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 마흔살 아저씨 짝사랑하기
w.1억
아저씨의 차에 타서 아저씨를 힐끔 보면, 아저씨는 무심하게 나를 한 번 보더니 운전대를 잡았다.
잠깐 신호가 걸렸을 때. 아저씨가 뒷좌석에서 무언가를 가져와 내게 건네주었다. 뭔가 싶어서 보면.. 뭐야.
"샐러드?? 언제 사왔어요!?"
"너 준비할 때."
"아아.. 담배 피느라 나간 줄 알았는데. 이거 사온 거였어요???"
"새벽에 꼬르륵 거리더라."
"…아니. 언제 들었대요.."
"먹어."
"…감사합니다."
한입 준다고해도 싫다고 고개를 젓길래 혼자서 배부르게 다 먹었다. 다 먹으니 벌써 도착했어.. 아, 아쉬운데.
안 내리고 아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니, 아저씨가 또 말 없이 나를 바라본다. '뭐' 저렇게 무심한 표정이 이렇게 좋을 일인가.
여태 연애하면서 나 좋아 죽겠다는 표정 안 하면 불편했는데. 아저씨는 이상하게 말을 안 해도 위로가 되는 것 같고, 기분이 좋았다.
아저씨가 이렇게 무뚝뚝해도.. 내가 좋다잖아.
회사 앞에 도착해서 내려야하는데 왜 이렇게 내리기가 싫은지.. 아저씨를 힐끔 보면, 아저씨가 룸미러로 뒤에 차가 오는지 확인하고선 나를 본다.
"저녁 먹어."
"…네?"
"같이 먹자고. 끝나면 데리러올게."
"아저씨 가게는 어쩌구요.."
"오늘 쉬는 날."
"…좋아요!"
"먹고싶은 거 생각해놔."
"…알겠어요."
"가."
"6시에 끝나요."
"응."
"…갈게요!"
회사에 도착해서 웃음이 자꾸 나왔다. 아저씨한테 연락 한 번 오지않지만 불평은 안 했다.
원래 나도 연락 자주하는 거 싫어했던 사람이니까. 둘다 편할 때.. 보내고싶을 때 보내는 게 낫지.
"남자친구?"
"응?"
밥을 먹다말고 실습하는 친구가 내게 물었고, 나는 벙쪄서 친구를 보았다.
"오늘 아침에."
"아, 응.."
"완전 스윗하시네. 팀장님이 막 누구냐고 놀라서 물어보길래. 내가 엄청 자랑했거든. 음식점도 한다고했더니.. 안 믿는 눈치던데? 이상하게 팀장님이 너한테만 그러는 것 같아. 무슨일 있었어?"
"…일은 무슨."
있었다. 팀장님 남자친구분을 우연히 봤었는데. 1년 전에 나 좋아한다고 따라다녔던 사람이었다. 나한테 엄청 잘해줬던 팀장님은 우연히 남자친구와 내가 마주친 그 이후로 나를 알게모르게 괴롭혔다.
유치해. 둘 다 나이 먹을만큼 먹어놓고는.. 쉬는 시간만 되면 모여서 내 얘기를 하기 바쁘지.
친구는 남자친구 얘기 뿐만이 아니라 다른 얘기도 하고싶어하는 것 같았다. 뭔가 싶어서 친구를 한참 바라보면, 친구가 내게 말하길.
"황인엽이랑 대화는 해봤어?"
"……."
"…아, 다시 잘해봤음 좋겠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야. 지금 남자친구분이랑 잘 만나는 것도 알고.. 근데 그냥.. 궁금해서. 난 너네 사귈 때 너네가 진짜.. 부러웠고, 보기 좋았거든.."
"……."
"…미안해. 나도.. 황인엽 입장 들어보니까 안타깝고 그래서.. "
미안해야지. 나는 관심 하나도 없는데.. 잘사귀고있는 사람한테 전남친 얘기를 한다라..그럼.. 너는 황인엽과 조금 더 가까우니까 걱정이 돼서 그런 거겠지.
