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
저를 부르는 쩌렁쩌렁하게 큰 박지민의 목소리에 김태형이 흙을 쌓아 올리다 말고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연청색의 바지와 하얀 티셔츠를 입은 김태형의 머리엔 오늘도 검은색 모자가 꾹 눌러쓰여 있다. 박지민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던 김태형이 나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에 묻은 흙을 대충 손으로 털어내며 이쪽으로 걸어온 김태형이 내 앞에 섰다.
"왔어?"
"응."
나를 빤히 쳐다보는 김태형의 시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었다가도 금방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행동이 웃긴 건지 김태형이 큭큭 웃음을 흘렸다. 올려묶은 내 머리를 괜히 툭 하고 건드린 김태형이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제 팔을 걸었다. 익숙한 듯 걸려온 팔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만 도르르 굴렸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태형은 박지민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다른 애들은?"
"숙소에. 넌 오늘도 모자야? 덥지도 않나봐."
"모자가 있어야 비로소 모태의 완성이지."
웃으며 박지민의 말을 받아친 김태형이 가자, 하는 말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나도 김태형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뗐다. 같이 걷는 동안 김태형은 자꾸만 내 머리를 건드렸다.
"그만 건드려."
"왜?"
"그렇게 자꾸 건드리면 풀린단 말야. 신경써서 묶은 건데."
"신경쓴 머리야?"
"그래."
"왜?"
"……어?"
"왜 신경써서 묶고 왔어?"
"……그야…."
"신경쓰이는 사람이라도 있나봐?"
입꼬리를 올린 채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물어오는 김태형의 물음에 순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만 꾹 다물었다. 보이진 않지만 아무래도 내 볼이 분명 복숭아처럼 발그레해져 있을 게 뻔했다. 대답 않는 내 모습에 김태형이 다시 한 번 피실 피실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다시 내 머리를 꾹 눌렀다. 그런 김태형의 행동에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괜히 내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다 알면서 왜 물어, 매번….
걷다 말고 옆을 힐끔 한 번 바라보았다. 오늘도 김태형의 모습은 참 청량하다. 지금 이 곳, 바다와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머리에 씌어진 저 모자만 어떻게 좀 하면 좋을 텐데. 김태형은 늘 저렇게 모자를 머리에 꾹 눌러 쓰고 있었다. 오늘은 꾸러기처럼 뒤로 쓰긴 했지만 김태형을 알고 지낸 반년 동안 김태형은 단 한 번도 모자를 벗은 적이 없었다. 물론 같은 모자만 쓰고 오진 않았다. 어떤 날엔 청 스냅백, 어떤 날엔 하얀 캡모자, 그리고 오늘은 하얀 로고가 박힌 검은색 캡모자. 오죽하면 별명이 '모태'였다. '모자쓴 태형이'. 덥지도 않은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김태형이 내 시선을 느꼈나보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내 눈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곤 물어왔다.
"왜 그렇게 쳐다봐."
"…어어?"
"오늘따라 잘생겼어?"
그 말에 순간 대답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어 김태형의 시선을 피하곤 한 박자 늦게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 더워?"
"나?"
"응. 모자, 안 더워?"
"괜찮은데. 더워 보여?"
"보는 내가 다 더워."
내 말에 김태형이 피식 웃었다.
"더워도 못 벗어."
"왜?"
내 물음에 김태형이 걷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는 내 목에 감았던 팔을 조금 더 제게로 당겨 나를 품에 안듯 가까이 당긴 뒤, 내 귀에 제 입을 가져왔다. 잠깐 뜸을 들이는 김태형 덕분에 김태형의 숨소리가 아주 얕게 내 귓가에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김태형의 행동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춘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태형이 웃음 담긴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이듯 작게 말을 해왔다.
"내 모자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거든."
알 수 없는 김태형의 말에 호기심이 물처럼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신경쓰이는 건 가까운 김태형과 그런 김태형 덕분에 열이 잔뜩 오르고 붉어진 내 볼이었다.
"야아! 쟤 잡아!"
우렁찬 윤기 오빠의 목소리에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박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치를 챈 건지 도망을 가는 박지민이지만, 모래사장 위에서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는 건지 도망가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박지민을 향해 돌진하는 모두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박지민을 물에 퐁당 적시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도 평소 박지민에게 쌓인게 많았던 건지, 혹은 박지민에게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건지, 뭐, 무튼 여러가지 이유로 김태형이 박지민에게 가장 먼저 도착했다. 숨을 헐떡이며 박지민의 어깨를 잡은 김태형이 씩 웃으며 소리쳤다. 이야, 박지민 잡았다! 쩌렁한 목소리에 박지민에게서 김태형에게로 내 시선이 옮겨갔다.
여전히 김태형의 머리에 씌어진 까만 모자. 저 모자는 뛰는데도 벗겨지지도 않네. 그리고 조금 전 김태형이 내게 말했던 알 수 없는 한 마디. 모자 속 비밀. 대체 뭐지? 그리고 그 때, 어깨를 붙잡힌 지민이가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김태형에게 말해왔다.
