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영 사범님이 좋아요, 아니 싫어요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따사로운 봄이 오면 새로운 계절이 재정비되듯 학생들도 새 학기가 시작되어 새로운 생활을 재정비하는 시기이다. 학년이 바뀌고, 학교가 바뀌면서 모두가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남들보다 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은 예감에 한숨이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플디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는 단계를 거치고 있어야 할 여주는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직장 발령 때문에 계획을 틀어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거기에 있는 세봉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예정되어 있지 않던 상황에 여주는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 말고는 딱히 자신이 취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여주는 걱정과 불안을 안고 이삿짐을 꾸려야만 했다.
이사 당일이 되어 짐을 실은 이삿짐 트럭이 먼저 출발하고 여주네 가족은 자가용을 타고 그 뒤를 따라갔다. 여주는 이사 준비를 하며 최대한 불안을 덜어보려고 했지만, 자신이 이삿짐을 싸기 위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을 동안 학교에 입학했을 애들은 서로 이미 친한 무리를 만들었을 텐데 며칠이 지나 이제 와서 그 무리에 친해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차를 타고 학교를 향해 가는 중에도 '혹시나 친구들과 친해지지 못 해서 외톨이가 되면 어쩌지, 외톨이면 다행이게, 외톨이가 아니라 왕따를 당해서 괴롭힘을 당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삽질을 하고 있었을까, 지나쳐가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던 여주의 눈에 합기도 체육관이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여주는 문뜩 자신도 합기도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평소에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운동에 관심이 있기도 했고, 사실은 저런 거라도 배워놓으면 다음에 왕따를 당해도 얻어맞고 다니는 건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마음이었다.
"나도 합기도 배우고 싶다…."
여주는 점점 멀어져 가는 체육관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말을 지나가듯 흘렸다. 하지만 이내 여주는 부모님이 평소에 자신의 활달한 성격을 모르시는지 어릴 적부터 피아노나 발레, 미술과 같은 얌전한 성격의 학원만 보내줬기 때문에 저런 운동을 시켜줄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접었다. 그냥 친구들 눈에 나쁘게 보이지 않게 노력하면 딱히 나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여주는 학교에 도착하기 전까지 잠이나 자자고 눈을 붙였다. 잠깐 눈을 붙인지 얼마나 지났을까, 학교에 도착했는지 일어나라며 흔드는 손길에 여주가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창밖을 보자 정말로 도착했는지 세봉고등학교라고 쓰인 정문이 보였다. 막상 눈앞으로 상황이 닥치니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여주는 매고 있던 가방끈을 움켜쥐었다.
"진짜 도착했네. 아, 나 떨려서 어떡하지."
"최여주, 고작 이런 걸로 쫄았냐? 찌질아, 너 어디 가서 내 동생이라고 하지 마라. 쪽팔리니까."
"뭐래? 오빠야말로 어디 가서 내 오빠라고 하지 마. 무조건 나 모르는 척 해줘 제발. 중딩 때처럼 우리 반 쳐들어와서 지랄하면 죽여버릴 거야."
"뭐? 지랄? 말 곱게 안 할래? 이게 오빠한테 어디서."
"헐. 엄마 아빠! 나 가볼게!"
여주는 안 그래도 심란해죽겠는데 옆에서 깐족거리는 오빠 때문에 열이 뻗쳤다. 먼저 놀리길래 화가 나서 똑같이 맞받아쳐줬는데 때리려고 자세를 취하는 오빠를 보고 여주는 황급히 차 문을 열고 내려 학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오빠에게 잡히지 않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게 뛰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여주의 뒷덜미가 오빠의 손안에 들어갔다. 여주에게 헤드락을 걸어 잡아놓고 얼른 잘못했다고 빌라며 간지럼을 태우는 오빠 때문에 여주는 항복을 외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시끄러운 방법이긴 했지만 오빠 덕분에 여주는 불안하던 마음을 떨쳐내고 웃으며 새로운 생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 * *
"아들, 오늘 학교는 어땠어?"
"괜찮았어요. 애들도 잘 해주고."
"딸은?"
"나도 괜찮았어. 선생님도 잘 챙겨주시고, 애들도 친절하던데."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 전학 첫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여주는 가족들과 이삿짐을 정리하고 난 후 거실에 모여앉아 야식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오늘 새로 간 학교는 어땠는지, 친구들은 어땠는지, 새로 간 직장은 어땠는지 서로의 일상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주는 그 자리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 방금 뭐라고…."