평소에 둘이 별로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같은 회사인 거 알았으니 서로 도와주겠다면서 친해졌나보지.
난 여전하다. 정확한 것도 아니면서 의심부터 하는 거. 근데 더 문제는.. 의심으로 끝나면 되는 것을 믿어버린다. 나도 잘못인 걸 알지만 안 고쳐진다. 이래서 내가 싫은 거고.
"생각해줘서 고마워. 근데.. 내가.. 알아서할게..!"
"……."
"황인엽 얘기 계속 듣는 것도.. 별로야."
"…아, 응."
"……."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처음으로 친구한테 내가 알아서한다는 얘기를 해봤다. 말하고나서 얼마나 찝찝하고 후회스러운지.
항상 착하다는 소리만 듣던 내가 자신에게 화를 내서 그게 좀 그랬는지 서로 어색해졌다.
일을 하는데도 나한테만 자꾸 꼽을 주는 팀장도 싫었다.
"깔끔하게 좀 처리해줘. 두 번 확인하게 만들지 말고. 부탁해."
깔끔하게 해도 더 깔끔하게 해달라는 건 기본이었는데. 오늘따라 더 서러웠다. 안 그래도 황인엽 때문에 짜증나는데. 어휴..
회사가 끝나자마자 시계를 보았다. 6시 반인데.. 아저씨는 왔으려나.. 왔으면 왔다고 연락 왔겠지? 깜빡하고 안 왔으려나?
회사에서 나왔는데 익숙한 차가 보였다. 그리고 그 차 안에서 아저씨가 나온다.
처음에 아무 표정도 없이 차에서 내렸던 아저씨와는 다르게 지금은 아저씨가 날 보고 웃어준다.
물론 내가 아저씨 보자마자 헉- 하고 입을 틀어막고 있어서 그게 웃겨서 웃은 것 같기는 한데.
"……."
평소처럼 기분이 안 좋아도 아저씨를 보니 기분이 풀렸다.
단순히 남자친구라서가 아니라. 원래 그랬다. 아저씨를 보면 여태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된다. 아무 생각도 없어진다고 해야..되나?
"아저씨는 밥 먹을 때 아무것도 안 해요?"
"뭘."
"핸드폰 본다거나 그런 거..?"
"안 봐. 밥 먹을 땐 밥만."
"헐 너무해."
"뭐 보는데."
"짱구!:
"밥 먹으면서 짱구를 봐?"
"뭔가 혼자 먹으면 심심하잖아요. 친구랑 있을 때도 가끔 보기는 하는데. 완전 재밌어요. 아저씨도 혼자 먹을 때 한 번 봐봐요. 요즘 애들은 다 밥 먹을 때 영상 많이 보던데. 내 친구들도 그렇고.."
"…그래?"
"……."
"틀어서 봐."
"에? 지금요?"
"어."
"에이.. 아저씨 얼굴이 짱구보다 재밌는데요? 짱구 절대 안 틀어야지."
"그거 틀면 이제 그 순간부터 내 얼굴이 재미없어졌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그건 아니고. 그냥 편해졌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오늘."
"……."
"무슨 일 없었어?"
분명 무슨 일 있다고 티를 낸 적이 없는데. 아저씨가 날 한참 바라보다가 하는 말이 저거다.
"티 났어요..?"
"그냥 물어본 거야."
"…에?"
"안 물어보면 말 안 할 것 같아서."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서러운 걸 말하고싶지만 팀장 정도는 참을 수 있고.. 황인엽 문제는 전남자친구 얘기인데 굳이 아저씨한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냥요.."
"……."
"같이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자꾸 신경써주지 않아도 되는 일을 신경써줘요. 오지랖이라고 해야되나. 기분이 나빠서 내가 알아서한다고 하기는 했는데."
"……."
"또 신경쓰여요. 내가 여태동안 착한 척하면서 쌓아온 것들이 무너지면 어쩌지 싶기도하고.. 흐음.."
