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풍난양
화창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
“너 그 얘기 들었니? 오늘 박대감댁에 태어난 따님 말이야 태어나실 때 눈물 한 방울 스스로 안 흘리시더래”
“맞아 맞아 그 집 종이 겨우 울렸대 그리고 손목에 웬 붉은 띠가 있었다며?”
“뭐? 그게 정말이야?”
“그렇대 왜 그런거 있잖아 인연의 붉은 실처럼 말이야”
“아맞다 그것도 그런데 말이야! 내가 아까 어떤 도련님이랑 부딪혔는데 말이야
글쎄 그 도련님이 가지고 계신 부채로..”
저잣거리 한 구석에 몇 계집종들이 모여 앉아 저마다 오늘 들은 이야깃거리를 풀어놓는다.
역시나 가장 큰 화제는 아마 박대감댁 이야기
부채 한 개를 들고 호들갑을 떠는 여럿들 사이로 노파 한 명이 지나간다.
노파는 천천히 사람들이 많은 대로로 나선다.
몇 걸음 가지 않고 노파는 돌아서서 장터 한 구석에 걸려 있는 치맛집으로 향했고
한참 뒤 나오는 노파의 손엔 쓰개치마 한 벌이 들려 있다.
“계시오”
작지만 결코 희미하지 않은 노파의 목소리가 좁은 문틈으로 흘러들어 간다.
“뉘시오”
“내가 이 집 대감마님께 꼭 드릴 말이 있소”
“장사치요?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괜히 화를 입소”
“가서 대감마님께 전하시오 해를 가라앉히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당장 내 말을 들으시라고”
박대감이 누구인가 그래도 내로라하는 충신 중에 한명인 사람
나라님인 해를 가라앉힌다니 이게 무슨 망언인가하여
박대감은 말을 전해들은 곧장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당신은 누구기에 그런 망발을 하는가 하늘이 무섭지 않는가”
“망발이 아닙니다. 오늘 태어난 아기씨 손목에 붉은 자국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것은 알아 무엇 하려고 하는가”
“울지도 않고 태어나신 것이 사실입니까”
“자네 무엇 하려고 그러느냐고 내가 묻지 않았나!”
“아기씨가 3살이 될 때까지 해가 떠 있을 때엔 방문 밖에 내보내지 마소서
그리고 그의 6배가 되는 해까지 해가 있는 때에 집 밖으로 걸음하지 못하게 하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달이 해를 잡아먹습니다. 대감마님“
박대감의 얼굴엔 당혹감과 함께 온 그림자가 드리운다.
생전 처음 본 노파의 말에 자신에 하나 있는 여식을 방에만 집에만 가둬두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면 나라님에 대한 악담을 듣고도 여식을 챙겨야 하는가.
노파는 박대감의 눈을 마주한 채 붉디붉은 쓰개치마를 넘겨준다.
“집 밖을 향한 첫 발은 이것과 함께하도록 해주십시오.
달이 해를 가리는 것을 막아주고 해가 달을 숨기는 것을 막아 줄 것입니다”
망연히 쓰개치마를 바라보던 박대감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파가 서 있던 자리엔 붉은 실오라기만이 남아 있었고
꿈이였던가 혹은 환각을 본거라 생각해보지만 박대감의 손엔 붉은 쓰개치마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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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해가 졌니 순영아”
“아직입니다 제가 해가 지면 말씀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까도 곧 진다고 그랬잖아..”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곧 부를테니”
창에 드는 햇빛이 조금씩 줄어드는 이시간 쯤이 되면 여주는 언제나 순영이에게 재촉을 하게 된다.
“순영아아-”
“알겠어요.신을 가져다 드릴 테니 단단히 여미고 나오세요 날이 춥습니다.”
걱정 해주는 순영이의 말에 버선까지 단단히 여미고 나면
그는 여주의 방문에 단단히 걸어져 있던 자물쇠를 풀어주고 신을 가져다준다.
늘 그랬든 언제나 그래왔듯
여주의 발걸음은 뒷마당 화원으로 향하고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사람은 순영이다.
“그게 그리도 예쁩니까 제가 보기엔 늘 똑같은 풀 같습니다.”
매일 해가 지면 여주가 하는 일은 꽃을 가꾸는 일이다.
밤새 여주가 돌보아주는 꽃들은 여주가 없는 낮에 해의 보살핌을 받는다.
“꽃은 언제 보아도 예쁘잖아 빛 없이도 이리 예쁜데 낮에 보면..”
“새로운 임금님 행차가 언제라고 하였지?”
“아마 나흘밤 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나..젊은 임금이 조정에 고인 물들을 모두 흘려보냈으면 좋겠구먼”
“말조심하세요 도련님 큰일납니다”
“내가 실수했나보다 하하-”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사내들의 대화
꽃을 바라보던 여주는 벌떡 일어나 순영이에게 활짝 웃으며 물어본다.
“순영아 들었어? 임금님 행차래!”
“나흘 후라고 하더군요”
“알고있었어?그럼 나 그날!..”
“안됩니다. 6배 잊으셨습니까”
“하지만 내 생일도 다섯 밤밖에 안남았어..”
