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이를 처음 만났던건 그러니까 우리가 딱 7살이 되던 해였다. 나는 어느 때와 다름 없이 친구와 놀이터 한 구석 모래사장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래성이랍시고 멋지게 쌓으며 놀다가 미끄럼틀을 타러가자는 친구 손에 이끌려서 신나게 달려갔다. 미끄럼틀 앞에 서서 딱 내려가려던 순간, 모래사장 쪽으로 뻥하고 축구공을 차려는 나보다 3살쯤 많아보이는 소년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멈춰 그 축구공을 바라보았고 불행히도 공은 내가 쌓아놓았던 모래성을 정확하게 치고 지나갔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에 놀라서 미끄럼틀을 차마 내려가지도 못 한채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 딴에는 이런 일로 울지 않겠다고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는데 그 참혹해진 모래사장으로 한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멀리서 보기에는 키는 나보다 작아보였고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리던 동그란 뒷통수가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튼 그 아이는 쪼그려앉아서 한참이나 꾸물거리더니 이내 아까의 그 모양대로 다시 모래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작품이 뿌듯했는지 헤- 하고 웃고는 다시 쫄래쫄래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나는 서둘러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서 그 모래성을 봤는데 내가 만든 것보다 훨씬 멋있고 훨씬 더 튼튼했다. 뜻밖의 선행에 감동을 받은 나는 다음날부터 모래사장에서 그 남자아이를 기다렸고 그로부터 딱 5일째 되는 날, 그 때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모래성을 쌓고있는 그 아이를 발견했다. 나는 그 아이를 발견하자마자 달려가서 마찬가지로 옆에 쪼그려앉았고 아이는 무척이나 큰 두 눈을 꿈뻑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던 그 때의 내 말은, 앞으로의 내 인생을 바꿔놓을 하나의 크나큰 사건이었다. " 안녕. " " ... " " 너 진짜 착하다. 귀여워. " " ...어? " " 우리 친구하자! " 나는 뭐가 그렇게도 좋다고 실실 웃었는지. 내가 부끄럼도 없이 손을 건넴으로써, 그 아이가 따라 웃으며 내 손을 잡음으로써, 우리가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됨으로써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이 김태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렇게 김태형과 나는 친구가 되었다. 연애학개론 01 : はじめまして。[ 처음 뵙겠습니다. ] w. 태꿍
" 다녀오겠습니다! " 아이씨, 김태형 때문에 또 지각하게 생겼다. 아무리 백날천날 꼭 같이 가자고 하면 뭐 어쩌냐고. 깨워도 일어나지도 못 하면서. 덕분에 오늘도 한참이나 일어나네, 못 일어나네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에 혼자 집에서 뛰쳐나왔다. 계속 그러고 있다가는 김태형이나 나나 둘다 꼼짝없이 지각신세가 뻔하니까. 태형이가 나보고 혼자 가지 말라고 숨겨놓은 자전거를 찾아 꺼내서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걸 이렇게 두고는 또 숨겼다고 좋아라했겠지. 하여간 못말리는 그 단순함에 고개를 젓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잘 달리던 자전거가 급격하게 느려지다가 결국 제자리에 멈춰선 것이었다. " 이건 또 왜 이래. " 황당한 상황에 자전거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이 사태의 원인을 찾아냈다. 얼마 전 갑자기 내리던 비를 쫄딱 맞은 후로 체인이 녹슬어서 안 그래도 불안했는데 결국 그 자전거 체인이 말썽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인건지, 아무래도 꼬여도 단단히 꼬인 듯 했다. 결국 오늘도 지각이구나. 김태형 때문에 요 며칠 간 낙인된 지각자 신세를 좀 모면하는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가슴 저 깊은 곳부터 올라오는 긴 한숨을 내뱉고 결국 자전거를 끌고가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큰 손이 자전거를 잡았다. 