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만 집중해."
정국선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 전체가 후끈후끈해지고, 어딘가에서 폭죽이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 앞에 보이는 정국선배의 아메리카노를 들고 빨대로 한 입, 아니 엄청 많이 빨아마셨다. 이제 좀 속이 뚫리는 것 같애. 근데, 켁켁. 잘 들어가다가 목구멍에서 턱 하고 막혔다. 코가 따끔따끔 거렸다. 허리를 숙여서 기침을 하는데 정국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쪽으로 와서 내 등을 두드려주셨다.
"괜찮아? 왜 그래 갑자기."
"예? 아..괜..괜찮아요..토론 합시다. 예, 합시다."
"여기 휴지. 입 닦아."
"감사합니다..켁...예.."
정국선배가 건네준 휴지로 입가를 닦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정국선배를 쳐다봤다. 정국선배는 얼른 시작하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큼큼, 목을 가다듬고 내가 준비한 자료의 첫장을 넘겼다. 에...
"일단 처음 선배가 말씀해주신 주제를 들었을 때, 좀 당황하긴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엄청 좋겠더라구요."
"..."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 질병이 일어난 것인지, 뭐 선천성이라면 출산 전에 해결해서 아기한테 더 나은 삶을 줄 수있는지,"
"..."
"후천성이라면 유전자 가위로 효과를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게되어서 긍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 진짜 떨리네. 바로 15cm 앞에서 정국선배와 얼굴을 마주보고 내 생각을 말할려니까 진짜 떨렸다. 게다가 아까 선배가 자신한테만 집중하라는 말을 듣고나서 그런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도 정리를 잘 해서... 잠만. 저 사람 왜 저래. 선배는 내 말을 정자세로 듣다가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리더니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예..어, 근데 조사를 해보니까 꼭 좋은것만 있지는 않았어요."
"...말해봐."
"만약에 유전자 지도라는 하나의 매개체에 개인의 모든 개인정보가 압축된다면, 그것이 유출됨으로써 받는 피해는 엄청날 것 같아요."
"..."
"그리고 또 만약에 과학자들이 과장된 성과발표를 한다면, 의약품이 개발될수록 변종된 바이러스가 진화하고 있고 유전자 지도가 '만병 통치약' 역할을 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자리 잡을 수 있어요."
그래서, 너는 찬성이야 반대야? 정국선배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나한테 물어오셨다. 저는 찬성이요.
"그래, 한번 설득해봐."
근데 난 왜 저 말이 '그래, 한번 꼬셔봐.' 이걸로 들렸지? 아 나 진짜 병인가봐, 저 사람이 진짜 싫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막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정신 차려야지, 정신. 나한테는 오직 윤기선배야.
"일단 가정경제, 미래 불안, 소비 심리 위축이라는 문제점에 대해 사회, 경제적 안정망을 만들 수 있어요."
"..."
"자료를 찾아보니까 보건복지부와 FDA가 DTC를 허용하고 있다는 걸 보면, 안전적 문제에서 검증이 되었다는 뜻이므로 비영리기관이 사용함으로써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는 위험도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FDA(Food and Drug Administration): 미국 식품의약국
*DTC(direct-to-customer): 의료기관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환자)가 직접할 수 있는 검사.
선배는 내 말을 들으시고는 잠시 생각을 하시더니 이내 입을 떼셨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정국선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고, 선배는 내 앞에 놓인 아이스초코를 마시더니 인상을 찌푸리셨다. 이렇게 단걸 어떻게 먹어. 저는 잘만 먹는데요? 선배는 아메리카노로 입을 헹구시고는 말을 하기 시작하셨다.
"내 생각은 이래. 유전자 지도가 능력을 판별하는 데 까지 쓰이게 된다면 한 사람의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
"또 질병예측도 특정 질병 이외에는 잘 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 불안감만 조성하고,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어."
"..."
"더불어서 유전자 조작의 기준이 불분명하지."
