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사람이란건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산대도 결핍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결핍을 지니고 산다. 결핍은 여러가지의 경우가 있고, 우리는 이때껏 살아오며 결핍 그 자체 혹은 결핍을 지닌 사람을 수시로 봐왔다. 그 갯수가 단 한가지이든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여러가지이든. 자각하고 늘 그것을 의식하고 사는 경우도 있으며,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망각한 채로 살아가기도 한다.
스스로 결핍을 여러 곳에서 느낄 때 그것은 열등감이 되고, 덩어리가 되어 육체를 잠식시키며 파멸의 그대를 끌어들이는 경우도 있다. 필자 역시, 몇이나 될 지 모를 이 글의 독자들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전혀 낯설지 않은 것으로 우리의 주변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고찰
written by 리암
수능을 치른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날씨가 본격적으로 추워지고부터 더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듬해 2월 쯤이나 되어서야 열리는 졸업식에 한 번 얼굴을 비추고 말 것이고, 4층의 3학년 교실들은 텅텅 비어있었다.
3층의 2학년 교실도 비어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떻게 짜맞춘 학사 일정인지는 모르겠으나 11월의 끝자락, 수학여행이라는 명목으로 북경행 비행기는 찬 기단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입이 걸고, 생각이 크고, 수염이 거뭇거뭇 나기 시작한 덩치가 커다란 남학생들이어도 그 나잇대의 값을 하느라 지금쯤 막 도착했을 북경의 공항에서 들뜬 기분을 표정에서 감추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준면은 1반 교실의 불을 켰다. 낡은 조명이 여러번 깜빡거리다가 교실 전체를 어둑하게 밝혔다. 수명이 다해가는지 빛은 선명하지 못하고 이따금 흔들렸다. 태어난 날로 따지자면 준면 역시 수능을 치르고 이맘때쯤이면 집에서 해방감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게 맞았다.
그러나 그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1년 정도 휴학을 했다. 그리고 한살 어린 학생들과 똑같은 색깔의 명찰을 교복에 달고 학교로 돌아온 준면은 오른쪽 다리를 절었다. 눈여겨보면 그제서야 보일 정도로 미세하게. 하지만 준면에게 그정도로 주의를 갖는 사람은 아직까지 있지 않았고, 아무도 그가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있는듯 없는듯 학교를 다녔다.
시침이 8에 가까워질수록 발을 끄는 소리도 복도 저편에서부터 느릿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닳은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듣기 싫게 났다. 찬열은 뒷문을 우악스럽게 옆으로 밀어내 큰 소음을 만들었다. 찬열쪽을 한 번 돌아보고 다시 시선을 돌린 준면을 보고도 그는 준면을 모르는 체 했다.
"내가 1등이네? 새끼들 존나 게을러 터져가지고."
그는 교탁 주변을 교사라도 된마냥 배회하며 낄낄대다가 교탁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 다리를 탈탈 떨어댔다. 그 다음으로 도착한 건 경수였다. 8시 정각이 되자 경수는 교실로 들어섰다. 낯은 익지만 말은 한마디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 안에 있었다. 경수는 괜히 어물거리다가 앞문 근처의 자리를 잡아 앉았다. 책상에 올려둔 가방에 얼굴을 기대고 평소엔 하지도 않는 핸드폰 게임을 괜히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분침이 2에 가까워지자 교실의 빈 자리가 차츰 채워지기 시작했다. 세훈이 경수의 다음으로 교실로 들어섰고 민석과 백현이, 종대가, 곧바로 루한, 그리고 크리스. 사실 그들은 크리스가 교실에 발을 딛는 순간에 그를 처음 보았다. 애착이 가지 않는 교사들이라도 오가며 제법 얼굴을 익혔는데 그와중에 크리스는 전혀 생소한 인물이었다. 모두 어리둥절하게 그를 쳐다보자 얇은 출석부에 표시를 하던 크리스는 얼굴을 들었다.
"아. 나 처음 보지?"
그는 학생들의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 반응했다.
"너희 문제아라며?"
뭐래, 들으란 듯 크게 비웃는 찬열의 목소리가 그에게 돌아가지 않는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내년 3월부터 행정실에서 일하기로 예정돼있는 사람인데, 부득이한 상황으로 1주일동안 너희를 감시하게 됐다."