"너희 오빠는 원래 유도했었으니까 그대로 유도 배우고, 여주 너는 오늘 차에서 오는 길에 합기도 배우고 싶다고 그래서 합기도 체육관 끊어놨어."
"나야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진짜 보내주는 거야?"
"이제 너도 고등학생이니까 운동 배워놓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엄마 아빠 때문에 친구들이랑 헤어져서 이사도 왔는데 너 하고 싶은 거 하게 해주고 싶어서. 혹시 싫어?"
"아니! 완전 좋아!"
합기도 체육관을 보내주겠다는 엄마의 말에 여주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긍정의 답이었다. 미친 듯이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생각지도 못하던 일이라 그런지 그 기대감이 배로 와 닿았다. 내일부터 학교 끝나고 바로 가면 된다는 말에 여주는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다. 뭐, 금방 옆에서 운동해봤자 자신한테 발릴거라고 깐족거리는 오빠 놈 때문에 짜증이 오르긴 했지만.
다음 날, 여주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들러 교복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만 해도 어제 일이 꿈인가 싶어서 엄마한테 되물어봤던 여주는 이제야 체육관에 간다는 게 실감이 났다. 어떡해, 나 너무 설렌다! 집에서 걸어서 10여 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체육관에 앞에 도착해서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갔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주는 자기가 제일 먼저 온 건가 싶어서 체육관 안을 둘러보다 대충 구석지에 가서 앉았다. 가만히 앉아있다 보니 심심해져 핸드폰이나 하고 있을까 하고 핸드폰을 꺼내드는데 조용하던 체육관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던 쪽을 쳐다보자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탈의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마 관원 중 한 사람일 것 같은데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하기에는 어색해서 여주는 금방 다시 핸드폰으로 눈길을 돌렸다. 근데 좀 무섭게 생겼다.
"저기."
"네?"
"여기 매트 위에 앉아. 거기 바닥 차가워."
날카롭게 생긴 남자의 모습을 보고 무섭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대답을 했다. 남자는 대뜸 여주에게 자기가 앉아있는 매트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그쪽으로 와서 앉으라고 말하는데 저 남자가 무섭게 생긴 건 둘째치고 처음 본 남자 옆에 가서 앉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서 여주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지금 자기가 앉아있는 곳은 맨바닥이라 남자의 말대로 찬 기운이 올라오고 있어서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쭈뼛거리며 남자가 앉아있는 매트 위로 가서 앉았다. 매너는 좋은 것 같네.
그 뒤로 남자는 여주에게 딱히 말을 걸지 않았고, 여주와 남자는 나란히 앉아 자신들의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곧 사람들이 오는 건지 바깥이 소란스러워져서 여주는 그제야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이 열리고 남자애들이 여러 명 들어오고 문이 닫히는데 '어? 문이 닫혀? 잠깐만 나 여자 들어오는 거 못 봤는데?' 여주는 당황스러워 문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문이 다시 열리길래 여자가 들어오나 하고 생각했는데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은 관장님으로 보이는 분이었다. 허탈함에 인사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 그런 여주를 관장님이 발견하고 사무실로 따라오라고 손짓하셨다.
"네가 오늘부터 다니기로 한 여주구나?"
"네. 저 맞아요. 그런데 혹시 다른 여학생은 없어요?"
"글쎄. 우리 체육관은 대회 출전이나 시범단으로 자주 활동해서 여학생들은 몇 없는데. 그나마 있는 애들도 이 시간대에는 없어서 어쩌지."
"아…."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남자애들이 순한 편이라 괜찮을 거야. 그리고 밖에 순영아! 좀 들어와 볼래?"
사무실로 들어간 여주는 관장님이 내미는 서류에 이름이랑 전화번호 등을 적다가 혹시 다른 여학생은 없냐고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가차없었다. 오기 전부터 남자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아예 없을 거라고 생각은 못 했던 여주는 속상하긴 했지만 '하긴, 운동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별로 없긴 하지.' 하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써 내려가던 걸 마저 적었다. 그 사이 관장님이 순영이라는 사람을 부르자 사무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사람은 아까 여주가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봤던 남자였다. 이름이 순영이구나…. 순박한 느낌의 이름이 신선했다.
"순영아, 여기는 이번에 들어온 최여주. 여주야, 여긴 우리 체육관 사범 권순영"
"우와 여자다. 전 관장님 딸인 줄 알았는데. 칙칙한 우리 체육관에도 드디어 빛이 드는 건가.""