"..."
"예를 들어서 청각장애 부부가 그들의 자식 또한 청각장애를 갖길 원해서 그쪽으로 조작해달라고 요청을 할 수도 있어."
"..."
"보통은 청각장애, 즉 장애를 갖고 있지 않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특이사례 또한 배제할 수 없다는 거지."
오... 정국선배의 말을 계속 듣고있으니 저절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뭔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나는 정국선배와 반대입장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반대쪽이 되어 버린듯했다. 아무 말 않고 계속 멍-하게 정면만 응시하자 정국선배는 내 눈앞에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보였다. 정신차려.
"내가 아무리 말을 잘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멍때린 거는 처음본다."
"아...하하..."
"잘했어, 처음인데. 잘 못했다고 그러더만 기대 이상인데?"
"감사합니다..."
정국선배는 손을 들어 내 머리에 턱 얹으시더니 꾹꾹 눌렀다. 아, 누르지 마요. 머리 눌려요. 이 선배는 여자를 한 번도 안다뤄본 것 같았다. 머리를 쓰담을려면 아래로 살살 쓸어야지 꾹꾹 누르는 사람이 어디있어. 눈을 치켜뜨고 정국선배를 쳐다보자 살짝 움찔하는 선배였다. 선배, 쓰담는거는 이렇게 하는거에요. 내 손을 선배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살살 쓸어내렸다.
"이렇게. 얘가 내 강아지구나, 아유 이뻐라. 이렇게 하는거에요."
"..."
"왜요. 뭐 문제있어요?"
"아니, 아니야. 들어가자. 우리 회진돌아야되."
"아 맞다. 갑시다!"
얼핏 본 선배의 귀끝은 봉숭아 물 들인 듯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으신 것 같았다. 수고하세요-. 쟁반을 카운터에 가져다주고, 마시던 아이스초코를 한 손에 들고 먼저 앞서가고 있는 정국선배에게 뛰어갔다. 왜 먼저 가요. 선배는 내 말을 들었는지 뒤을 돌아보셨다. 너가 너무 느려서, 이 나무늘보야.
"에이, 원래 상대방이 느리면 느리게 맞춰주는거고, 빠르면 빠르게 맞춰주는거에요. 뭘 모르시네."
"...됐지?"
"네. 딱 좋네요."
정국선배는 발걸음을 나에게 맞춰 늦추셨다. 내가 오른발이 나가면 동시에 선배도 오른발이 나가고, 이어서 왼발이 나가면 동시에 왼발이 나갔다. 딱딱 맞아떨어짐에 기분이 좋아서 히히 거리면서 고개를 들어 선배를 올려보자 선배도 나를 내려보았다. 그 자리에 서서 선배의 눈만 쳐다보기를 한참, 정국선배의 입이 떨어졌다.
"너 목 안아파?"
"아파요."
"그럼 다시 가자."
"좋은 생각이시네요."
***
"태형이 어디갔어, 우리 교수님회진 돌아야되는데."
"어... 아까 나가던데. 윤기선배, 아직 안돌아왔어요?"
선배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선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첫날부터 이게 뭐야, 정국선배는 머리를 헝클이며 책상 위에 앉으셨다. 선배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시다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셨다. 엥? 나를 쳐다봤다고?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나보고 뭐 하라는건가? 선배는 자기한테 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싫은티를 엄청 내면서 정국선배한테 갔다.
"너,"
"..."
"김태형 찾아오면,"
"..."
"너 해달라는 거 하나 해줄게."
"...진짜?"
"어. 진짜."
나는 얼른 화이트가운을 벗어서 의자에 걸쳐놓고 선배 앞에 다시 가서 섰다. 선배, 다녀오겠습니다. 허리를 90도로 숙여서 인사를 하고 일어나자 선배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나 저 사람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거 처음봤어. 진짜 세상 다 가진 사람처럼 웃었다. 웃는 거 이쁘네.
"10분이야."
