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여기가 한국도 아닌데 떡을 돌리긴 왜 돌려?"
"그냥 예의잖아, 예의. 안면 터서 손해 볼게 뭐가 있어?"
"아니, 아빠. 안면은 터도 이상하게 본다니까? 여기 한국 아니라고!"
"설거지 오늘 니 차례지? 아빠가 대신해줄게. 갔다 와."
"콜"
미술을 하는 아빠를 위해 우리 집은 매년 이사를 갔다.(아빠 말론 그림의 영감을 위해서라 했다.)
'내년엔 꼭 해외로 가자' 매일 말만 하다 올해 드디어 미국에 발을 디뎠다.
기대반 걱정반. 아니, 사실 걱정이 조금 더 했던 것 같다.
한국에선 아빠와 딸, 둘만 같이 산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많이 도와주신다.
동네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 집을 제일 먼저 챙겨주셨고, 매일 밝게 인사해주셨고, 가끔 저녁밥도 챙겨주셨다.
내가 그분들의 도움 없이 잘 살 수 있을까. 엄마 없이 타지에서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까.
그래도 변함없는 아빠의 모습에 조금 안심이 됐다.
/똑똑/
.
.
.
/똑똑/
.
.
.
"아무도 없나?"
엉기적거리며 약 1분정도 걸어가니 큰 집 하나가 떡하니 서 있었다.
몇 번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길래 다시 집으로 가려는 순간, 어떤 남자가 내 등 뒤에 서있었다.
'댁은 누구길래 남의 집 문을 그렇게 두드리냐' 하는 표정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이 집 주인..."
"네, 근데 누구시죠?"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초면에 '떡 돌리러 왔는데요.'라고 말하는 건 정말 아아아아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돌아가기엔 내가 너무 대놓고 노크를 했고, 대놓고 떡 접시를 들고 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애꿎은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저희 집에 볼 일 있어서 오신 거 아니에요?"
"볼 일... 어... 그랬나...?"
"아, 혹시 그거.. 떡 돌리러 오셨어요?"
"네? 네,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있었다.
아빠가 너무 원망스러웠고, 설거지하나에 굴복한 나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그때 옆집 남자가 엄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국에서 떡 돌리러 오는 이웃이 흔하진 않지.
웃느라 정신없어 보이긴 했지만 중간중간 고마워요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난 더 뻘쭘하고 창피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난 그저 떡을 돌리려던 것 뿐인데.
그 남자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눈가를 쓱 닦더니 '아 웃기다'라고 말을 뱉었다.
"첫인상이 아주 강렬하네요."
"뭐, 뭐가...."
"떡 진짜 오랜만이다. 일단 들어와요.'
"예? 어디를요?"
"떡 접시는 되로 가져가셔야지. 다시 오실라고? 괜찮겠어요?"
그 남자분은 문을 열어주시곤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셨다.
그래, 노란색 트레이닝복에 동그란 안경까지 쓰고 떡 돌리러 온 주제에 다시 오긴 뭘 다시 와.
창피해서라도 다신 오고 싶지 않다.
심호흡을 한 번하고 생전 처음으로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갔다.
**
막상 들어와 보니 우리 집과 그렇게 다른 점은 없었다.
굳이 문제 될 걸 뽑자면...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나?였다.
그 남자분이 떡을 옮겨 담을 동안, 난 작은 소파에 앉아 생전 처음 보는 넓은 집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를 흘겨보는데 티비옆에 익숙한 그림이 걸려져있었다.
더 가까이서 보니 우리 아빠 그림인 것 같았다.
그때 남자분이 깨끗한 접시를 건네주며 말을 걸어왔다.
"그림 좋아해요?"
"어... 관심은 많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에요. 그래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뒀어요."
옆에서 그림 자랑을 너무 많이 하셔서 아빠 그림이라고 말하기 무안했다.
뭐, 꼭 말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알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그나저나 이 분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 걸까.
혼자서 이 넓은 집에, 우리 아빠 그림까지. 뭐가 어찌됐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남자분이 시원한 음료 한 잔을 주시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난 어색한 분위기에 더더욱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 입술 깨무는 거.. 습관이에요?"
"네. 잘 고쳐지지가 않네요."
"어? 입에 피나요."
남자분이 깜짝 놀라셔선 몸을 내 앞으로 기울이셨다.
나 역시 깜짝 놀라서 턱을 뒤로 댕겼다.
남자분은 '얼마나 세게 깨물었으면 피까지 나요?!'라고 말하며 연고를 가져오셨다.
난 건네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어, 됐어요. 나 이래 봬도 의사니까. 연고 발라주는 의사 드물어요."
"괜찮아요. 저 혼자 할게요."
"거 참. 이상한데 안 바를 테니까, 걱정 마세요."
"아니, 딱히 안 발라도 될 것 같은...."
남자분은 금세 내 앞 낮은 테이블에 앉아 연고를 발라주셨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팔은 무슨 태권도 하는 거 마냥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연고를 발라주는 와중에도 입술이 계속 입안으로 들어가 남자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또 깨물면 어떡해요? 웃기는 사람이네, 진짜."
"아 그러니까 저 혼자 할게요."
"됐다니까. 혼자 하려면 거울도 필요하고, 가져오기도 귀찮고."
".......... 어색해서.."
"뭐가요. 의사한테 진료받는 건데 뭐가 이상해."
"아니, 뭐, 그렇네요. 하하."
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어색한 웃음만 내보였다.
이 분 아까부터 묘하게 계속 날 놀리는 거 같단 말이지.
연고 하나 바르려고 의사 된 거처럼 연고에 집착했다. 연고 성애잔가 싶을 만큼.
별 힘든 것도 아닌데. 진료라 할 것도 없는데. 본인이 더 웃기는 사람같구만.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진짜 떡 이 웬수야.
"다 됐다. 연고 다시 먹지 마요."
"네... 감사합니다."
"뭘.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게요?"
"네? 뭐, 뭐가."
이놈의 얼굴은 감추질 못해. 남자 못 만나고 다닌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남자분은 연고를 제자리에 넣어두려다 말고 다시 내 앞 테이블에 앉으셨다.
그러곤 내 이마와 본인의 이마를 동시에 짚으셨다.
난 또다시 이마를 뒤로 빼고, 애써 바른 입술을 깨물었다.
"열나나? 음... 아닌 거 같은데..."
"열 안 나요. 저 안 아픈데, 건강한데.."
"근데 어떻게 얼굴이 이렇게 빨갛지?"
난 너무 가까운 남자분의 얼굴을 견디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났다.
오늘 처음 봤다기엔 너무 스스럼없는 이 남자가 너무 당황스러웠다.
"가, 가봐야겠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누가 봐도 어색한 말투로 현관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남자분도 따라 일어섰다. 그러곤 내 등 뒤에서 소리쳤다.
"잘 가요! 다음에 또 볼 수 있음 꼭 보고."
"안녕히 계세요!!!!"
난 뒤돌아 90도로 꾸벅 인사했다. 그러곤 바로 휙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슬쩍 뒤돌아보니 남자분이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셨다.
가벼운 목례를 하곤 집으로 향했다. 정말 다신 안 봤으면 좋겠다.
아빠가 왜 이리 늦어냐고 하면 또 뭐라 하지. 오늘 하루 조용하게 살긴 그른 것 같다.
찝찝한 마음을 안고 우리 집 문을 여는 데 문득 어떤 그림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흰 접시......?
"아... 접시 두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