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검사님.”
“…민검사님.”
“개포동 살인사건 보고서, 잘 읽었습니다.”
“네에, 고맙네요.”
“피의자 심문을 참…, 야만스럽게 하시더라구요.”
…이 씨발 새끼가.
잇새로 욕을 씹어삼킨 탄소는 오늘도 참을 인 세 번을 가슴에 새기며 살인충동을 억누릅니다.
방긋 미소를 지어보려 하지만 나오는 건 썩소 뿐이고, 비아냥대는 민검사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인내심의 한계를 불러올 뿐이죠.
“오, 그래요? 그렇게 제 심문이 좆같으시면 니가-, 아니, 검사님이 한번 해보심이 어떨까요.”
“허어, 방금 상사한테 ‘니가’라고 하셨습니까?”
“…호호, 그럴리가요.”
자존심은 짧지만 인생은 깁니다, 여러분.
*
싸우자, 민검사.
여기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탄소는 강력부에 소속된 새내기 검사랍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자랑스럽게 검사 배지를 단 것도 벌써 6개월. 여자라고 무시 당하지 않겠다는 포부로 서울중앙지검에 발을 디딘 첫날은 모든 게 완벽했어요. 그렇게 꿈꾸던 강력부에 배정을 받은 데다, 짐 옮기는 걸 도와주던 귀요미 박형사님은 탄소가 꿈꾸던 이상형에 가까웠거든요. 동료들도 다들 친절했고요. 대한민국 검사라니, 어렸을 때부터 꿈이 사회 정의 구현이었던 의리녀 탄소에게 완벽한, 그야말로 완벽한 직장이었어요.
“어라? 김탄소?”
…민윤기를 복도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죠.
“헬로.”
“서…설마…”
“뭐야. 반기는 얼굴이 아닌데.”
“미,민윤기?!”
“이야, ‘강력부 소속 김탄소 검사님’. 김탄소 출세했네. 우리집 뒷마당에서 발가벗고 뛰어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혹시 님이 다섯살 때 내 머리에 껌 붙이고 도와주겠다고 가위로 머리 다 잘라놓고, 초등학교 때 치마 들추고 고무줄 끊고 책 감추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 만날 친구들 앞에서 나 쪽주고, 잘생기고 공부 좀 잘한다고 좆같은 성격 다 용서받던,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좋아하는, 그 개싸가지 민윤기세요?”
“네. 민윤기천재짱짱맨뿡뿡님 할 때 앞에 세글자, 그 민윤깁니다.”
탄소의 표정은 우사인 볼트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밟은 콜라캔처럼 찌그러졌어요. 사실 탄소는 ‘그’ 개싸가지 민윤기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영영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졸업식 날 쌍싸대기와 함께 엿을 날려주던 그 후련한 기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하필이면 탄소의 첫 직장에서의 첫날, 민윤기가 복도에 떡하니 나타나다니, 어리둥절한 일이잖아요.
“그,근데 니가 여기엔 왠일이세요?”
“아, 나요?”
“참, 그렇지? 여기가 검찰청이었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민윤기 저새끼 내 저럴 줄 알았다, 내가.”
“…?”
“하, 참. 그러게 내가 씨발 죄 짓고 살지 말자고 했잖아요, 개새끼야.”
탄소의 눈이 번뜩였어요. 정신없는 와중에 지금 여기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그러니까 나쁜 놈들이 죄를 지으면 잡혀와서 심문을 받는 곳이라는 걸 용케 기억해 낸 모양이에요. 탄소의 기억 속 민윤기는 온갖 장난질을 일삼고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던, 양치기 소년의 좀 더 좆같은 버전이었으니까요.
“너 뭘로 잡혀왔냐? 절도? 방화? 아, 아니다. 넌 딱 생긴 게 사기로 잡혀 왔을 게 뻔하다. ”
“내 얼굴이 좀 사기긴 하지. 이렇게 잘생긴 검-”
“검문 중에 잡혔구나 이새기. 불심검문 하던 중에 트렁크에 위조 지폐가 이빠이- 들어있던 거야. 하-참. 야. 너 심문 중에 멋대로 쳐 돌아다니고! 어!”
“아! 아파! 야!”
“처! 돌아다녀도! 되냐고! 범법자 새끼야!”
“야 후회하기 전에 내 말 좀- 야!”
“후회는 무슨-, 뒤져라!”
그렇게 탄소는 들고 있던 결재서류로 윤기를 마구 후려갈겼어요. 쌤통도 이런 쌤통, 전세역전도 이런 전세역전이 없었답니다. 정갈하게 정리된 종이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질 때 쯤 탄소의 뒤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아니, 김검사님,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뭐 하긴요, 심문실에서 탈출한 범인, 아니, 피의자를 다시 심문실로 데려가려고 하는 중이죠, 호호.”
“민검사님, 괜찮으세요? 아유, 김검사님! 이 분은 강력부 조직범죄수사과 팀장 맡고 계신 민윤기 검사님이세요.”
“…예?”
“피의자가 아니라 네 직속 상사랍니다. 김탄소씨.”
“…”
“앞으로 즐~거운 직장 생활 기대하세요?"
바야흐로, 김탄소 수난시대의 시작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