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블러썸 (Royal Blossom) 02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성문이었다. 웅장함은 물론이고 위압감에 아름다움까지 그 모습에 입을 벌린 남자가 침을 삼켰다. 검게 변한 맨발바닥에 씻지 못한 얼굴은 거지꼴을 연상 캐 했지만 값비싸 보이는 비단옷을 걸친 남자를 수상하게 여긴 문지기가 출입을 저지시키고 신분을 물었다. 대답을 못 하고 우물거리는 남자를 거칠게 제압했다.
"아! 아파요…."
"그럼 어서 신분을 밝히거라."
흙에 얼굴을 처박힌 일훈이 울상을 지었다. 딱히 이렇다 할 신분도 없고 자신을 산 이름 모를 사내의 말에 따라왔을 뿐이었다. 한참을 말이 없었다. 남자를 일으켜 밧줄을 둘렀다. 연신 아니라는 말만 하는 남자를 무시하고 매듭을 지은 문지기가 욕설했다.
"시끄럽다! 어느 곳인 줄 알고 이리 쉽게 들어가려는 것이냐!"
"놔주게."
높은 톤의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에서 내린 은광이 남자의 앞에 섰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문지기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은광의 뒤로는 다섯이 채 되지 않는 기사가 서 있었다.
"우리 집안 아이야. 저번 여행길에서 잃었는데 용케 찾아왔어."
못 미더운 눈으로 남자를 훑던 문지기가 매듭을 풀었다. 어안이 벙벙한 남자를 끌어안고 쓸었다.
"어찌 길을 잃었던 것이냐. 오래 찾았는데 찾지 못하여 포기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이리 찾아와 얼마나 기쁜지 몰라."
"아…."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남자와 함께 말에 탄 은광이 성문을 지나갔다. 찝찝함에 고개를 갸웃하던 문지기는 이미 통과한 남자와 은광을 보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단단한 돌길에 말굽이 부딪혀 내는 소리가 권위적이었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남자를 긴장하게 하였다. 혹시 나쁜 짓을 할까 몸에 힘을 주어 도망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때마다 은광은 남자의 팔을 쓸며 안심시켰다.
"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보아하니 사정이 있어 보여 딱하게 생각해 너를 데려가고 있는 거란다."
"…괜찮습니다. 진 빚은 꼭 갚을 테니 이만 내려주세요."
"어찌 그러는 거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러니 내려주세요."
말을 멈췄다. 한숨을 쉰 은광이 남자를 말에서 내려주었다. 풍기는 악취에 인상을 쓴 기사들과는 달리 은광의 표정은 평안했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돌아선 남자를 불러세웠다.
"이름은 무엇이냐."
"태어나서부터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럼 내가 지어주어도 되겠느냐?"
"…."
"보살핌을 거절한 대가다. …둥글고 참한 눈동자가 눈에 띄는구나, 일훈. 일훈은 어찌 생각하느냐."
"너무나 좋은 이름이라 감사함에 얼굴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옅게 고인 눈물을 훔쳤다. 일훈의 머리를 쓰다듬은 은광이 끌어안았다.
"너를 닮은 동생이 있었어. 그래서 너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야. 오래 같이 있었으면 좋겠건만."
"죄송합니다."
"그래. 너무도 짧은 인연이었지만 언젠간 또 볼 거라 믿는다."
애정이 어린 손길에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일훈이 불편한 것을 느끼곤 떨어졌다. 한참을 바라보던 은광이 말에 올라탔다.
"서은광. 내 이름이다. 필요할 때가 있거든 언제는 날 찾아와."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 애써 슬픔을 숨기려는 은광을 아는 일훈도 자리를 빨리 떠났다. 그 길로 성 안에 구석으로 향했다. 최대한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은신처를 찾았다. 허름하지만 짧게 머물기에 나쁘지 않았다. 허름한 모양새에 주인장의 거절을 몇 번 받긴 했지만 내민 돈의 양에 곧 방을 얻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근질거리는 몸을 씻었다. 옷을 사는 것도 까먹어 현식에게 받은 비단옷을 다시 입었다.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노곤함과 오랜만에 맞는 편안함에 정신이 몽롱했다. 얼굴을 때려 정신을 바르게 했다. 힘이 빠진 몸을 침대에 기대자 그제야 무언가 크게 다가왔다. 갑작스레 변화된 삶에 혼란스러웠다. 시간이 지나 자신을 산 남자가 데리러 올지도 미지수였고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미지수였다. 하품을 크게 한 일훈이 눈을 감았다. 쌓인 피로가 몰려왔다. 부는 바람에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순간은 자고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한 일훈이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요 며칠 새 많이 시끄러웠습니다. 문 옆을 지나가기만 했을 뿐인데 다 들리더군요."
