 냈다. 이 모든 게 제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탓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제 마음 또한 우현과 같아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몰라 답답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하늘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정이 동하면 위험하다. 그러나 입에 물었던 무거운 고철덩어리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져 버린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빨리 안 와?’
멍하니 호드기를 잘근거리며 반궁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던 성규가 명륜당 앞마당을 지날 때 즈음 우현을 발견했다.
상유들의 강학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것을 알기는 하였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우현과 눈이 마주쳐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마침 명륜당 창가의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우현과 찰나처럼 눈이 맞자 번뜩 정신이 돌아왔다. 놀라기는 우현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턱을 괴고 앉아 애꿎은 책장만 휘적휘적 넘기고 있던 우현의 눈에 조막만한 무언가가 휑한 앞마당을 가로질러 가고 있기에 눈길을 돌린 것뿐이었지, 그것이 성규일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우현의 눈매가 단박에 치켜 올라갔다.
저를 보자마자 홰나무 뒤로 달려가 몸을 숨기는 성규에 가라앉았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현의 입에 경련이 일었다. 저 쭉쟁이 같은 게, 저러면 안 보일 줄 아냐? 나무 기둥 뒤로 툭 튀어나온 성규의 갓머리를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간간히 동태를 살피려 고개를 빼꼼 내밀던 성규가 불화와 같은 두 눈과 마주치자 또 화들짝 놀라 다시 몸을 숨겼다.
쿵덕거리며 가슴이 울었다. 찬바람에 날리는 옷자락을 꼭꼭 감쳐 쥐고 자리에 주저앉듯 앉아 떡하니 벌어진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까지도 줄곧 보고싶다 생각하고 있던 얼굴이, 너무나 갑자기 제 앞에 그려졌다.
빨리 안 뛰어오지? 성이 난 입모양이 벌써 몇 번이나 성규에게 다그쳤다. 자꾸만 명륜당 쪽을 훔쳐다 보고 숨고, 다시 훔쳐다 보고 숨기를 몇 번 째. 돌아볼 적마다 이쪽으로 올곧은 시선을 꽂고 있던 우현이 입모양만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당장에 날아오라는 듯 간간히 하던 손짓이 성규의 심장을 바닥까지 떨어지게 만들었다.
가까이 가? 가까이 오라고? 성규가 초조한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떴다. 이렇게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죽겠는데 어찌 가까이 오란 말이신 거야? 성규가 다시 얼굴을 빼고 명륜당을 돌아보았다. 우현이 이번에는 주먹질을 하는 시늉까지 해 보이고 있었다.
주역신강을 외는 유생들의 강학 소리가 명륜당 전각 아래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귓가로 옮겨간 심장 박동 소리 위에 경전을 읽는 수십개의 목소리가 얹어지자 더욱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은 흙바닥에 주저앉았던 옷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난 성규가 발소리를 죽이며 명륜당 쪽으로 걸었다. 그제서야 날이 섰던 우현의 눈매가 풀렸다. 무섭게 윽박지르던 손을 아래로 내린 우현이 제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성규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며 괜히 시큰둥하게 표정을 고쳤다.
‘어인 이유로 부르십니까?’
기어코 전각 바로 아래까지 와 닿은 성규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끔 허리를 숙여 앉아, 우현이 앞서 그랬던 것처럼 입모양만으로 그리 물었다. 우현이 제 아래에 잠자코 쭈그리고 앉아 있는 성규를 내려다보다가 아닌 척 경전을 향해 눈을 돌렸다.
그렇게 한참을 경전 외는 소리와 함께 박사의 크고 작은 말소리가 명륜당을 맴돌았다. 성규가 서까래 아래로 등을 기대고 앉아 전각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불러놓고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앉아만 있는 우현을 무턱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성규가 무릎을 모아 앉아 제 턱을 그 위에 기대었다. 찬바람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새삼 어깨를 움츠려 앉자 사각거리는 옷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성규가 더욱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제 무릎을 바짝 당겨 앉았다.
무슨 이유로 저를 부른 것이냐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현의 대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규가 공연히 제 입을 비죽였다. 결국 할 말도 없으면서 이리 오라 저리 가라 이른 것이었나보다. 성규가 제 머리맡에 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경전을 외고 있을 우현이 야속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때, 성규의 어깻죽지 위로 작은 종이가 툭 떨어졌다.
이유 없다.
