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지 말걸 그랬어
또다. 매일 새벽 두 시만 되면 울리는 휴대폰. 잠이 확 깬다.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꾸욱 눌렀다. 이제는 번호를 확인하지 않아도 될 인물. "내가 새벽에 연락하지 말랬지. 잠 좀 자자, 제발 잠 좀." "탄소야, 탄소야아..." 후우... 또 왜. 이번엔 얼마나 마셨는데. 이불을 끌어안으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민윤기는 대답할 생각도 하지 않는 듯, 아니 듣지도 않은 듯 계속해서 탄소의 이름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탼쇼야아... 그러다 발음이 꼬였는지 탄소의 이름마저도 공기가 확확 새게 발음한다. 정말 이 인간을 어쩌면 좋을까. 깊은 빡침이 내려 앉았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젊은 나이에 미간에 주름 잡히면 민윤기한테 청구나 해야지. 어느새 침대 위에서 일어나 체크무늬 셔츠를 꾸역꾸역 입고 있었다. 분명 내가 가지 않으면 안 간다고 생 떼를 부릴게 분명하니까. 정말 저 새끼는 술 마시면 개가 된다니까... "너 어디야." "야아... 내가 생각을 쫌 해봤거든?" "그래, 그래. 생각만 하자." "아니... 너는 쫌..." 궁시렁 궁시렁. 민윤기 특유의 낮은 톤이 귓가를 울렸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으니 꼭 저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으, 이게 무슨 생각이야. 변탠가. 두 손바닥을 쫙 펴 볼을 찰싹찰싹 때렸다. 정신 차리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앞에 보이는 검은색 모자를 주워들었다. 3개월 전, 그러니까 민윤기의 이 술버릇이 생기며 내 침대 맡에 항상 존재했던 물건이었다. 어느새 많은 정을 쌓아둔 나의 모자... 정말 일 주일이 있다면 다섯 번은 쓰고 다닌 것 같다. 민윤기는 술을 왜 그렇게 처먹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민윤기 너 거기 매일 가는 곳이지?" "아니... 오늘은 다른 고시야..." "거기가 어딘데? 위치를 알아야 데리러 가든 말든 하지." "으음... 여기가 어디냐면......" 민윤기가 말끝을 흐렸다. 정말 초행길이긴 한 곳 같았다. 한 번에 장소를 말하지 못할 정도면. 스피커 너머로 남정네들의 목소리와 민윤기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이태원? 이태워니에요? 발음 때문에 미친다 내가... 급하게 심장을 부여 잡았다. 왜 이 상황에서 귀엽고 난리인걸까. "이태워니래." "술집이 어딘데." "그건 나두 잘 몬라."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샜다. 술만 마시면 애가 되니 참... 감당할 겨를이 없다. "너랑 같이 술 마신 사람 누구야?" "호서기..." "옆에 있어?" "아니... 내가 먼저 나와써." 절묘하게 민윤기의 th 발음과 시옷 발음이 섞였다. 작은 실소들이 입술을 비죽비죽 비집고 나왔다. "그래서 주변에 제일 가까이 보이는 건물이 뭐야?" "막... 막... 반짝반짝카고... 아...! 루프탑바..." "루프탑바 앞에서 20분만 기다려. 택시 타고 금방 갈게." "킇... 나 긍데 넘 추운데..." "루프탑바 안에 들어가 있던가." "나 돈 업써..." "들어가라면 들어가. 내가 계산할 테니까." 민윤기 특유의 낮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술만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러면 너무 변태 같은가. 그럼 정정하겠다. 내 앞에서만 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카오택시를 부르며 엘레베이터를 잡아 탔다. 조금만 기다려라, 민윤기... 아무리 여름이라고 했지만 추위를 잘 타는 윤기의 특성상 여름의 새벽은 초가을의 날씨와 엇비슷했다. 윤기는 루프탑바 문 앞에서 쪼그려 앉아 있다가 문을 막지 말라는 알바생의 말에 저 멀리로 쫓겨나 있었다. 추워 죽겠어도 탄소의 돈을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 택시비는 생각도 안 하는 - 윤기의 배려였다. 휴대폰 배터리는 방전된지 오래였다. 홀드 버튼을 눌러도 반응 없는 핸드폰에 화가 뻗친 윤기는 무식하게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길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할 거 드럽게 없다... 