"예! 갔다오겠습니다."
찾아오겠다고 말을 하긴했는데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할 지 막막했다. 아까 담배갑 들고 나간거 보면 옥상에 있을 것 같은데, 3시간 동안 옥상에만 있는 것도 이상했다. 혹시라도 있을까봐 옥상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는데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윤기선배였다. 선배는 숨을 헐떡이며 한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잠깐만, 같이가.
"같이가. 나랑 같이 찾자."
"아니에요, 저 혼자 찾을 수 있어요."
"아니야, 같이해."
"괜찮아요. 찾아서 김태형이 선배 얼굴 보면 더 심각해질 수도 있어서,"
"아...그럼 너가 잘 달래서 데리고 올래?"
"네, 그럴께요. 걱정 붙들어매십시오!"
괜히 선배랑 같이갔다가 김태형의 조금 풀린 기분을 더 망가뜨릴수도 있겠다싶어서 그냥 나 혼자 가겠다고 했다. 8층입니다. 선배가 가자마자 엘리베이터는 우리층에 섰고, 타서 13층을 눌렀다. 병원에 출근한지 이제 첫날인데 참 여러가지 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투명이라서 그런지 밑을 내려다보면 휠체어를 탄 환자들, 우는 사람들, 화이트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분들이 다 들어왔다. 하, 근데 김태형 옥상에 없으면 어떡하지? 13층, 하늘정원입니다. 내가 탄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옥상에 도착했고, 굳게 닫힌 철문을 힘껏 밀자 보이는 낯익은 뒤통수에 한숨이 나왔다.
"태형씨."
"..."
"가요. 우리 회진돌아야되요."
김태형과 멀리 떨어져서 말을 건넸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한 건 절대 못참는 성격이라서 빠른 걸음으로 가서 태형의 앞에 섰다. 담배를 얼마나 많이 피웠는지 옆에 서있는 재떨이에는 담뱃재가 수북했다.
"미용실 갔다왔어요? 머리색 바꾸니까 훨씬 잘생겼네."
"몇살이에요?"
"26이에요. 그쪽은요?"
"나도 26. 동갑이니까 말 놔요. 불편해."
"아, 응. 근데 윤기선배랑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될까?"
김태형은 그 사이에 미용실을 다녀왔는지 검은물을 들여왔고, 빨간머리일 때 보다 훨씬 더 잘생겨보여서 깜짝놀랐다. 내가 미용실을 다녀왔냐고 물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자기가 나한테 몇살이냐고 물어왔다. 뜬금없긴하지만, 뭐 엄청 오랫동안 볼 사이인데해서 나이를 말해줬다. 동갑이었다. 김태형은 나보고 말을 놓으라고 했고, 나는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말을 놓았다. 말을 놓으니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에 실례지만 한번 물어볼까, 해서 물어봤다. 근데 김태형은 아무말도 않고 고개를 숙여 애꿎은 신발코만 바닥에 쿡쿡 찍었다.
"미안. 일단 우리 들어가자. 너 여기 너무 오랫동안 있었어."
"..."
"야, 잠만."
일어나자고 김태형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태형은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맞잡았다. 일어나. 있는 힘껏 힘을 주어 태형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애가 힘이 얼마나 센지 그냥 버티고 앉아있었다. 하는수 없지. 나는 태형과 잡은 손을 풀고 태형의 옆에 앉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눈길에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많은 감정이 포함되어있는 눈동자였다. 태형은 이내 고개를 돌려 눈길을 피했고, 무릎위에 올려놓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올렸다.
"하... 이제 좀 살 것 같아."
"..."
"원래 좀 그래. 뭐를 좀 잡아야지 마음이 안정되는 성격이라서. 종종 잡을 수도 있어."
그러면서 피식-웃는 태형이에 나도 마음이 좀 안정되었다. 그럼 이제 말해줄 수 있어? 선배랑 왜 싸웠는지? 태형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한숨을 푹 내쉬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한거야. 너도 오늘 정국선배랑 토론했지?"