정원에서 햇살을 즐기던 창섭의 옆으로 현식이 발을 맞추어 섰다. 낮부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현식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발 옆에 꽃 한 송이를 꺾은 현식이 창섭을 따라 걸었다.
"꽤 힘든 상황일 텐데 본능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왕태자도 태자비 당신도."
"병든 벌이 시끄럽게 우는군요."
"암수컷 벌도 시기가 아님에도 짝짓기를 하고요."
"…입 다물어."
빵 터진 현식이 얼굴을 구기며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세게 쥔 주먹을 숨긴 창섭이 입술을 물었다. 예민한 상태인 창섭의 신경이 날카롭게 솟았다. 화를 참지 못해 붉어진 귓가를 발견하고 딴죽을 거는 현식의 뺨을 때렸다. 돌아간 고개를 보고 식겁한 현식의 기사가 달려왔다.
"동근, 잠깐 다른 곳에 가 있어."
동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금방 굳혔다. 겁 없이 창섭을 노려보다가 먼 곳으로 향했다. 고갤 돌려 굳은 표정으로 창섭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창섭이 현식을 밀었다. 분에 찬 손이 창섭의 어깨를 게걸스럽게 잡았다.
"앙칼진 년. 그게 매력이라지만 적당히 해야 예쁘지. 응?"
"언행을 바로 하시오!"
"이봐. 네 서방과 넌 나 덕분에 그 호칭을 달고 비단옷 입고 궁전에서 자고 먹고 하는 거야. 내 비위를 맞추며 살살 기어도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라고!"
"닥쳐."
"…내가 골라준 옷 잘 입었네? 당신 하얀 피부와 잘 어울릴 것 같아 옷장에 넣어놨어. 하얀 것에 붉은 것. 어때 굉장히 야하고 좋지 않아?"
창섭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현식의 긴 손톱이 창섭의 목을 스쳤다. 길게 난 생채기로 피가 맺혔다. 아. 따끔거림에 미간을 모았다. 현식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현식이 두려웠던 창섭은 잔뜩 긴장한 채로 그의 팔을 떼어냈다. 쉽게 떨어진 팔은 현식의 얼굴로 향했다. 가린 손을 밑으로 쓸어내렸다. 창섭의 귓가로 다가온 현식의 혀가 질척한 소리를 냈다.
"네 서방 따라 죽을 날만 기다릴거야? 살아야지."
"난 당신과 같지 않아."
현식의 손에 들려있던 꽃을 창섭 손에 쥐여 주었다. 망설임 없이 힘을 풀어 바닥에 떨궜다. 바람에 굴러다니는 꽃송이가 애처러웠다. 돌아서 자리를 떠나는 창섭에 뒷모습에 소리 쳤다.
"착각하나 봅니다. 난 태자비에게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 몸이나 잘 지킬 생각 하세요."
정원을 나오자 동근이 다급하게 현식에게 붙었다. 몸을 살피자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흔들었다. 현식의 표정이 좋지 않자 눈치를 살폈다. 조심스레 괜찮냐고 물으면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말을 반복했다.
"무슨 생각이신데 그리 고민하십니까."
창섭은 현식과 마주치면 피하기 바빴다. 말을 섞는 일도 무언갈 같이 한 적도 거의 없었다. 왕이 죽으면서 현식은 창섭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무슨 심보인지는 현식도 잘 모르지만 창섭을 싫어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조금 더 깊게 생각하면 귀찮은 존재이기도 했다. 큰 회의에 참여하게 되면 자신의 의견에는 토를 달기 일쑤였고 저보다 좋은 방안을 두어 현식의 자존심을 꺾기도 했다.
"귀찮은 고양이를 없애 버릴 수 있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뭘까."
"감히 왕자님의 생각을 말할 순 없지만 태자비에게 어떠한 감정이라도…."
"지금은 단지 오메가 덩어리일 뿐이야."
동근이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미묘한 현식의 표정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일을 계획하는지. 정확히 추측할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방에 도착해서도 현식은 도저히 앉질 못했다.
"왕자님 그 아이는 어떡할까요."
"누구."
"드워프에서 산 오메가 말입니다."
"데려와야지."
"여관에서 자는 걸 깨지 않길래 그대로 데려오긴 했습니다만."
"그럼 됐어. 필요할 때 부르지."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넓은 초원에 일훈이 누워있었다. 부는 바람이 따뜻했다. 어디선가 들리는 노랫소리를 따라 흥얼거렸다. 며칠 잠을 자며 실로 오랜만에 꿈을 꾸고 있었다. 어떠한 큰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뭐야. 상체를 일으키자 어지러움과 두통이 느껴졌다. 쓰림에 배를 움켜잡았다. 얼마나 지났지. 반쯤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붉은 카펫이 잘 깔린 방엔 일훈이 누워 있는 침대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이 누웠던 장소가 원래 이렇게 생겼나 헷갈린 일훈이 정신을 차리려 뺨을 때렸다.