씨.... 씨... 씨이... 끝맺는 말에 발이라눈 발음은 자꾸만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탄소가 욕 쓰는 사람은 싫다고 했으니까 욕쟁이 윤기에겐 무의식 중에 생긴 버릇이었다. 욕의 뒷말을 삼키는 것. 킁.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주륵주륵 흐르는 콧물을 소매로 닦진 못하고 계속해서 코를 쥐어짜며 삼키고 있었다. 나 이제 코 찔찔이네...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진 윤기는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와, 민윤기 사랑한다고 사람이 바뀌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근 2년까지만 해도 사랑은 부질없는 거라고 읊고 다니던 불통 민윤기 선생은 어딜 갔는지 24년 평생 끊지 못했던 욕을 단숨에 끊어버린 로맨틱 민윤기만 남아 있었다. 윤기의 눈 앞으로 대략 일곱 대의 택시가 지나쳤을 때쯤 여덟 번째 택시가 들어왔고 그 택시 안에선 폴짝 하고 탄소가 뛰어내렸다. 으, 순간 윤기에겐 심장에 무리가 왔다. 어쩜 저런 모습까지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윤기는 입술을 달싹이다 루프탑바의 문를 쥔 탄소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나 여깄어! 김탄소!" "... 어?" 뒤를 돌아 마주친 탄소는 오늘도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검은색 모자와 어울리는 차분하고 단정한 검정색 긴 생머리. 꼭 탄소의 성격을 대신해서 말해 주고 있는 듯 싶었다. 갓길을 건너 온 탄소는 쭈그리고 앉아 있는 윤기의 앞에 똑같이 따라 앉았다. "너 오늘만 이게 몇 번째야. 곤히 잘 자는 사람 깨워서 불러내는 게." "어... 세 번째?" "허이구, 오늘은 뭐 했길래 이태원까지 왔어. 클럽 갔다 왔냐?" "아니...! 미쳤냐? 나 클럽 안 좋아해." "하긴..." 사실 클럽 갔다 온 거 맞는데... 탄소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니 아까보다 발음은 괜찮아진 듯 싶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깨지 않은 술은 여전히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상하게도 오늘 새벽엔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냥 사나이의 직감이라는 게 그렇다고 말했다. 윤기의 눈동자와 진하게 맞물리는 탄소의 부운 눈이 둘의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술이 들어가니까 꼭...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제 자신을 제어할 통찰력이 떨어지니까. 윤기는 자기도 모르게 뻗은 손으로 탄소의 뒷목을 둘렀다. 부운 눈이 커지며 평소의 제 크기로 떠졌다. 윤기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짓고는 팔에 힘을 주며 눈을 감았다. 여주와 윤기의 입술이 맞물렸다. 여주의 입술에서는 왠지 단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윤기의 입술이 여주의 입술을 탐하다 말고 횡급하게 떨어졌다. 윤기는 포커페이스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일어난 동공지진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 미안해. 아..." "... 내 첫키스..." "아니 그니까 그게, 아니, 아..." "... 민윤기..." "그러니까 그게 아, 미친, 아 좋아해." "... 뭐?" "아 미친, 이걸 왜 말했, 좋아해 그니까 좋아해." "... ..." "이게 아닌데, 좋아한다니까, 아니 좋아해." 윤기는 술기운에 미안하다는 말 대신 좋아한다는 말로 횡설수설했다. 취중진담이라는 게 이런걸까. 윤기는 잔뜩 당황한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탄소는 그런 윤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윤기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나도 좋아해." "... 어?" "나도 좋아해, 윤기야. 정말정말." 오늘 술 마시지 말걸 그랬어. 이렇게 경우 없이 고백할 줄 알았으면... 정말 술 마시지 말걸 그랬어. 멋지게 고백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