짤막하게 써진 글씨에 성규의 입이 기가 차 절반쯤 벌어졌다. 성규가 홱 하니 고개를 들어 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창 턱 위에 팔을 괴고 앉아 있던 우현이 뭘 보냐는 듯 대응했다. 성규가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또 놀아 난거야. 성규가 바싹 약이 오르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움직였으나 문턱 밖으로 튀어 나온 우현의 손이 성규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졸지에 또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리에 앉은 성규가 울상을 지었다. 도대체 뭐 하자는 짓인지 몰라 고개를 올려 우현을 쏘아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낯선 표정이 저를 향해 보고 있었다.
쉿. 우현이 제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성규가 입을 꾹 다물자 제 귓가를 덮고 있던 귀 덮개를 벗은 우현이 성규더러 까딱까딱 손짓을 했다. 우현이 하는 양을 잠자코 노려보고만 있던 성규가 종래에는 천천히 머리를 가져다 왔다.
“雷以動之고 風以散之고…”
우뢰로써 움직이고, 바람으로써 흩어뜨리고…
여느 상유의 주역을 외는 소리가 귓가에 새겨졌다. 꼭 당겨 묶었던 갓 끈이 턱에 와 닿은 손가락에 의해 느슨하게 풀어졌다. 곧이어 눌러 썼던 갓은 소리 없이 목 뒤로 넘어갔다.
“雨以潤之고.”
비로써 적시고.
앞서 이어지던 말소리가 잠시 후에는 아득히 멀어졌다. 갓이 떠난 자리에 우현의 손이 다녀가자 따뜻한 무엇인가가 성규의 빨갛게 얼었던 귀 위로 덮어졌다. 성규가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윽고 무거웠던 고개를 들자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의 입매가 보기 드물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거의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성규가 침을 꿀꺽 삼켰다.
“日以煥之고…”
해로써 말리고.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뜨거운 감로수. 성규가 넋을 놓고 우현의 웃는 입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웃는 게, 무엇보다 더, 해사한 사람이었다.
“艮以止之고 兌以說之고 乾以君之며…”
간으로써 머물고, 태로써 기뻐하고, 건으로써 말하며…
열에 막혀 더운 귀 안에서, 주역 박사와 유생들이 읊는 주역 소리가 주문처럼 웅웅 돌기 시작했다. 성규의 얼굴이 상기된 것을 확인하자, 우현이 제 귀를 톡톡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 같았다. 성규가 화들짝 놀라 넋을 차린 후에 덮개가 쓰여진 제 양 귀를 덥석 잡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붓모가 슥슥 종이를 지나는 소리가 났다. 성규의 어깨 위로 두 번째 종이가 떨어졌다.
귀가 얼었다. 언젠가 네놈이 내게 이르지 않았더냐? 제 몸 중한 줄 알아야지. 옛말엔 명의도 제 병만큼은 못 고친다 했다.
“坤以藏之하나니라.”
곤으로써 갈무리 하는 것이다.
성규의 눈가가 빨갛게 달았다.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핑그르르 돌아간 것을 느꼈다. 성규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평온하게 다음 문장을 외는 유생들의 말소리가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화끈화끈 열이 오르는 귓가를 다잡던 손이 필낭 끈을 꼭 쥐었다. 그리고는 숙였던 몸을 숨길 생각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전각 밑으로 달아났다. 무엇인가가 확실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의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용돌이처럼 제 마음이 말려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 곤으로써 갈무리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경전의 끝마디가 잔잔했던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큰 파동을 일으킨 후에 물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다 북장문 앞에 멈춘 성규가 가팔라진 숨 뭉텅이를 크게 내쉬었다.
머리뿐만 아니라, 힘주어 뜨고 있던 눈가마저 핑 도는 느낌이었다. 울고 싶었다. 결국엔 제가 내린 결론이 곤으로써 갈무리 되었다. 좋아한다. 결국은 저도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우현이 말했던 것처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미친 것인지, 미쳤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방금까지도 매섭게 저를 노려보고 있던 눈가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귓가를 따뜻하게 덮혀 주었다. 성규가 뜨겁게 열이 오른 눈가를 옷소매로 눌렀다가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시작했다. 그러다 머지않아 결국은 우현과 같은 결론에 닿았다.
미쳤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곤(坤)이라는 것은 땅이니, 만물이 모두 뜻을 이루는 바이므로 곤에서 일을 다한다고 하였다.
*
아직은 소인이 도헌을 뵙기가 무섭습니다.
우현이 성규에게서 받은 쪽지를 만지작거렸다. 짤막하기 그지없는 쪽지 하나를 이리 펴보고, 저리 펴보다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천장 위로 그것을 대어보길 몇 시간 째. 우현의 입가가 비실거리며 올라갔다.