그리고는 단번에 자전거를 눕히고 그 앞에 쪼그려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소년에 놀라 잡고있던 자전거를 뺏긴 그 상태로 멍하게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쪼그려앉아 뭘 하는가 싶었는데 어느덧 꽤나 능숙한 솜씨로 꼬인 체인을 풀어냈다. 소년은 다시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나에게 건네주었고 그제야 나는 그 소년과 내가 같은 교복을 입고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우리 학교면 내가 모를리가 없는데. 와, 근데 진짜 잘생겼네. " 아, 가, 감사합니다. " " ... " " 정말 큰일날 뻔 했거든요. 오늘도 지각하면 연속 3일째라... 도와주셔서 정ㅁ, " 어찌 되었던 고마운 마음에 중얼중얼 인사를 하다가 문득 입을 틀어막았다. 아, 이게 아닌데. 하여튼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스스로 자책을 하고 다시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소년은 내 말은 들은 척도 안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챙겨 저멀리 걸어갔다. 뭐야, 생각보다 싸가지가 없네. 어, 그래도 생판 모르는 사람도 도와줬는데 그건 아닌가. 혹시 모르니 이름이라도 봐둘걸 그랬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다시 산뜻해진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향해 달렸다. " 와, 진짜 상처상처 대상처다. " 간신히 지각을 면하고 자리에 앉아서 가방정리를 하고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란스러운 교실을 뚫고 익숙한 목소리의 한국말이 들려왔다. 그래, 여기에 이렇게 말할 사람이 어디 너 말고 또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며 여전히 투덜거리면서 어느샌가 내 옆자리에 앉아 짐을 꺼내고있는 김태형에게 대단한 마음이 들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 대단하다. 어떻게 일어났어? 언제 왔어? " " 너 가자마자 바로 일어났거든. " " 그렇게 제발 좀 일어나서 가자고 할 때는 꿈쩍도 안 해서 나까지 지각을 시키더니 혼자 두고 오니까 또 잽싸게 와서 지각도 안 하고. " " 이게 다 너 괘씸해서 그런거야. 내가 같이 가자고 했지! " 이러다가는 또 지난번에 청소하는걸 기다려주지 않아 이틀 내내 거하게 토라졌던 상황이 반복될 것만 같아 미안하다는 말로 대충 풀어줬다. 그랬더니 내 항복에 묘한 승리감이 들었는지 또 샐쭉 웃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 너 달리기도 못 하면서, 뛰어왔어? " " 아니, 자전거 타고왔지. " " 뭐야, 내가 숨겨놨는데 어떻게 찾았어? " " 그게 숨긴거야? 대충 둘러봐도 딱 보이더만. " " 와, 역시 すごいね! [ 대단해. ] " 태형의 입에서 뜬금없게도 일본어가 튀어나왔지만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곳은 일본이기 때문에. 태형이와 나는 일본에 살고있으며 또한 우리는 일본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 학교에 다니고있는 한국인은 태형이와 나 딱 둘 뿐이었다. 그래서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리면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김태형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태형이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왔고, 나는 그보다 1년 뒤인 고등학교 1학년 가을에 일본으로 왔다. 7살때 그렇게 만난 이후로 김태형과 나는 정말 친해졌다. 솔직하게 가장 친한 친구를 말해보라면 같이 놀던 여자애들을 다 제끼고도 김태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만큼 친했다는 말이다. 그런 태형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고 믿을 수 있었던 김태형이 어느날 나에게 말했다. " 나 이사 가. " " 어? " " 일본으로. " 정말이지 그 순간에 내 멘탈이 멀쩡했을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서 당연히 고등학교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같이 갈 줄 알았던 태형이가 이사를 간다고 선언했는데 내가 멀쩡했다면 그게 이상한거다. 게다가 한국에 있는 어느 지방도 아니고 일본으로. 세상에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뛰어와서 펑펑 울었다. 