"놔라. 제발. 놔 줄 거지?"
"뭐라는 거야."
지민이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별 시덥잖은 소리 다 듣는다는 표정의 김태형이 씩 웃으며 그대로 박지민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 힘도 세다, 김태형. 얼핏 보면 그렇게 힘이 셀 것 같지도 않은 여리한 김태형은 예상 외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가볍게 지민이를 들어 올린 김태형은 그대로 바다를 향해 돌진했다. 김태형의 위에 올려진 박지민은 계속해서 뭐라고 소리치며 발을 버둥거렸고, 그런 지민을 무시하며 바닷물이 제 허리에 오를 만큼 바다로 들어간 김태형이 그대로 박지민을 냅다 던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박지민이 자취를 감췄다. 잠시 뒤 물 위로 올라온 박지민은 쫄딱 젖은 모양새였다. 그 모습이 웃겨 지켜보던 모두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저게 뭐야."
터져버린 웃음에 나도 모르게 푸흐흐 웃음을 냈다. 박지민의 모습이 웃긴 건지 김태형도 웃음이 터져 큭큭대며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야. 죽인다, 김태형."
"네가 날? 겁도 안 난다."
약올리는 듯한 김태형의 말에 박지민이 씩씩대다가도 지금 제 상황이 웃긴 건지 저도 웃음이 터져버렸다. 킥킥 웃으며 김태형을 향해 물장구를 치는 박지민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그 옆에 선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물에 젖어 이마에 눌러붙은 앞머리가 제 눈을 찌르는 건지 김태형이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박지민이 튕기는 물을 막으려 손을 뻗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민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윤기 오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민윤기다! 잡아!"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윤기 오빠에게로 닿았고, 박지민은 당한 설움을 갚아주려는 듯 그 누구보다 빠르게 윤기 오빠를 향해 뛰었다. 나 또한 윤기 오빠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쪽을 향해 뛰려다 말고, 다시 한 번 김태형을 힐끔 바라보았다.
김태형은 왼 손에는 모자를 쥔 채로 오른 손으로 제 이마 위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었다. 처음으로 벗겨진 김태형의 모자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머리를 금방 넘긴 김태형이 다시 모자를 뒤로 개구지게 꾹 눌러 썼다. 그리곤 도망치는 윤기 오빠를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거기 서!
윤기 오빠를 향해 멈추라고 하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김태형의 말은 나를 향한 것만 같았다. 내 다리는 순간 굳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김태형이 조금 전 서있던 곳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방금, 분명, 김태형이 넘긴 머리카락 사이로 무언가를 본 것 같은데.
…뭐지?
방금 그건 대체 뭐지?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던 나는 이상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내가 잘못 본 걸 거야. 거기에, 거기에… 강아지 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
엠티 아닌 엠티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에 술이 빠질 수가 있나. 친한 아이들 몇 명이 모여서 놀러온 엠티와 비슷한 이 여행의 끝은 결국 술파티로 이어졌다. 언제 이렇게 흐른 건지 시각은 벌써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밖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도로 옆의 가로등 불빛만이 그나마 밖을 비춰주고 있었다. 술을 잘 못하는 박지민을 비롯한 두 세 명의 아이들은 벌써 뻗은 지 오래였다. 남은 사람은 나와 김태형, 효진이와 윤기 오빠. 네 명이었다. 살짝 볼이 달아오른 효진이와 눈이 풀린 윤기 오빠는 아까 전부터 쉴 새 없이 티격태격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 아무리 봐도 이게 낫다니까?"
"아니. 어째서요? 아무리 봐도 이게 낫지."
"그거 완전 구려."
"오빠가 고른 게 더 구려요."
"대체 뭘로 그렇게 싸워?"
보다 못한 김태형이 그들에게 묻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뭘까 싶어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보던 내 눈에 보인 건 휴대폰 케이스였다. 빨간 캐릭터 케이스와 파란 캐릭터 케이스를 두고 뭐가 더 나은지 싸우고 있었던 걸 눈으로 확인하자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건 김태형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와 비슷하게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뒤로 벌러덩 누우며 말했다.
"둘 다 사지 마, 그냥. 둘 다 구려."
"뭐?"
"야. 지금 니가 끼고 다니는 것보다 이게 훨씬 나아."
"아무렴. 김태형 니 케이스가 제일 구려."
"차라리 김효진이 고른 케이스가 더 낫겠다."
"차라리 민윤기 오빠가 고른 케이스가 더 낫지."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이제 김태형에게로 따박따박 따지고 있었다. 그런 둘의 목소리에도 김태형은 못 들은 척, 안 들리는 척 눈을 감고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김태형의 노랫소리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섞이니 꽤나 귀를 따갑게 하는 소음에 한숨을 짧게 내쉬곤 몸을 일으켰다. 옆에 대충 버려져 있던 저지를 하나 주워 어깨에 걸치곤 걸음을 옮기자 어떻게 안 건지 김태형이 눈을 슬며시 뜨곤 나를 바라보며 물어왔다.
