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신랑 [The Little G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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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애, 전정국이라고. 기억 안나?"
"기억하고 말고를 떠나서 내가 무슨 부잣집 딸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남자가 재벌 2세인 것도 아니고 약혼은 무슨 약혼이야."
"그냥 일단 한 번 해봐. 말이 약혼이지 호적에 이름 올리는 것도 아니야. 요즘 젊은 애들 동거 많이 하잖아. 그냥 그런거라고 생각하고, 응?"
"그러니까 그걸 내가 왜 하냐고. 당장 시집가도 이상할게 없는 나이에."
"엄마가 너네 어릴적에 꺼내놓은 말이 있어서 그래. 만나보기라도 해주라."
"... 몇살인데?"
"올해 스물"
"안해."
"인아야."
"안한다고 했어."
"그러지말고..."
"안한다고! 나 이제 스물 일곱이야. 갓 고딩 졸업한 어린애 데리고 하긴 뭘 해. 엄마 미쳤어?"
나이를 듣는 순간 얼굴이나 볼까 하는 마음 조차도 싹 사라진다. 내 나이 올해 스물 일곱, 무려 일곱살이나 어린 애새끼를 데리고 살란게 대체 말인지 방군지 알 수가 없다. 대체 우리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이 얘기를 꺼낸걸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펄쩍 뛸 노릇이다. 계속해서 쏘아대는 엄마의 목소리가 짜증스럽게 들려 가방을 챙겨 회사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오늘따라 날씨는 더 화창하고 하늘도 맑았다. 왠일인지 버스도 휑한게 무슨 일이라도 날 듯 싶다. 난 왜 꼭 자잘한 운들이 많은 날에는 틀림없이 나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지.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린적이 없는지.
"아니, 아침부터 약혼약혼 하는데 짜증이 확 올라오는 거 있지?"
"그래도 한 번 만나나 보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니가 아쉬울게 뭐 있냐? 그 남자가 아까운거지. 그 청춘에."
"그러니까. 그래서 싫다고. 그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나같은 여자한테 발목을 잡혀. 난 그런 짓 죽어도 못해. 얼마에요?"
"9100원 입니다."
지갑으로 뻗어진 손 대신 눈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점원 전정국' 살짝 비뚤어진 채 알바생 조끼위에 달린 이름표에는 '전정국이라고 기억 안나?' 어쩐지 낯설지 않은 이름 세 글자가 박혀있다. 흔한 이름도 아닐뿐더러 갓스물된 대학새내기라면 이 시간에 알바를 하고있을 가능성이 다분하지 않는가. 심지어 내려다보는 상판떼기 마저 흘깃 봤던 그 사진 속 남자와 대충 맞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낯선이의 것은 아니다.
"야, 뭐해. 돈 없어?"
"어? 아니아니. 내가 낼게."
계산을 하고 나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내게 예리가 사랑의 딱밤을 선사한다. 알바생마저도 내게 시선이 꽂힌 것이 느껴지자 그제서야 발걸음이 떼어진다. 편의점 앞의 의자에 앉아 라면과 함께 소주 한 병을 까자 예리가 술병을 가져간다. 나 이제 곧 가야봐돼, 그만 마셔. 예리의 목소리가 귀에 웅웅 울린다. 씨익 웃으며, 잘가라 난 마시고 죽을란다 하자 어느새 소주 병은 내 손에 들려져있었다. 나를 혼자 두고 가는게 불안한지 몇 번이나 주춤대는 예리에 대충 손짓을 해주고는 소주 병에 빨대를 꽂아 넣었다.
"그만 좀 드세요."
"네?"
"그만 드시라고요. 벌써 4병쨉니다."
"댁이 무슨 상관이신데요?"
"저희 편의점에서 사고라도 칠까봐서요. 벌써 새벽 2신건 알죠?"
""
"아, 딱 질색인데. 시간 개념 없는 여자."
"이봐요."
"데려다줄게요. 십분만 기다려."
"아니 그러니까 그 쪽이 뭔데 나를 데려다주니 마니,"
"모르는거야, 모르는 척 하는거야? 아까 친구분이랑 내 얘기 하던 거 아니었어요? 나 그렇게 별론가?"
몇 번을 왔다갔다 하다가 마지막으로 한 병만 더 마시려 소주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지만 살짝 날카로운 듯한 물음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피곤한듯 미간을 두어번 누르더니 일할 때 입는 편의점 조끼를 벗어놓고는 나를 흘깃 본다.
"모르는 척 하는 거면 관둬요. 내가 별로여도 어차피 파토내긴 글렀고, 나도 그 쪽 마음에 들어서 이러는 건 아니니까."
파토내긴 글렀다, 그 말에 술 기운이 확 사라지는 듯 했다. 애초에 나는 동의한 적도 없는데 무슨 파토? 별 생각없이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전정국을 보고있는지도 3분이 지났을까 안경을 쓴 여자가 늦어서 미안해, 하며 조끼를 입는다. 원래 싸가지를 잘 챙기는 편이 아닌건지 여자에게 한 마디 말도 받아쳐주지 않고 내게 가요 라는 말만을 남기고 나가는 놈이다.
"왜 데려다주는데. 마음에 드는 거 아니라면서."
"그럼 이제 한 집에서 살 여자가 술 취해서 비틀비틀 거리는데 꼴 보기 싫다고 그냥 지나갑니까?"
"누가 누구랑 한 집에서 사는데? 나 싫다고 했다니까요."
"그 쪽 의견이 임팩트가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내 일인데."
"들어가요. 여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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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의견같은거 전혀 반영안될거니까 괜히 나중에 설치지말고 미리 정리할거 정리해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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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남자친구 뭐 그런거 있으면 그런건 정리 안해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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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둔 애 같은거 있으면 예의상 없는 척은 해주시고."
굳이 일일히 코멘트를 달지 않은 건 말문이 막혀서였다. 뭐? 남자친구? 숨겨둔 애? 생각하는 수준이 딱 어린 애랄까. 기가 차서 답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들어와 맥주 한 캔을 딴다.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채우니 속이 뻥 뚫리는 것이 기분이 좋다.
"내일 짐 옮길거니까 미리 싸놔."
"뭐?"
"뭐긴 뭐야."
"엄마."
"엄마도 어쩔 수 없었어. 그냥 몇 달만 살아줘, 응?"
"세상에 딸한테 외간 남자랑 단 둘이 살아달라고 부탁하는 부모는 엄마 아빠 뿐일거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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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우리 엄마는 내가 마음 약해질 포인트를 너무 잘 안다. 답답한 마음에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가도 금방 다시 일어나 짐을 싸야했다. 짐이랄 것도 얼마 없지만. 다행히도 모태 솔로라 정리할 거라고는 몇 없는 짐 뿐이다. 이제야 생각한건데 아까 그 어린 놈이 했던 말을 곱씹어보니 어쩐지, 그 놈에게 여자친구가 있을 것만 같달까.
이상한 곳에서 끊게 되었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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