"그래. 너희들처럼 칙칙한 놈들 사이에 빛 같은 존재니까 순영이 네가 여주 잘 챙겨줘."
"네. 걱정 마세요."
권순영. 독특한 이름이지만 얼굴과 반대되는 듯 또 묘하게 어울려서 예뻤다. 그런데 사범님이라니. 여주는 순영이 그냥 학생인 줄 알았는데 사범님이라는 말에 놀랐다. '혹시 얼굴이 엄청나게 동안인 건가.' 생각한 여주의 놀란 모습을 본 관장님이 순영이 나이는 아직 18살이지만 단증은 3단까지 딴 유단자라고 말해주셨다. 사범은 원래 단증을 3단까지 따면 고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여주는 이해를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가 이해한 모습을 보고 관장님은 순영에게 여주를 챙겨달라고 말씀을 하시고 밖으로 나가셨고 사무실에는 순영과 여주만 남았다. 순영은 여주가 앉아있는 소파 맞은편에 앉더니 여주를 물끄러미 쳐다봐서 그 시선을 느낀 여주가 순영을 쳐다봤다.
"꼬맹이, 몇 살이야?"
"꼬맹이는 아니고 17살이요."
"헐, 꼬맹이는 아니네. 혹시나 꼬맹이라 그래서 기분 상했으면 미안. 어려보여서. 그럼 키는 얼마 정도야?"
"한 160 정도요."
여주는 순영의 말에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속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중학생 때부터 꼬맹이라는 말은 들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흔치 않은 단어였는데 그걸 무서울 줄 알았던 순영이 눈웃음을 지으면서 꼬맹이라고 부르는 모습 때문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여주는 그런 감정을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했고, 여주의 바람대로 순영은 여주의 속을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사무실 한편에 있던 서랍에서 도복을 꺼내 여주에게 건네주었다. 나가자는 말에 순영을 따라 나가자 탈의실이라고 쓰인 문패가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가 탈의실이야. 근데 여자용 탈의실이 따로 없거든. 그래서 여기 들어갈 땐 꼭 문 잠그고 들어가. 알았지?"
"네."
"들어가서 이름표 없는 캐비닛 찾아서 옷 넣어놓으면 돼. 그럼 갈아입고 나와."
순영의 말대로 탈의실에서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문 앞에 서 있던 순영이 여주를 빤히 쳐다보다 갑자기 여주의 허리로 손을 가져갔다. 놀란 여주가 움찔거리며 뒷걸음치자 순영의 손이 여주에게 다가가다 허공에서 멈췄다.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아차 싶었다는 표정을 지은 순영이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미, 미안. 내가 남자애들이랑만 있다 보니까 순간 나도 모르게. 이상한 짓 하려고 한 건 아니고 너 띠 잘못 매서 다시 묶어 주려고. 그, 내가 해줘도 될까?"
"네? 네. 해주셔도 돼요."
"그럼 그 띠 좀 일단 풀어볼래?"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순영의 모습에 오히려 뒷걸음쳤던 여주가 자신의 행동이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첫인상은 강해 보였지만 말투도 친절하고 저렇게 미안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은 마치 햄스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매너도 있고 귀엽기까지 해. 여주는 반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순영 때문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참으며 띠를 풀어 순영에게 내밀었다.
"허리에 손 좀 두를게. 놀라지 마."
순영은 말을 끝내고 여주의 허리에 손을 둘러 띠를 매 주었고 그런 순영의 행동에 여주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순영은 여주에게 띠를 매주면서 "왼쪽이 위로 올라가게 해서 한번 묶고 올라간 쪽이 다시 또 올라가게 한번 더 묶는거야." 라며 띠를 묶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서로의 몸이 가까워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여주가 숨을 쉴 때마다 순영의 몸에서 달달한 베이비 로션 향이 은은하게 흘렀고, 여주는 그 향을 맡으면서 또 다른 한 가지를 느꼈다.
'어, 계속 두근거린다.' 는 걸.
* * *
안녕하세요. 여름눈꽃입니다.
어제 1화 날려먹고 되게 속상했는데 힘내라고 이야기해주셔서 정말 많은 힘 되었어요ㅠㅠ 감사합니다
00화는 여주가 검은띠를 딴 이후라서 지금과는 조금 먼 이야기에요. 그래서 그 때는 서로 노련하게(?) 장난을 치고 있죠.
지금은 서로 막 만난 시점이라 되게 풋풋한 분위기인 것 같아요ㅋㅋ 앞으로 여주가 검은띠를 딸 때까지 열심히 연재해보겠습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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