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 마 말 고 시 어 머 니 . 00
“우리 엄마가 너네 엄마지, 뭐. 안 그래?”
“뭐래? 너네 엄마가 왜 우리 엄마냐? 싫어!”
매몰찬 대답을 들은 변백현 얼굴이 잠시 당황과 서운함으로 물든다.
그래도 아하하 웃어 보인 변백현은 김여주 어깨를 척척 두드리며 넉살 좋게 말했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우리 엄마가 들으면 서운하겠다. 우리 정도면 가족이지! 오빠, 해봐. 오빠!”
“아, 몰라! 싫어! 너네 엄마가 우리 엄마인 것도, 네가 오빠인 것도 싫다고!”
열을 내며 빽 소리를 지른 김여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먼저 휙 가버렸다.
얼빠진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보던 변백현은 이미 저 멀리 점이 된 김여주를 보며
허, 차! 저 기집애가 약을 먹었나! 우리 엄마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하며 씩씩댔다. 못내 상처를 받은 것이다. 초딩의 여린 마음에.
먼저 자리를 뜬 김여주도 씩씩대고 있었다.
참나! 저놈의 자식이 내가 자길 얼마나 좋아하는데! 오빠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참으로 귀여운 초등학교 꼬꼬마 시절의 그들이었다. 그러나 웃기게도 이 날 이후로 둘 사이의 어떠한 교류도 접점도 없었다고 한다. 마주쳐도 인사 한 번 안하고 쌩까는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수 년 후, 김여주가 변백현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전학을 가기 전까진.
엄마 말고 시어머니
“얘들아. 너네가 그렇게 궁금해 하던 전학생이 지금 복도에 와있다.”
자칭 학젤웃쌤(학교에서 제일 웃긴 쌤)인 김준면선생이 전학생에 대해 운을 떼자 학생들 눈에 호기심이 가득 반짝였다. 이번 달 자리뽑기에 운좋게 맨 뒷자리를 뽑은 변백현의 눈 역시 반짝였다.
“여주야, 들어와라.”
여자구나! 남학생들 눈에 태양처럼 빛이 돌았다. 남학생이 5분의 4는 차지하는 이 이과반에 한줄기 빛을..! 여자 이름에 오, 한 아이들은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김여주를 보곤 물개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개이뻐!
드물게 모두가 깨어있는 아침이다. 반에 웃음꽃이 한가득이었다.
변백현만 빼고.
“인사해라. 앞으로 우리 반에서 같이 공부할 김여주다. 여주. 앞으로 나와서 친구들한테 인사하자.”
과한 환대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여주가 쭈뼛대며 교탁 앞에 섰다. 어젯밤에 열심히 준비하고 연습한 대사를 속으로 되뇌이며 겨우 고개를 들고 교실 안을 휘 둘러보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긴장으로 얼굴이 굳은 채였다.
“안녕하세요. 김여주라고 합니다,”
굳은 얼굴로 이름만 뚝 말하고 끊긴 자기소개에 반 안에 어색한 정적이 돌았다. 어, 어..다음 내용이 뭐더라. 뒷자리에 있던 변백현과 눈이 마주치자 김여주 머릿속이 백짓장이 됐다. 급히 눈을 교탁에 내렷다. 그냥 놀라서 눈을 깐건데 거기에 자리 배치표가 있었다. 책상 배치대로 만는 표와 방금 눈 마주친 맨 뒷자리 칸엔 변백현. 잘못 본 거겠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려던 김여주는 의도치 않게 확인사살을 당하자 더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 그러니까, 낯을 많이 가리고, 부끄럼이 많고, 표현을 잘 못하고, 어제 준비한 수많은 말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도 표현을 못하고 부끄럼을 타서 처음에 말하지 않으면 모를거라, 꼭 말하고 더 친하게 지내보려고 했는데, 망했다.
“저기...끝났니?”
"아, 네? 네.."
더이상 과한 시선을 받고 있는 건 너무 부담스러워서 김여주는 차라리 포기를 택했다. 남학생들은 오, 하며 도도하다며 시크하다며 난리였고 여학생들은 그저 이 칙칙한 반에 또 한 명의 여학우가 늘어서 기뻤고 그저 여주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술렁대는 아이들 사이 책을 읽던 변백현은 김여주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 코웃음을 픽 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정내미 하나 없는 저놈의 성격은 여전하구만.
학젤웃선생의 지시로 남학생 둘이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들어 가져온 김여주 몫의 책걸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변백현의 옆자리에 놓였다. 왜냐하면 변백현은 맨 뒤에 짝 없이 혼자 앉아 있었거든.
“넉살 좋은 변백현이 옆자리라 다행이네. 친하게 지내고. 여주는 궁금한 거 있으면 옆에 짝한테 물어봐라. 백현이 네가 여주 좀 챙겨. 쌤은 간다. 이따 보자 얘들아.”
김준면은 둘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저 할 말만 던져놓고 휙 나갔다. 나가는 길에 아재는 물론 조상님들도 안치실 저만 재밌는 썰렁한 드립으로 반 온도를 약 3도 정도를 내려놓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여간 인간 에어컨이다. 안그래도 빵빵한 에어컨 덕에 추운 반 공기를 더 내려놓은 김준면 덕에 교실이 꽁꽁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면역이 전혀 안 되어있어 속으로 경악하며 온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김여주가 팔을 쓱쓱 문질렀다. 책만 보고 있는 것 같던 변백현이 담요를 김여주 책상에 휙 던졌다. 김여주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담요를 보았으나,
“돼, 됐어. 안추워.”
“그럼 내놔.”
새침한 거절의 말에 허, 웃은 변백현이 담요를 도로 가져갔다. 괜히 줬다가 쪽만 썼네. 그래도 옛 친구고 다시 친하게 지내보자 하는 마음에서 큰 맘 먹고 먼저 말 걸었더니만. 하여간 김여주 성격은. 에휴. 못 써, 못 써.
눈치 없는 변백현은 예나 지금이나 김여주의 마음을 몰랐다. 부끄러워 다 거절하고 보는 김여주의 성격도.
한편 김여주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변백현이라니. 엄청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는데 엄청 인사하고 싶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모른 체 하고 떨어져 지내 반갑다는 인사는커녕 안녕, 두 글자도 못 꺼냈다. 눈 마주친 순간 그리 연습한 자기소개마저 다 까먹어버렸으니 말 다 했지, 뭐.
추워서 오들오들 떠는 저에게 던져준 담요가 너무 고맙고, 좋았지만 당황에 부끄러움에 그만 거절하고 말았다. 내 입은 왜 이 모양이야... 내 맘대로 움직여주는 날이 없어요, 아주!
***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