역시나 뭐라고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턱을 괸 민석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학여행 안 가는 대신 학교 나와서 수업시간 다 채우고 가야 되는 건 알고 있을텐데, 그냥 시간 떼우는 일은 없을거다. 알았지?"
크리스는 최대한 자상한 어투로 말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반응은 없는 듯 했다. 크리스가 신경쓰지 않고 출석부를 다시 들여다보려고 할 때 교실의 분위기를 살피던 종대가 장난기어린 목소리를 냈다.
"그럼 스도쿠해요!"
아래로 향해있던 크리스의 시선이 종대를 향해 갔다.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 크리스는 출석부의 종대의 이름 옆에 체크를 했다.
"난 별로."
백현이 옆 줄에서 익살스럽게 이죽거렸다. 친구의 시비에 발끈한 종대와 백현이 투닥거리는 소리로 교실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는동안 크리스는 개개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출석체크를 해나갔다. 교실의 구석진 곳에 앉은 세훈까지 표시를 마친 크리스는 교탁을 양 팔로 지지하고 교실을 말 없이 관망했다.
"한 명이 안 왔네."
"누구요?"
백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되물었다. 백현의 차림새는 단정했다. 그의 교복은 다림질이 바르게 되어있었고 그가 신고있는 운동화 역시 더럽혀져 있지 않았다. 말 한마디를 하는 것만 보아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애정 어린 관심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인상을 본 사람은 활발하다거나, 유쾌하다거나, 혹은 그 둘 다를 포함시키며 그를 말했다. 그는 외양과 마찬가지로 내실있고 화목한 집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크리스는 경수와 찬열의 사이에 비어있는 책상에 걸터 앉았다.
"너희 영화 좋아하냐?"
"영화 보여줄 거예요?"
종대가 물었다.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난 영화를 많이 안 봤거든. 본 영화를 손에 꼽아. 근데도 난 영화가 좋더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크리스에 루한은 팔배게를 하고 잠을 잘 자세를 했다. 크리스는 그런 루한의 행동을 보고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너희 좋아하는 영화 있어?"
"저요."
찬열의 목소리였다. 시선이 찬열에게 집중되었고, 크리스는 대답해보라는듯 턱짓을 했다.
"야한 영화."
그는 뭐가 우스운지 킬킬댔다. 덩달아 교실의 뒤쪽에 앉아있던 종대도 백현을 가리키며 큰소리를 냈다. 얘도 야한 영화 졸라 좋아하는데. 그 말에 발끈한 백현과, 종대와 백현 사이에 끼어들어 뭐라 이야기를 하려하는 찬열때문에 교실은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때였다. 교실의 앞문이 열렸다. 종인의 등장으로 조금 전까지 막 들뜨려했던 분위기는 다시 잠잠해졌다. 교실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종인을 향해갔다. 종인은 그런 시선 따위엔 초연한듯 터벅거리며 구석진 빈자리를 찾아가려 했다.
"잠깐."
크리스의 목소리가 종인을 불러세웠다. 종인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크리스는 손짓으로 그가 걸터앉은 자리의 맞은 편을 가리켰다.
"네 지정석 여기야."
종인은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빈 가방을 매고 등교한 그는 납작한 가방을 책상 고리에 걸고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는 창 밖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틀어 옆얼굴을 보여주는 종인에게로 크리스의 또렷한 시선이 잠시동안 가 닿았다. 그러다가 다시 찬찬히 교실을 둘러보았다.
"영화 얘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교탁 앞으로 갔다.
"나는 영화 하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 영화처럼 살고 싶었다."
그는 이번에는 말을 하며 얼굴을 하나씩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옴짝이다가 꾹 다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했다.
"내가 사실은 편식이 심하다. 먹는 것도 그렇고 보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영화도 맘에 드는 거 하나만 계속 돌려보지 여러갤 안 봤어."
50분은 금방 지나가고 있었다. 시침은 숫자 10의 근처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초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는 교실의 뒤편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쉬는시간동안 열심히들 생각해놓고 2교시엔 영화 추천 하나씩 하는거다."
크리스는 말을 마치고 바로 교실 밖으로 나섰다. 그가 나서자마자 1교시를 끝마치는 종이 울렸다. 경수는 방금 열렸다 닫힌 앞문을 보았다. 그리고 크리스의 말을 떠올리며 그간 그가 봤던 영화들도 함께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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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사진 출처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