"어디 가?"
"잠깐 밖에. 바람 좀 쐬러."
그리곤 대답을 듣지 않고 슬리퍼를 대충 신은 채로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면 좀 시원할줄 알았는데 여전히 덥긴 더웠다. 여름이라 그런가. 그래도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 좋아 총총총 걸음을 옮겼다. 밖에는 벌레소리가 웅웅 울렸다. 아까 전 그 소리보다는 훨씬 큰 소리였지만 그래도 훨씬 더 듣기 좋은 소리였다. 몇 걸음 걷다 말고 바다가 보이는 방향으로 멈추어 섰다. 그제서야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졌다. 더불어 바다 냄새도.
"아, 바다 냄새 좋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언제 온 건지 김태형이 내 옆에서 씩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랐잖아."
"놀랄 게 뭐 있어."
"이렇게 늦은 밤에 갑자기 옆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리면 누구든 놀라."
"이렇게 늦은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여자는 위험한데."
내 말을 따라하듯 말을 뱉은 김태형이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런 김태형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 전 보았던 그 귀가 자꾸만 생각났다. 여전히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김태형. 이번엔 앞으로 눌러쓴 김태형의 모자 안에는 정말, 아까 봤던 그… 이상한 게 있는 걸까. 모자를 벗기고 싶은 욕구가 자꾸만 끌어올랐지만 겨우 겨우 잠재웠다. 다짜고짜 여기서 모자를 벗겨버릴 수는 없잖아.
내 시선에 김태형이 나를 바라보았다. 의아한 표정을 담아 왜? 하고 물어오는 김태형을 향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때마침 조금 전과는 다르게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바다 향기가 한가득 담긴 바람이었다. 시원하다 못해 추운 느낌에 내 팔을 손으로 살짝 쓸자 김태형이 "야." 하고 나를 불렀다. "어?" 하는 내 대답에 김태형이 나를 자신과 마주보게 돌려 세웠다. 그리고는 내 어깨에 걸쳐진 저지의 지퍼를 쭉 잠궈 올렸다.
"바람 많이 불어."
"……."
"감기 걸리겠다."
이런 행동에 내가 얼마나 떨려하는지 김태형이 알까 싶다. 모르니까 이렇게… 사람 설레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씨이…. 김태형의 행동에 나는 또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곤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김태형은 그런 내 행동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약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다시 강하게 불어왔고 순간적으로 김태형의 모자가 반쯤 벗겨지듯 들어올려졌다. 김태형은 자연스레 제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모자를 푹 눌러 썼다. "하마터면 벗겨질 뻔 했네. 모태 별명 버릴 뻔 했어." 하며 개구지게 말하는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왠지 가슴께가 간질거려서 나는 김태형의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때, 남아있던 술기운 덕분인지 스텝이 살짝 꼬였고 내 몸이 휘청였다.
"어, 어어!"
다급한 내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내 팔을 단단하게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덕분에 나는 당겨진 쪽으로 푹 안기게 되었다. 놀라서 꼭 감았던 눈을 떠보니 김태형의 품안이었고, 김태형은 놀란 표정과 함께 한 쪽 눈썹을 찡그린 채로 말했다.
"조심 좀 해. 다칠 뻔 했잖아."
그리고 그 순간 강한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왔다. 그 바람은 내게서 김태형을 향한 방향으로 세차게 불었고, 단숨에 김태형의 모자가 바람과 함께 날아갔다. 나를 잡고 있던 김태형은 미처 모자를 잡지 못 했고 김태형을 올려다보고 있던 나는 그대로 드러난 김태형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곳에는 조금 전 보았던 강아지 귀와 같은 게 달려있었다. 김태형의 머리색과 비슷한 짙은 갈색의 털로 덮힌 귀가 양쪽에 각각 하나씩.
놀란 표정의 내 시선이 김태형과 닿았다. 김태형도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고, 이내 큰 손 하나가 내 눈 위를 덮었다. 김태형이 제 손으로 내 눈 위를 덮은 뒤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하… 망했다."
구름빵입니다! 필명을 바꿨어요! 이젠 구오사사!! 9544!
boss는 아무래도 이어쓰기 힘들 것 같아서.. 뒤에 내용이 기억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너무 오래 되서 그런 걸까요 ㅠㅠㅠ...ㅠㅠㅠ
이 필명으로 윤기의 '반'과 태형이의 '반' 이 같이 연재될 거에요 ㅎㅎㅎㅎㅎㅎ
윤기의 반은 반은 인간 반은 뱀파이어, 태형이의 반은 반은 인간 반은 ?????? 이건 다음 편에 나올라나?
암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