그러니 자꾸 소인을 괴롭히려 들지 마십시오. 밤마다 도서고로 찾아오지도 마시고, 약방에 들르지도 마시고. 반촌에서 우연히 마주하더라도 저번처럼 큰 소리로 저를 불러 세우지 마시고 못 본 척 지나가주십사…또 공연히 약방 수복을 괴롭히지 말아 주셨으면 하고,… 괜히 소인이 드나드는 시각에 신삼문에 빗장을 걸어 두시는 거 다 압니다. 그것도…
연서라기보다는 쌓아두었던 한을 풀어내는 서찰이 그 뒤를 따랐다. 반듯반듯 정갈한 주제에 하고 있는 말은 어린 아이들의 투정 어린 어리광인 것만 같았다. 우현이 급기야는 구들장에 배를 깔고 드러누워 소리 내어 웃었다.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이르는 서찰은 결국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마음만 큼지막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마다 쑥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게,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그 안이한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자꾸 제게 얼굴을 가까이 하시는데…그것도 하지 마십시오. 꽤 단호하게 쓰여진 마지막 구절도 우현의 배 아래를 간질간질하게 만들어 놓았다. 우현이 킥킥거리며 웃다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반듯이 접어 베개 아래로 넣어 두었다.
그날 이후로는 딱히 고맙다는 말없이도 제가 해준 귀 덮개를 꼬박꼬박 하고 다니는 꼴이 또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미쳤기에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서생원의 모든 것이 예쁘게만 보여 큰일이었다. 그리 얄미웠던 쥐새끼를 제 쪽에서 먼저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게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았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의 감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좋아서 좋은 건데 어쩔 거야. 우현은 구들장 위에 제 볼을 납작하게 대고 엎드렸다. 한 번은 그리 물은 적이 있었다.
좋아해서냐? 어쩌다 반촌에서 마주쳤던 성규의 뒷덜미를 잡아채다 물었다. 성규가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꾸물거리며 대꾸했다. 아니라고 말해도 어차피 그리 알아들으실 것 아닙니까? 우현의 입꼬리가 그 때부터는 의식할 새도 없이 스멀스멀 올라갔던 것도 같다. 원했던 답을 들으니 혼자서만 키워가고 있던 감정의 싹이 곱절의 속도로 자라나고 있었다.
*
아직 첫 눈도 내리기 전이건만 이례 없는 한파가 찾아왔다. 성규가 얇은 옷깃일지라도 정성스레 여민 후 굳게 닫힌 약방문을 열었다.
“아이고, 선비님! 바깥이 춥지요!”
“오늘은 좀 그런 것 같소.”
성규가 지고 온 약제더미를 내려두었다. 멀찍이서 조그만 화로에 손바닥을 부비고 있던 수복이 얼른 다가와 꾸러미를 넘겨받았다. 이제 눈이 나릴 때도 다 됐습죠! 채신 차릴 것 없이 걸걸한 목소리가 약방 안을 채웠다. 성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구비된 자리에 앉았다.
“오다가 보니 반수교 아래 일던 물비늘이 고요해진 걸 보아하니 살얼음이 낀 모양이오. 곧 눈도 오겠지.”
“쇤네는 그러니까, 고 눈이 참말로 싫습니다요.”
“어인 이유요?”
“반궁에 쌓이는 눈을 매일같이 거둬내는 게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저희들입죠!”
또다시 걸걸하게 터진 웃음이 손사래를 치며 다음 말을 덧붙였다. 하이고, 이 반궁은 어쩌자고 그렇게 넓은 건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안 보이는 데에다가, 치운 자리는 뒤돌아보면 또 쌓여있고, 또 쌓여있고 하는 것이…, 수복의 넋두리가 끝도 없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성규가 그의 말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바였다. 저도 궐내에서는 어찌 되었든 권지에다 말단인지라, 누구보다 일찍 출사하여 내의원의 앞마당에 쌓인 눈을 게워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성규가 벌써부터 피곤해지려는 제 어깨 위를 툭툭 두드렸다.
“아! 맞다!”
그러다 별안간 자세를 고쳐 앉은 성규가 메고 있던 뒤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고 있던 하소연을 뚝 그친 수복이 성규를 돌아다보았다. 이거! 한참을 무언가와 씨름하던 성규가 그것을 척 꺼내 놓았다.
“이것이 무엇입니까요?”
“접선이오.”
“그러니 웬 접선입니까? 당장 눈이 나려도 안 이상하리만치 추운 날씨에…?”
