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유난히 바람도 차가운 날이었음 윤오는 또 술에 진탕 취해서 여자애들을 낀 채로 여주에게 전화를 걸었음 자기가 많이 취했으니까 좀 데리러 오라고 여주는 주변에서 들리는 비음 섞인 오빠 오빠 라는 단어를 들어도 애써 모른 척 주소를 찍어달라고 한 채 전화를 끊었음 퇴근 후 자려고 씻고 누운 상태임에도 여주는 다시 나갈 채비를 했음 급하게 나오느라 얼굴은 민낯이고 옷도 춥게 입었음 추위를 잘 타는 여주는 오들오들 떨면서 또 택시를 타고 20분도 넘는 강남으로 갔음 윤오가 있는 술집을 들어가니 정윤오는 왼팔 어깨로 웬 모르는 여자를 감싼 채 담배를 피고 있었음 여주는 윤오 앞에 섰음 이런 일이 한두번도 아니었고 나름 익숙했기에 "윤오야 가자 일어나" "언니 누구세요?" 여주가 윤오에게 말을 하자 그 옆에 있던 여자가 일어나 거들었음 누구냐고 위아래로 여주를 훑어보며 그래 이런 상황도 익숙했기에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음 윤오는 이 상황에서도 그냥 웃고 있을뿐이었음 제대로 취한 건지 뭔지 "나 이제 가야겠다" "오빠 왜 벌써 가 더 이따 가 응? 좀 있으면 혜선이 온다 했단 말이야" "윤오야" "언니 근처 카페에서 좀 쉬다가 오면 안 돼요? 오빠 금방 보낼게요" 하...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여주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음 시끄러운 음악 소리 희뿌연 담배 연기 지독하게 올라오는 알콜냄새까지 모든 게 자극적이어서 여주는 머리가 지끈지끈아파왔음 "그럴까? 여주야 카페에서 좀 쉬다 올래? 너 커피 좋아하잖아" "윤오야 나 내일 출근해야 돼... 벌써 새벽 2시야" "그럼 그냥 가" 다른 날이었으면 윤오의 그 말을 듣고서도 다음날이면 다시 괜찮아졌을 거임 근데 하필이면 그날 회사에서도 너무 힘든 일이 있었고 너무 질리도록 겪은 이런 상황과 변하지 않는 정윤오까지 모든게 환멸이 났음 원래 같았으면 다시 웃고 그래 윤오야 나 카페에서 잠깐 확인할 거 있어서 그거 보고 있을게 라든지 하며 기다렸겠지만 여주는 더이상 그러고 싶지가 않아졌음 그래 늘 받아왔던 상처였지만 그날따라 더 심하게 받아버린 거지 더 크고 무겁게 여주는 울고 싶어져서 나 그냥 갈게. 라는 짧은 한 마디와 술집을 나가버렸음 평소와는 다른 여주 반응에 놀란 정윤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음 다시 왼팔에 붙어 안겨오는 여자를 소파에 밀쳐버린 채 여주의 뒷모습을 쫓았음 본인도 놀란 거지 그럼에도 소리내서 부르지 못하고 혹시라도 돌아볼까 그 시선에 자기가 보일까 숨으며 뒷모습을 쫓았음 그런데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지 금방 들켜버렸거든 윤오가여주를 알고 있는 것보다 여주는 윤오를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찬 바람이 불었음 윤오의 눈에 여주의 얇은 반팔이 그제서야 보였음 추위도 잘 타서 감기도 쉽게 걸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여주를 쳐다보고 있으면 눈물이 그런그렁 맺힌 눈으로 여주는 말했음 "윤오야 내가 너 이제 안 좋아하면 어떻게 할 거야?" "진심이야?" "응 윤오야 나 이제 너 안 좋아할래"
윤오는 뒤돌아서 걸어가는 여주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볼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 표정은 완전한 상실로 가득차있었음 - 둘은 유치원 때부터 알던 사이라고 하자 같은 유치원을 나왔고 여주는 그때부터 윤오를 좋아했음 어릴 때의 윤오는 이렇게 차갑고 나쁜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음 오히려 자상하고 또 여주를 잘 챙겨주는 금이야 옥이야 혹시 상처 하나라도 날까봐 불안해 하고 여주를 괴롭히던 남자애들이랑 싸워서 얼굴에 상처까지 나가도 했었음 그게 아마 초등학교 때까지의 일이었음 둘은 서로 결혼할 거라고 말하고 다녔었는데 여주는 그 말을 진심이라고 믿고 살았음 물론 그 시절의 윤오도 진심이었음 여주가 정말 좋았고 사랑스러웠으니까 그런데 그러던 윤오가 바뀌기 시작한 건 중학교에 입학하던 무렵부터였음 여주는 여중을 가고 윤오는 남녀공학 중학교에 입학하게 