"응."
"나도 했거든, 윤기선배랑. 생각해보니까 진짜 별거 아닌거였네."
"..."
"윤기선배가 준비 다했냐고, 하러 가자고 하셔서 나는 바로 따라나갔어. 준비 덜했는데도."
"..."
"대충대충 넘기면 될 줄 알았어. 근데 선배가 생각보다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거야. 내 생각에는 이게 아닌거 같은데,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 뭐 그렇게."
"...그래서."
"좀 화가 나는거야. 분명히 내가 잘못했는데, 내가 준비를 덜해간거잖아. 근데 선배한테 너무 화가 나서."
"..."
"선배가 말하고 있는데 그냥 일어나서 갔어. 선배가 내 손목을 잡고 세웠는데 쳐냈어."
"..윤기선배가 화낼만도 하네."
"그렇지? 말하니까 내가 진짜 죄인이야. 내가 진짜 잘못했어."
사과해. 내 말을 들은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사과하라고, 쉽잖아. 태형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는 몰라. 뭐를 모른다는 거지? 나는 분명히 알맞은 해결책을 준 것 같은데 태형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쪽팔려. 내가 잘못했는데, 나 혼자 화나서 박차고 나와서 3시간 동안 땡땡이치고. 그리고 선배한테 가서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하는거."
"근데 당연한거야, 사과는 해야지."
"그렇긴 한데..."
"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 내가 너 옆에 있어줄게."
진짜? 태형의 물음에 나는 세차게 끄덕였다. 약속. 나는 태형에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고이 접어 새끼손가락만 남겨놓고 태형에게 가져갔다. 걸어, 얼른. 태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태형도 내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고, 작게 약속, 이라고 말했다.
"가자, 10분 넘었어."
"10분?"
"아. 정국선배가 너 10분내로 데리고 오면 내가 해달라는 거 하나 해준다고 그랬거든."
태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너 얼굴 보면 친히 데리러 오고 뭐 그럴 사람처럼 안보이거든. 야!! 주먹을 쥐고 태형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자세를 취하자 태형은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누나, 무서워요. 장난끼 많은 태형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떨어져서 걷고 있는데 태형은 나한테 자기 손을 내밀었다.
"손,"
"...응?"
"잡아줘."
나는 작게 끄덕이고 내민 태형의 손을 맞잡았다. 동시에 태형이 숨을 작게 내뱉었다. 마음의 안정. 그리고는 가슴팍을 다른 손으로 쓸어내렸다. 야, 너 그러니까 도 닦는 사람 같아. 내 말에 태형은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키에 맞춰 허리를 숙여서 내 눈을 마주했다.
"고마워, 내 얘기 들어줘서."
"김태형."
"응?"
"나 이제 니 엄마 할래."
"엄마?ㅋㅋㅋ갑자기 왜."
"그냥. 네 얘기 들어주는 엄마 해주고싶어."
"싫어."
"엥? 왜?"
"너가 내 엄마 되면 너랑 못 사귀잖아."
뭐야 이건 또. 있는대로 얼굴을 찡그리고 태형을 쳐다보자 태형은 장난이라며 내 볼을 쭉 늘렸다. 너 내 엄마해라. 나 힘들 때 내 얘기 들어줘. 그 말을 하면서 태형은 내 손을 더 꽉 잡아왔다.
암호닉 내이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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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국이도 수줍음을 탄다.
2. 태형이는 흡연자.
3. 태형이도 여주에게 관심이 있는게 분명하다!
잠만 생각해보니깤ㅋㅋ 이게 몇각관계얔ㅋㅋㅋ
원래는 윤기 여주 정국 이렇게 삼각으로 갈려고 그랬는데..흠... 누구 한명을 쳐내야겠어요.
암호닉은 암호닉신청방에서 해주시면 되겠습니당
그럼 다음화에서 만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