수복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규가 꺼내 든 접선에게로 눈을 가져왔다. 노골적인 그의 시선에 성규가 공연히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거…
“도헌께 드리려는 것인데, 내 대신 자네가 도령님께 전해주었음 해서…”
“도헌 도령님이요?”
성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복의 말소리가 꽥 하니 높아졌다. 성규가 두 눈을 꿈뻑거리고 있자 수복의 눈이 의아하게 접선을 뜯어 살폈다.
“혹, 선비님께서 도헌께 책잡히신 일이 있으신 겁니까요?”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런 선물보단 직접 찾아가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는 편이 낫겠습니다요. 괴팍한 것 같지만 의외로 유들유들한 양반이라 그런 단순한 방법이 제일입죠.”
수복이 지레 손사래를 치며 접선을 든 성규의 손을 밀어두었다. 다시 뒤주머니에 집어넣으라는 의미였다. 잠시 당황함에 굳어있던 성규가 어색하게 웃으며 접선을 다시 내밀었다. 무언가를 책잡혀서 건네는 선물이 아니라, 내 일전에 반촌에서 만났을 때 모르고 받아 온…, 그렇게 말하려던 성규의 입이 딱 굳어버린 것은 다음에 이어진 수복의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접선 정도는 이미 한 됫박으로 가지고 계실 양반입니다. 홍문관 대제학의 영윤이신데 아무렴요. 어지간한 고가품이 아닌 이상 그분께는 바치나마나 한 걸 겁니다. 그러니 그런 것은 넣어두시고 차라리 무릎이라도 꿇으시면 중간이라도 가실 겁니다요.”
수복 쪽으로 밀어 두려던 접선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어찌됐든 그것을 넘겨주려던 손이 허공 위에 어색하게 굳었다. 유하게 웃고 있던 얼굴 또한 그 못지않게 굳어 멍청히 수복을 보고 있었다. 수복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농입니다요. 그냥 잘못했다고 싹싹 비십쇼. 끝까지 말장난으로 마무리 되는 수복의 말을 듣고 있던 성규가 접선을 집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홍문관 대제학의 영윤…. 그 말소리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고 다니는 행색이며 툭툭 내뱉는 말투며, 상대를 얕잡아보기 바쁜 생각머리가 딱 높은 집안의 자제일 거라고는 어림잡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문득 해일처럼 머릿속을 휩쓸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찬 물에 훤히 씻겨나가는 듯 했다.
제 손에 들린 접선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다 살짝 펴 보니 화사히 새겨진 매화 잎이 금방이라도 찬 바닥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성규가 두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떴다. 자꾸만 꽃잎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분명…
제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 내놓아도 사 들일 수 없을 만한 접선을 보고 약방 수복은 ‘그런 접선 정도는’이라 일렀다.
새삼스레 우현이 차지하고 앉은 자리가 날카로이 각인되고 있었다. 성규의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리고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어찌하여 제가 우현을 좋아하면 안될 것 같았는지를. 그것은 아마 저의 무의식 속에 감춰진 이성이 먼저 자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성은 안타깝게도 감성보다 한 발 늦게, 눈앞이 흐려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것을 일러주는 편이다.
*
비천당에서의 강의가 끝난 직후, 동재로 돌아 들어가려던 우현의 발길이 서재의 잣나무 앞에 그대로 묶였다. 그러자 그를 뒤따라오던 상유들의 걸음도 뚝하니 멈추어 섰다. 우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악 약방을 나서는 것이었는지, 늘 손에 달고 다니던 약제 꾸러미를 비운 성규를 발견하자 습관처럼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굳힌 것은 성규의 손에 들린 귀 덮개였다. 빨라지려던 우현의 걸음이 느려지더니 이내 멈추었다. 우현이 성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수복에게 알았다는 말을 건네며 약방을 나서 앞마당을 가로지르던 성규가 느닷없이 제 앞쪽에 멈춘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마주치기는 어찌나 이리 잘 마주치는 것인지, 또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우현을 발견하자 화들짝 놀라 급하게 머리를 숙였다. 더 자세히는 우현의 옆에 늘어선 다여섯명의 유생들을 향한 인사였다. 황급히 허리를 절반 넘게 꺾은 성규가 고개를 들지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우현의 옆에 섰던 유생들도 짧게 목례를 했다. 아, 의관 양반이구만!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흘리듯이 우현의 귓가를 스쳤다.
“도헌, 왜 멈추는가? 가지 않고?”