됐음 어릴 때부터 잘생겼으니까 그 동네에서 정윤오는 꽤 유명했음 그럼에도 잘 티가 나지 않았던 건 윤오는 초등학생 때까지 양아치 일진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인물이었음 당연함 그 시절의 윤오의 전부는 여주뿐이었으니까 윤오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음 일진 무리와 어울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술과 담배를 하기 시작한 거임 여주랑 만나는 날도 줄어들었음 원래는 일주일 중 7일을 만났다면 이때부터는 일주일에 2번 정도 그마저도 여주가 윤오의 집앞에 찾아가야 만나는 수준이었음 그래 이때부터 여주는 끙끙 앓는 짝사랑을 시작하게 됐음 __ +3day 윤오가 눈뜨면 와있어야 할 여주의 연락들은 하나도 오지 않았음 정윤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음 본인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여주에게 못할 짓을 하고 얼마나 상처 줬는지 그럼에도 속이 헛헛하게 타들어갔음 그동안 어떻게든 버텨지고 있던 윤오의 세상이 완전히 붕괴되어버린 거임 보통 같으면 옆자리에 모르는 여자가 아침부터 윤오에게 안겨들었을 텐데 그날부터 윤오는 여자를 끊어버렸음 그럼에도 술과 담배는 못 끊겠는지 아니 오히려 더 그것들에 의존하는지 군대에서나 피던 6mm 짜리 담배를 사서 하루에 한 갑씩 태우기 시작했음 술은 끊이지 않고 마시고 여주의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폰만 뚫어져라 쳐다봤음 그러다 갤러리에 들어가 여주 사진을 보고 여주와 연락을 나눈 채팅창을 보고 그러다 오래전에 받았던 여주가 써준 편지가 생각나서 그냥 웃었을 거임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한심해서 그리고 여주의 진짜 행복을 빌어줘야 한다는 현실이 막막해서 ___ +14day 여주는 난생처음 소개팅이라는 것을 하려고 나왔음 친한 친구에게 연락을 받은 거였고 같은 대학 나왔는데 3학년 축제 때 여주를 봤고 그때부터 여주를 좋아했다고 들었음 공과대학 졸업하고 IT 업계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고 들었음 여주는 오랜만에 화사한 블러우스를 꺼내 입었음 조금 불편하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신어보겠냐 하며 누디한 컬러의 예쁘지만 조금은 구두도 꺼내 신고 소개팅 장소는 한남동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이었고 소개받은 남자도 꽤 깔끔한 스타일에 잘생긴 얼굴이었음
"안녕하세요 여주씨" "도영...씨? 안녕하세요" 소개팅 분위기는 꽤 좋았음 낯을 가리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도영이 질문도 많이 하고 재밌게 만들어 주기도 했음 또 도영은 자연스럽게 다음번 여주와의 애프터를 잡기도 했음 "이번은 제가 살 테니까 다음에 만날 땐 여주씨가 사줘요" "네 다음번엔 제가 꼭 살게요 그리고 다음에 볼 땐 우리 반말하기!" "맞다 아까 우리 말 놓기로 했지" 도영은 카드를 내민 후 빈손으로 입술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음 그 표정이 꼭 토끼 같이 귀여워서 여주는 웃음을 터뜨렸음 결제가 끝난 후 카드를 돌려받은 도영은 여주에게 왜 웃냐며 너스레를 떨었음 그러다가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여주에게 물었음 "집까지... 데려다 주는 건 실례겠지?" "음...... 오늘은 나 혼자 갈게요 다음번에 데려다 줘요" "알겠어요 다음번에 밥은 여주씨가 사고 운전기사는 내가 할게요" 도영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방끗 웃어보였음 여주는 정윤오가 아닌 다른 남자와 이렇게 웃고 떠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운 하루였음 ___ 여주가 택시에서 내렸음 아파트 단지 안이었고 집 앞이었음 그러자 크락션 소리가 크게 울렸음 놀란 여주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니 익숙한 차량 한대가 서있었음 정윤오였음 "어디갔다와?"