“그럼 하룻밤만 더 참으시죠”
“그때엔 임금님 행차가 없잖아!
너가 임금님께 하룻밤 더 참으라고 해주던가”
“아가씨! 대감마님께 허락받으세요 그럼 나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잘도 허락 해주겠다 아버지가”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주저앉아 꽃만 만지작거리는 여주햇
“나도 낮에 나가보고 싶어
빛을 담은 꽃이 얼마나 예쁜지 보고 싶고
도대체 집밖은 어떤 곳인지 꼭 잠긴 대문을 열고 한걸음이라도 나가보고 싶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그 할머니 때문에 내가 왜 그렇게 갇혀 있어야 하는거냐고!”
결국 여주는 주저앉아 치마폭에 고개를 묻는다.
“일어나세요 흙이 묻습니다”
“괜찮아”
눈물을 머금은 그녀의 목소리
“일어나 화내기 전에”
흔들리던 여주의 어깨가 내려앉고 여주가 고개를 든다.
어깨와 달리 물이 가득 고인 여주의 눈
“왜..왜...화를 너가 내는거야?”
결국 여주를 더 울리고 마는 순영이였다.
"그리고 너 나랑 10년 넘게 봤다고 말 막 놓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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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이 시끄럽다.
오늘이 나흘 밤이 지난 임금님의 행차가 있는 날인가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아직 해가 중천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방 한구석에 놓던 수를 던져버린다.
그리고 그 위에 걸려있는 붉은 쓰개치마
“아가씨 점심 드실 시간이에요”
처음보는 어린 아이가 자물쇠를 열고 들어온다.
그녀가 집 밖을 나설 기회는...
.
.
.
지금이다
“아이야 내가 어제 화원에 가락지를 두고 온 듯 한데 혹 찾아봐 줄 수 있니?
많이 아끼는 것인데 지금 당장 확인해 봐주면 안될까?”
아이는 제게 말을 걸어오는 여주를 보고 놀라 대답한다.
“네?네..!당장 가볼게요!”
태어나 햇빛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여 하얗고 하얀 피부
그리 붉지 않지만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발그레한 볼과 입술
그리고 제게서 상을 받아드는 손에 선명한 붉은 자국
아이는 선녀가 있다면 저런 모습 일거라 생각하며 화원으로 달려 나간다.
자물쇠를 잠가야 하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로
여주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쓰개치마를 두르고 방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신도 찾지 못하여 버선발로 담을 넘는 그녀
결국 오른쪽 버선에 피가 스며든다.
난생 처음 쬐는 햇볕
피가 나는 오른발
어느 하나 신경 쓸 겨를 없이 그녀는 무작정 사람들 틈으로 들어간다.
그래 그 할머니 말이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하루쯤 일찍 나간다고 세상이 무너지겠어?
생각보다 더 시끄럽고 정신없는 틈
집 밖에 나와본 적이 없으니 저잣거리는커녕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여주무
작정 사람들이 향하는 곳 그 곳으로 그녀는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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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너는 뭐하는 놈이냐!
여자아이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여 이 사단이 나게 해!”
소리치는 박대감 그리고 그 앞엔 입술이 터진 순영이 서 있다.
“당장 찾아서 데려오너라. 그 후에 내가 너를 어찌할지 생각해보마.
당장 그 아이를 데려와!”
순영이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을 매만지며 집을 나선다.
“길도 모르는 애가 혼자 어딜 간 거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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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 떠 있던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 이제는 긴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하늘 한 편에선 달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낮에는 그저 많구나라고만 느꼈던 사람들도 이제는 길을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거리를 메웠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임금님 납시오!”
길 끝 어디에선가부터 풍악이 들리고 임금님 만세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하나씩 바닥에 엎드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허리를 숙인다.
여주는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여인들을 보며 대강 행동을 따라 하려고 노력한다.
풍악 소리도 여주의 눈도 조금씩 커진다.
이제는 그다지 멀어보이지 않는 거리에 임금님이 계신다.
쓰개치마 사이로 보이는 임금님의 풍채는 한눈에 보아도 아주 대단했다.
여주와 달리 조금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지만
또 여주와 비슷하게 아주 검은 흑발을 가졌다.
작고 왜소한 여주와 달리 어깨도 넓고 듬직한 덩치를 가졌지만
또 여주와 비슷하게 아주 맑은 눈을 가졌다.
웃지 않을 때 차갑고 무표정인 여주와 달리
그는 입꼬리에 웃음을 가졌다.
왕이란 사람은 그렇게 아주 대단해보였다.
쓰개치마 사이로 둘의 시선은 부딪힌다.
둘 사이의 방해물이 미웠던지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쓰개치마를 바람은 걷어버린다.
왕의 가마의 가림 발을 바람은 걷어버린다.
허리춤에 찬 칼에 서린 걱정을 바람은 걷어버린다.
누군가가 흔들던 부채에 담긴 흥미로움을 바람은 걷어버린다.
몇 명의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을까
꽃을 향한 벌과 나비는 과연 몇 마리였는가.
바람에 흔들리던 꽃은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