짧은 인사 후에 성규를 지나쳐 가려던 유생들이 꼼짝도 않고 서 있는 우현에게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굳게 다문 입 안으로 꼭꼭 욕을 씹고 있었다. 우현이 일어나지 않는 성규의 머리꼭지를 흘겼다.
우현이 화가 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아니, 추우니까 하라고 준 건데 뭣하러 손에 들고 있어? 우현은 성규가 두 손으로 공손히도 가지고 있는 귀 덮개에 신경질이 났다. 갓머리 아래로 보이는 귀가 발갛게 얼어 있었다. 게다가 다 헤져버린 짚신은 도대체 언제까지 신고 다닐 건지. 조그막해 보이는 발이 또 추울까봐 그의 짜증은 배로 일었다.
두 번째는 성규의 머리가 일어날 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저와 동방생들을 보자마자 깍듯이 굽혀진 허리는 그들이 자리를 지나갈 때까지 펴지지 않을 생각인가보다. 여지껏 그래왔다. 반궁 내에서는 실수로라도 다른 상유들과 마주치면 그들이 제 옆을 지나갈 때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제 앞에서까지 그리 하고 있으니 답답해 그지 않는 가슴께가 불이 인 듯 성화였다. 우현이 동방생들을 팩 노려보았다.
“내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자네들 먼저 가게!”
또 어인 이유에선지 날이 선 우현의 목소리에 그의 동방생들이 영문 모를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돌렸다. 그럼 그렇게 함세. 요사이엔 하루가 멀다하고 변덕스러운 우현의 기분이 또 무엇인가에 마음 상해 목소리가 저따위로 올라간 것이겠거니 치부한 유생들이 저희들끼리 무리지어 앞마당을 떠났다.
우현의 날 선 목소리에 깜짝 놀란 것은 외려 성규 쪽이었다. 얌전히 머리를 숙이고 있던 성규가 느닷없이 커진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했다. 곧이어, 고개를 들어 정황을 살피기가 무섭게 우현의 손이 성규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화가 나 잡은 팔목의 우악스러운 악력에 잡혀 던지듯이 밀어 넣어진 곳은 가까이에 있던 북장문 안의 좁은 빗장 뒤였다. 성규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자리에 버티고 서기도 전에 우현의 말소리가 먼저 터졌다. 야! 넌!
“귀 덮개가 장식품인 줄로만 아는 거냐? 내가 네 놈더러 손에 들고 다니라고 내가 아끼는 덮개를 덥석 내어준 것 같아? 이게, 멍청해도 유분수지.”
내놔! 성규가 꼭 잡고 있던 덮개를 낚아챈 우현이 성규의 갓을 목 뒤로 우악스럽게 끌어내렸다. 윽. 갓 끈이 목에 걸려 마른입으로 켁켁 댄 성규가 이윽고 제 뒷통수를 움키는 손에, 헉 하니 숨을 들이켰다. 머리 위로 앉은 손이 귀 덮개를 거의 구기다시피 성규의 귀 위로 바투 씌워 주었다. 사실은 약방에서까지 쓰고 있던 익숙한 열이 귓가를 메웠다. 우현이 비뚤어진 귀 덮개를 몇 번 더 고정시켜주었다.
“이렇게 쓰고 다니란 말야. 게다가 그 무식하게 큰 갓보다 몇 배는 더 잘 어울린다.”
그러면서도 목 뒤로 홱 넘겨버렸던 갓을 끌어 온 우현이 성규의 머리 위에 다시 씌워 주고는 주섬주섬 갓 끈을 당겨 묶기 시작했다. 성규가 조심스레 색색 쉬고 있던 숨을 참았다.
사실은 약방 수복과 나눴던 대화에 어딘지 모를 회의감이 들어, 쓰고 있던 귀 덮개를 더 이상 쓰고 다닐 자신이 없어 벗은 것이었기에 이질감이 들었다. 덮개를 벗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장본인이 다시 저의 귓가에 그것을 씌워 주고 있었다. 성규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을 바닥에 고정했다. 갓 끈을 묶느라 자꾸만 제 턱 아래에 와 닿는 손가락에 간간히 움찔거리자 우현이 더욱 가깝게 붙어 섰다.
“그리고 너, 앞으로는 그것들한테 고개 숙이지 마라.”
느슨하게 풀어졌던 갓끈을 새로 묶느라 내리깔아진 눈이 성규의 입술이며 턱 언저리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성규도 그의 빤한 시선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도 잠시, 차가운 벽이 서늘한 등 뒤로 닿았다.
“그것들이라 함은 누구를 일컬으십니까?”