뭐 남자라도 만났나봐? 윤오는 처음 질문은 다정하게 물어놓고 이후의 말은 여주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으며 다른 남자와 만나고 온 듯한 의상 차람에 시건방을 떨며 물었음 여주는 갑작스레 나타난 윤오에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다가도 핼쓱해진 윤오의 얼굴에 속상함이 밀려왔음 그날 마지막을 고할 때 여주도 알고 있었음 자기가 놔버리면 윤오는 정말 갱생하기 힘들어질 것임을 그럼에도 이번에는 정말 마음을 다잡으려고 세게 나갔음 "어. 만났어 남자. 너 말고도 좋은 남자 나 좋아하는 남자 많더라" "너가 걔네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좋아해볼 거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너한테 전부는 나잖아" "이젠 아니야" "아니라고? 그런 말하면서 왜 내 얼굴은 똑바로 못 봐" 여주는 고개를 푹 숙였음 눈물이 차올라서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음 그런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정윤오도 너무 미웠음 알면 그렇게 잘 알았으면 왜 여태까지 안 변했는지 왜 자꾸만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을 밀어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김여주 고개 들어" "윤오야 그냥 가 나 너무 피곤하다" 여주는 가로막고 서있는 윤오를 힘 없는 손으로 밀어냈음 당연히 밀릴 일은 없었지 그럼에도 여주는 윤오를 비켜서라도 아파트 입구로 걸어갔음 윤오는 또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음 마음이 타들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음 ___ +16day 여주는 도영과 연락을 계속해서 주고 받았음 다음 데이트는 다음주 수요일 저녁이었음 그날 이후로 윤오에게 따로 연락이 오거나 하진 않았음 그런데 핼쓱해진 아파 보이는 그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신경을 긁었음 윤오가 너무 밉고 싫은데 그럼에도 정윤오 말처럼 여주에게 전부는 아니 평생의 모든 신경 자체가 윤오였는데 그걸 떼어낸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음 혼자 집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음 그동안 너무 마음고생해서 이제 흘릴 눈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수도꼭지처럼 쉬지 않고 눈물이 흘렀음 원체 마른 편이었단 여주는 2주 내내 살이 빠져가고 있었음 48kg이었던 몸무게가 42kg까지 빠졌을 때 여주는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음 이렇게 살면 정말 죽겠다 싶기도 한 거지 그래서 여주는 닥치는대로 먹고 닥치는대로 사람을 만나기시작했음 그동안 잘 만나지 못했던 동창들을 만난다든가 잘 마시지 않았던 술을 마시기도 하고 평범한 일상을 찾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음 그럼에도 평생을 쥐고 살아온 존재가 빠져나간 사실은 내 자신이 반으로 갈라지는 고통이었음 사실 도영이랑 연락을주고 받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도영이 무슨 질문을 하는지 하나도 기억에 남아있질 않았음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____ +24day 윤오는 하루하루가 죽을 것만 같았음 여주를 여태껏 밀어낸 건 본인의 자격지심이 가장 컸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엔 여주만을 사랑할 수 있었는데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었음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정상적인 부모님 곁에서 행복하게 지란 여주와 가난한 집에서 알콜 중독 아빠와 술집을 다니며 어떻게든 생계를 이끌어보려고 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패는 또 아빠 윤오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성인 돈 많은 성인 누나들을 만나기 전까지 단 한번도 새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음 그런 자신이 여주를 사랑한다? 그건 본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음 하지만 그럼에도 여주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좋아하면 안된다는 걸 알지만 여주가 행복하려면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거 그래서 끊임없이 밀어냈지만 완벽하게 밀어낼 수 없었던 거 그래서 이렇게 비정상적인 관계가 10년째 유지되고 있었던 거 윤오는 자신을 원망함과 동시에 본인의 부모를 미친듯이 증오했음 성인이 된 후 집을 나왔고 그 이후로는 그 둘과 얼굴 한번 본 적 없이 명절 안부 물은 적 없이 지내왔음 여주는 당연히 그 일을 몰랐고 대학 문제로 자취만을 하는 줄 알았을 거임 윤오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여주에게 본인의 썩은 환경을 보여주지 않으려 감춰왔음 그게 여주에게 할 수 있는 자신의 마지막 남은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 점이 둘의 관계를 더욱 망쳐왔다는 사실을 눈 가린 채로 윤오는 혼자 있는 집에서 또 술을 마셨음 잔뜩 취해서는 여주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가도 이젠 정말로 여주의 행복을 빌어줘야 해서 자신은 너무 쓸데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에 연락 한번 남기지 못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 들었음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