"뭐야."
유일하게 뚫려 있는 창으로 밖을 살폈다. 끝으로 하얀색의 건물들이 보였다. 낮이라 그런지 비치는 모습이 신비했다. 매일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있던 일훈에겐 새로 태어난 듯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조금 더 보려 몸을 앞으로 뺐다. 앞 뒤로 흔들리는 몸에 재밌는 듯 웃었다. 갑작스레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크게 휘청거리다가 몸을 뒤로 넘어뜨렸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와 이곳이 어딘지 파악하려 애썼다. 본 적은 없지만 분명 고급스러운 물건들뿐이었다. 제 몸을 살피니 바뀐 옷도 지금에서야 인지했다. 바로 앞에 닫힌 문이 보였다. 얼른 다가가 살짝 열었다. 조그만 틈새로 길게 뻗은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온통 하얀 벽에 옥색의 천장이 보였다. 간혹 진짜 금인지 모를 것들도 보였다. 인기척은 없었다. 혹여 자신을 팔아먹은 노인에게 다시 잡혀 온 건가 싶어 불안에 떨었다. 방을 나오자 한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살기가 느껴졌다. 좋은 장소는 아닌 듯싶어 발을 빠르게 움직여 어디 있는지 모를 탈출구를 찾았다.
"안녕?"
뜨끈한 숨이 턱 언저리에 닿았다. 놀라 소리 지르려는 일훈의 입을 막았다.
"옷차림을 봐선 그리폰의 사람은 아니고…펜리르?"
보랏빛이 도는 검은 튜닉 차림의 민혁이 일훈에게서 손을 떼며 물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일훈에 민혁이 바람 빠진 웃음을 뱉었다.
"그럼 네 옷에 늑대 문양은 뭐라고 설명하려고."
"아니…제가 입은 옷이 아니라서…."
횡설수설한 일훈이 귀여운지 선하게 접힌 눈꼬리가 펴질 줄 몰랐다. 민혁도 모르게 잡은 일훈의 볼이 늘어났다.
"꼬마, 똑바로 대답해 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숨결이 닿고 민혁의 얼굴을 본 뒤부터 몸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울리는 민혁의 목소리가 꿈에서 들었던 노랫소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가까이 눈을 맞춰오는 행동에 빨개진 얼굴을 하고 몸을 뒤로 뺐다.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응?"
"멋있어요…."
"뭐? 나 말하는 거야?"
고갤 돌려 소리 내어 웃었다. 살짝 나온 광대가 도드라졌다. 멀리서 구두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눈치를 살피던 민혁이 제가 끼고 있던 반지를 빼 일훈에 손에 쥐여주었다.
"귀여운 꼬마한테 주는 선물. 함부로 돌아다니면 위험하니깐 얼른 엄마 찾아가."
"민혁?"
얼른 가. 가만히 서 있는 일훈의 등을 밀었다. 얼떨결에 밀려난 일훈이 걸음을 재촉했다. 작게 흔들어 주는 손에 같이 흔들어 주었다. 일훈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민혁을 부른 창섭이 모습을 보였다.
"또 정원에 다녀오셨습니까."
"갈 곳이 그곳뿐이니깐요."
"표정이 안 좋으신 걸 보니 무슨 일 있으셨던 것 같네요."
"현식…그 사람 일이 있기 전엔 모른 체 살았는데 왜 자꾸 건드리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것이든 좋은 뜻은 아닐 겁니다. 태자비께서 원하신다면 이곳에 계속 머무르도록 하겠습니다."
"고르곤을 지키셔야죠. 자리를 비우신 지 오래라고 들었습니다. 제 아버지도 계시니 걱정 마세요."
"태자비를 지키는 게 고르곤을 지키는 겁니다. 대공으로서도 왕태자를 자리에 올려드리고 돌아가는 게 고르곤 사람들에 대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재밌는 걸 하나 발견했습니다. 잘만하면 일을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옷자락을 쥐었다. 일훈이 향한 곳으로 눈길을 돌린 민혁을 따라 창섭의 시선도 움직였다. 힘없이 매달려있는 창섭의 손을 잡아 올렸다. 짧게 입을 맞춘 민혁의 코끝이 창섭의 손끝에 머물렀다.
"태자비의 향은 매혹적입니다. 탐이 날 정도로. 누군가를 밟고서라도 지켜드릴 테니 부디 향을 잃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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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헤븐도 같이 올리려 했건만...무슨 일인지 통째로 날아가 버렸네요...최대한 빨리 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계신 분들껜 정말 죄송합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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