“내 옆에 있던 것들 말이다. 아까 전에.”
뭘 묻느냐는 듯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옆에 있던 것들’이라며 쐐기를 박았다. 성규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들이 무슨 주상전하냐? 내 일전에도 네가 반궁 내의 상유들에 지고지순하게 머리를 숙이는 꼴이 아니꼬왔는데, 이제야 말한다. 그거 하지 마.”
“허면 소인이 어찌 상유들을 뵈었는데 허리를 펴고 있겠습니까?”
“안될 건 뭐야?”
갓 끈을 다 묶은 우현이 팩 떨어져 서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궐내의 당하관이다. 비록 저들보다는 신분이 낮다 할지언정 관직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저것들은 아직 대과에도 응시하지 못했을 뿐더러 고작 해봐야 소과나 치러 진사며 생원이라는 이름으로 반궁에 들어온 자들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출사 또한 먼 소리인데다가 한낱 권지 자리에도 오르지 못한 것들이질 않느냐. 대궐의 사람이 어찌 일개 유생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거냐고!”
“…….”
“네가 더 값진 사람이란 말이다. 대외적으로도 그러하고…”
잠시 동안 화에 부쳐 이것저것 따져 말하던 목소리가 흐려졌다. 우현이 너무 푹 눌러 쓰인 성규의 갓을 조금 들어올렸다.
“내게도 그렇다. 그러니 고개 숙이지 말란 소리야. 보기 싫다.”
보이지 않는 짐을 짊어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현은 그리 넓지 않은 성규의 어깨 위로 하늘만큼이나 쌓인 짐을 일찍이 알아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제가 거는 장난에 번번이 걸려 와 말을 섞고 있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눈 코 뜰새 없이 장안을 돌아다녀도 부족할 만큼 떠안은 직책이 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매일같이 한양에 버려진 환자들을 안으려 돌아다니기도 바쁜 데에다가, 한밤중 도서고에 훔쳐 들어 도둑 공부를 일삼아야 할 만큼 절실한 사람. 허나 그리 값진 인생에 머물고 있는 성규가 한낱 기생집에나 드나들며 경전이나 외고 있는 제 동방생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말이었다. 우현이 아직까지 바닥을 향해 떨어져 있는 성규의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숙였다. 성규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정적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우현이 그에게로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그래도 못 알아듣겠느냐?”
“…….”
“얼굴이 보고 싶으니 숙이지 말란 거다.”
우현이 줄곧 내려다보고 있던 성규의 입술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성규에게 닿기도 전에 그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서로의 갓 양태였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끔 멀찍이 떨어진 양태가 서로의 이마 끝에 닿아 부딪혔다. 우현이 잠자코 성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성규의 눈이 우현의 시선을 회피하기에 바빴다.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입술이 닿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함이었다.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가까이 오지 못하게끔 너른 양태에 한숨을 돌린 성규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우현이 그의 얼굴색을 내려보다가 성규의 뒷통수를 오른손으로 감았다.
급기야는 우현의 왼손이 성규의 갓을 다시 뒤로 넘기려고 했다. 성규가 덜컥 참았던 숨 뭉텅이를 급하게 내뱉었다. 도련님!
“가,갓… 벗기지 마십시오.”
얼른 손을 들은 성규가 뒤로 넘어가려던 제 갓을 다급히 붙잡았다. 갓을 내리고 나면 금방이라도 입술을 가져오려던 우현이 빤한 눈으로 성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성규가 제 뒷통수를 감아 안고 있던 우현의 팔마저 허공으로 떼어 두었다. 우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옷은 되냐?”
먼젓번과는 달리 장난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그리 말했다. 성규는 제 등줄기가 바짝 굳어버린 것을 느꼈다. 샐쭉했던 성규의 눈이 당황감에 올라갔다. 참 물을 걸 물으십니다! 공연히 제 앞섶을 붙든 성규가 더 물러설 곳도 없는 벽에 붙어 섰다. 우현이 눈을 접어 웃었다.
“물을 걸 묻는다고? 당연히 묻지 않아도 마땅한 일을 내가 공연히 물었던 것이냐?”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았다. 내 오늘 밤…”
우현이 숙였던 허리를 폈다.
“너와 함께 존경각에 있어주마.”
우현이 성규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뒷통수에 와 닿던 손바닥이 이번에는 어깨 끝을 감싸 안고 있었다. 어찌할 새도 없이 우현이 당긴 대로 안은 성규가 아까처럼 제 옆머리에 부딪히는 양태를 느끼며 머리를 숙였다. 우현의 고개가 더욱 깊이 제 쪽으로 들어올 수 있게끔. 성규가 우현의 어깨 위로 제 볼을 기대었다.