"……."
"아무튼 그렇다구요."
"네가 생각하기에 그 친구가 못됐다면."
"……."
"너한테 미안하다고 하겠지."
"……."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없다면 친구라고 소개도 하지 마."
너무 짧은 위로인데. 왜 이렇게 힘이 날까. 아저씨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여태 기분 나빠도 안 나쁜척했는데. 기분이 다 풀린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넌 먹고싶은 거 생각해놓으라니까. 고작 국밥이냐."
"…왜요. 국밥 맛있는데."
"……."
"그리고 아저씨가 요리 제일 잘하는데. 아저씨가 해주면 되지. 뭐하러 막 맛집 찾아다녀요."
"…허."
"아저씨 크림 파스타가 진짜 기가막히는데. 키야.... 내일 해주면 안 돼요? 내일 야근이거든요.. 회사 끝나고 후다닥 달려올게요. 아, 내일 아저씨 약속 있으신 건 아니죠?"
아저씨랑은 여태 연애하면서 못했던 것들도 하고싶어졌다.
매일 서로 신경쓰느라 비싼 요리들만 찾아다녔던 것도 이제 지쳤다.
아저씨한테는 솔직해지고 편해지고싶다.
다음 날 직원들 저녁 요리를 해주다가 석구는 뭔가 떠오른 듯 핸드폰을 켰다. 서림이의 이름을 한참이나 보던 석구가 서림이에게 카톡 하나 보낸다.
[배고플텐데 뭐라도 사먹어]
하나는 좀 그런가.. 칼을 잡았다가도 다시 내려놓고 카톡을 하나 더 보낸다.
[편의점에서]
핸드폰을 내려놓고서 다시 칼을 잡은 석구는 서림이에게서 온 답장에 픽- 웃는다.
"……."
[팀장은 왜 살까요?]
[죽빵 때리고싶다 진짜]
- 태어나서 그냥 사나
다 한 요리를 직원들 테이블에 세팅을 해준 석구가 직원 세명에게 물었다.
"너네는 밥 먹으면서 안 보냐."
"네? 어떤 걸요?"
"…짱구."
"에? 짱구요..? 아니요...?"
"……."
저 말을 하고선 홀연히 손님을 받으러 가는 석구에 직원들이 당황한 듯 서로를 마주보았다. 짱구..?
실습하는 친구는 오늘 나한테 별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어제 짜증내서 내가 싫어진 건가.
결국엔 내가 하고싶은 말 했다가 나만 상처 받는 게 싫었다. 아니면 내가 참아야했나. 이런 시팔.. 잘하지도않는 욕을 속으로 하면서 회사에서 나오면 차에서 기다리고있다.
조수석 문을 열고선 '하이이'하고 유난 떨며 인사를 했을까. 아저씨가 놀란 듯 나를 본다. 사실 놀란 것도 아닌 것 같아. 조오금.. 완전 조금 놀란..?
"나온지 몰랐네."
"괜찮아요. 배고파요..우억.."
"이거."
"응? 뭐예요 이거?"
"아까 네 친구가 주고 가더라."
"…친구요?"
"실습 한다던."
"……."
"내일 출근하면 대화해봐."
"……"
내가 그때 밥 먹다가 지나가듯 빵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그걸 기억했는지 빵 한가득 사가지고 아저씨한테 준 것이다.
그래. 내가 싫어서 피한 게 아니라.
"……."
"우냐?"
"…ㅠ."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괜히 또 나 혼자 오해하고 상처받고 그 친구를 나쁜 사람으로 확신한 게 미안해서 고개 숙이고 힝구- 하고 장난스레 우는데
아저씨가 턱을 괸 채로 무심하게 내 볼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쓸데없이 귀엽지."
"근데ㅠㅠ빵만 주고 갔어요...?"
"그럴리가."
"…ㅠㅠ???"
"야무지게 포장해갔어."
"야무지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ㅋㅋㅋㅋㅋㅋㅋ."
"우는 거야.. 웃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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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