등이며 허리를 꼭 붙든 팔이 전율 비슷한 무엇인가를 불러 일으켰다. 멍청히 허공에 놓인 손가락 사이사이로 우현의 손가락이 얽혀 드는 것을 알았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성규가 두 눈을 꼭 지르감았다. 언젠가 명륜당에 들렀을 적, 제 가슴에 비수를 꽂아 놓았던 주역신강의 마지막 구절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다.
우뢰로써 움직이고, 바람으로써 흩어뜨리고, 비로써 적시며…
…곤으로써 갈무리하는 것이다.
*
어둠이 내려앉은 도서고 안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차일 아침이 밝으면 곧바로 본청에 내어 올려야 할 탕약을, 서책을 보며 달여야 할 것 같아 약탕기며 약연을 짊어지고 온 성규가 좁은 고서창고 안에다 자질구레한 도구들을 펼쳐 놓았다. 약탕기에서 약초가 끓는 냄새가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 성규가 매캐한 연기에 숨을 참고 있다가 간간히 뱉기를 반복했다. 숨이 막힌다고는 하나 밖으로부터 불빛을 차단해주고 있는 미닫이문을 열어 놓을 수는 없었다. 저를 숨겨 주는 최소한의 차양은 거두어서는 안되었다. 성규가 제 코를 쥐어 잡으며 약탕기 앞으로 손을 휘저으며 불을 올렸다.
그러다가 바삐 약탕기를 끓이던 손길이 뚝 멈춘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찬도맥을 펼쳐 놓고 앉아 갖은 약재를 그 위에 늘어놓던 성규의 머리가 불현듯 들려졌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밤에 같이 있어주마고 했던 우현의 말이 결코 장난 같지는 않았다. 성규가 초조한 고개로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꽉 막힌 사방에 우현의 모습이 보일 리는 만무했지만 다급해진 마음이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고 우현의 모습을 좇고 있었다. 약연을 놓친 손이 엄한 곳을 짚고 있었다. 펄펄 끓는 약탕기가 내는 연기가 성규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아니겠지, 그냥 장난으로 하는 말일거야 하며 끊겼던 공부를 다시 하기도 여러 번. 급기야는 찬도맥을 소리 내어 덮은 성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왠지 우현이라면 올 것 같았다.
열을 내며 끓고 있는 탕약의 쓴 냄새가 기도를 타고 매캐하게도 넘어왔다. 성규가 좁은 고서 안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될 것 같았다. 이 이상은 가까워져선 안 될 것 같았다. 제 발 밑에 늘어진 갈다 만 약재 더미가 약탕기의 연기에 가려 흐려졌다. 성규가 두 눈을 비볐다.
낮에도 충분히 위험했다. 이대로라면, 이 좁은 공간에 앉게 되는 것만으로도 저는 아마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제 감정은 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까. 혹 아까처럼 얼굴이 가까이 오기라도 한다면 미친 척 눈을 감아 버릴 것도 같았다. 허나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지독히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성규가 급하게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고 안을 채우고 있던 약탕기의 연기가 바깥으로 쏟아져 나왔다. 성규는 그것을 챙겨 담을 수도 없이 옆으로 던져두었던 필낭이며 뒤주머니만을 챙겨 든 채 존경각을 빠져나왔다.
“안 돼, 진짜 안 돼….”
제가 무엇을 중얼거리고 있는지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달아났다. 평소 우현이 들이닥치던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한 성규가, 우현이 씌워 주었던 덮개고 뭐고를 신경 쓸 겨를 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존경고의 담을 빠져 나왔다. 그러다 바삐 놀리던 걸음을 멈칫 하게 만든 것은 양 볼에 와 닿는, 아찔하리만치 차가운 눈발이었다.
정신없이 걸음을 놀리던 성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두컴컴히 내려앉은 하늘에서 올해의 첫 눈이 나리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콧등이며 볼에 내려앉는 눈송이가 차갑도록 매서운 감각만을 남기고 녹았다. 고개를 꺾어 그것을 올려다보기를 한참. 눈꺼풀에 내려앉는 눈에 빠르게 양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그것은 제게 어서 달아나라며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규가 하늘을 향해 꺾었던 고개를 바로 했다.
필낭의 끈을 바투 쥔 손이 찬 공기에 빨갛게 얼었다. 막 동재 쪽을 지나려던 성규의 눈이 자연스레 청재의 마루를 향해 갔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방이 여럿이었다. 부러 그 쪽에서 얼른 눈을 돌린 성규가 최대한의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누군가가 달아나는 제 발등을 도끼로 찍으려 뒤쫓아 오는 것 같았다.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던 걸음이 이제는 거의 뛰다시피 달리고 있었다. 무언가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것일까, 그게 아니면 외면하고 싶은 것일까 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도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어중간하게 부유한 마음을 떠안고 내달리던 성규가 내려앉은 어둠에 엎어져 버린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모나게 튀어 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성규가 서리가 내려앉은 흙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갑작스레 넘어진 탓에 얼굴을 감싸지도 못하고 그대로 넘어진 탓에 눈 밑에는 생채기가 늘었다. 그리고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결코, 어둠 속에서 넘어져버린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흙바닥을 짚은 손이 벌벌 떨려왔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두려움이 엄습하는 기분이었다. 성규는 직감적으로 여기가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있었다. 흙먼지가 붙은 얼굴이 서서히 들렸다. 낡은 도포 위로 번잡하게 묻은 먼지를 털어낼 새도 없이 들린 고개가 아주 천천히 앞을 향해 올라갔다.
대성전(大成殿)의 기와 끝이 웅장하게도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것을 마주했다.
성규의 숨이 턱 막혀왔다. 서서히 고개를 들었던 것처럼 아주 느린 속도로 입이 벌어졌다. 크게 떠진 눈이 깜빡이는 것을 잊기라도 했는지 대성전의 높은 기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눈꺼풀이 떨려왔다. 경련이 이는 것 같았다. 숨을 멈춰버림과 함께ㅡ 심지어는 벌벌 떨고 있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따라 멈추었다. 그리고 한참만에 그의 입에서 밭은 숨 뭉텅이가 터져 나왔다.
대성전의 현판이 어두운 밤하늘을 아우르고 있었다. 컴컴하게 꺼진 세상 위로 높은 하늘은 쉼 없이 눈발을 내리고 있었다. 광활하게 치켜 올라간 기와의 끝자락이 마치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아졌다. 성규의 시야에 내리고 있는 눈이 모두 정지된 것만 같았다. 굵은 글씨로 정갈하게 새겨진 현판이 저만치 위에서 성규의 머리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압감을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땀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대성전 앞마당 한 가운데 엎드려 앉은 제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 것만 같았다. 성규의 눈시울이 벌게졌다.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성현들의 위패가 형체 없이 살아나 저를 꾸짖는 것만 같았다. 그저 제 사사로운 감정에만 눈이 멀어 우현이 앉은 자리를 외면하려 했던 것에 한없이 가슴이 미어져왔다. 크게 떴던 성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대성전의 윤곽이 눈앞을 흐리는 잔상에 연기처럼 옅어졌다가, 칼날처럼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엄청난 위압감이 어깨를 덮쳤다. 결국에는 대성전, 세 글자가 새겨진 현판 아래 고개를 조아렸다. 훤히 드러난 뒷목 위로 쉼 없이 눈발이 내려앉았다. 눈물이 뚝, 뚝 얼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너는 어찌 이례 없는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냐, 일찍이 너희에게 가르침을 내린 성현들은 사내더러 사내를 사랑하라 이른 적이 없다. 유학의 가르침을 받는 자로써 어찌 그토록 이례없는 감정에 얽매이고 있는 것이냐. 고요한 대성전 안에서부터 저를 책망하는 성현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귓가를 울렸다. 차가운 서릿발이,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엎드리고 앉은 성규의 손에 채찍질을 일삼듯 내려앉았다. 뚝 뚝 떨어지던 눈물이 곧이어는 쉼 없이 볼을 타고 내렸다. 현판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앉은 어깨가 한이 동하는 듯 떨려왔다.
성현들의 위패가 자아내는 중압감이 온 몸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찬 귓가에는 일전에 비수처럼 새겨들었던 주역신강의 마지막 구절이 무겁게 식은 과녁 위로 시위를 겨누었다.
ㅡ곤으로써 갈무리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정확한 대답은 곤(坤) 이 아닌 도(道)라는 것을 알았다. 사사로이 가졌던 감정은, 도(道)로써 끝맺음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도가 아닌거야….”
역시 아니었던 거야… 성규가 대성전의 무거운 현판 아래로 무너졌다.
*
감로수
달콤하고 맛있는 이슬
대성전[ 大成殿 ]
공자, 맹자 등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 즉 문묘(文廟)의 정전(正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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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손으로 경전을 검색하다니..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