하루 종일을 펑펑 울고 다음 날에는 학교도 안 갔다. 태형이가 그걸 보고 내 걱정 좀 하라고. 울다가 쓰러진건 아닐까 나를 걱정하고 미안해하다가 결국 일본에 안 간다고 말하게 하려고. 그런데 그 다음 날 우리 집에 찾아온 태형이 한 말은 애석하게도 그게 아니었다. " 미안해. " " ... " " 빨리 못 말해서 미안하고 통보하듯이 말해서 너무너무 미안한데, " " ... " " 나 이사 가야돼. " 그 날 이후부터 태형이 이사를 가던 날까지도 나는 단 한번도 태형이와 눈을 마주치지도, 말을 섞지도 않았다. 괘씸하고 서운한 마음 반, 태형이를 보면 그냥 울어버릴 것 같은 마음 반. 어쨋든 태형이 공항으로 가던 그 순간까지 나는 배웅을 하러 가지 않았고 태형이는 우리 엄마에게 편지 하나만을 남겨둔 채로 그렇게 정말 일본으로 떠났다 절대, 죽을 때까지 절대 열어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편지는 태형이가 떠난 바로 그 다음 날에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읽어내려갔다. 미안하다는 내용과 나 없이도 잘 지내라는 내용이 주를 이뤘지만 편지 마지막에 적힌 나중에 꼭 놀러오라는 그 한 문장이 내겐 가장 뇌리에 박혔다. 그래서 나는 첫 여름 방학을 하자마자 일본으로 떠났다. 무슨 베짱이고 용기인지 엄마 아빠 아무도 없이 김태형만을 믿고 홀로 일본으로 향했다. 다행히 탈 없이 태형이를 잘 만났고 태형이네 아줌마와 아저씨가 잘 맞이해주셔서 일본에서의 여행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꿀같던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였지. " 나 일본 갈래. " 어느 때와 같이 평화롭던 우리 가족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큰 폭탄선언을 했지만 잠시 멈칫하고 말던 엄마와 아무 반응도 없었던 아빠는 내 말을 너무나도 무색하게 만들었다. " 갔다왔잖아, 얼마 전에. " " 여행 말고. " " 그럼? " " 유학 갈래. 아니, 아예 거기 가서 살래. " 그 날 그 식탁에서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을 한 다섯대 쯤 맞은 걸로 기억한다. 아닌가, 그보다 더 맞았나. 아무튼 그럼에도 내 고집은 확고했다. 한번 놀러간 일본이 나는 너무너무 좋았고 그 곳에 태형이가 있어서 더 좋았다. 돌이켜보자면 사실 그 무렵에 나는 태형이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김태형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서, 못 보면 죽을 것 같고 그래서. 어쩌면 그런 이유들 때문에 이 무식하고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는게 가능했겠지. 나의 이 선언은 국제전화를 타고 흘러 빠르게 태형이에게도 전해졌다. 어찌나 빨랐는지 그 날 저녁 먹은게 다 소화되기도 전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을 정도엮다. 태형이는 내게 정말 사실이냐고 물었고 당당하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나는 꿀릴게 없었다. 내 일본행에 태형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태형만이 그 전부는 아니었기에. ' 안돼. ' " 왜? " ' 너 여기 오면 친구 없잖아. ' " 너 있는데? 그리고 너도 친구 없었잖아. 나도 너처럼 친구들 잘 사귈 수 있어. " ' 너 일본어도 못 하잖아. ' " や日本語よくして。[ 나 일본어 잘해. ] "
수년간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쌓아온 일본이 실력이 애석하게도 태형이보다 더 훌륭했기에 태형은 그만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태형이도 꺾지 못한 내 고집에 엄마와 아빠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고 나는 그렇게 중간고사가 끝날 무렵 다시 혼자 일본으로 향했다. 엄마가 나의 일본행을 허락한 첫번째이자 동시에 마지막 이유인 김태형 덕분에 내가 지내는 곳은 태형이네 집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집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잠만 거기서 잤다 뿐이었지 사실상 놀고 먹는 것은 다 태형이네 집에서 했다. 아줌마와 아저씨가 너무 좋은 분이셔서 다행히도 1년이 넘는 시간동안의 내 일본 생활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태형이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공부와는 거리가 좀 멀었다. 할 줄 아는건 신나게 놀고 먹고 자는 것 뿐이었던 우리가 불행 중 다행히도 잘 할 줄 알았던 것은 그림이었다. 그래도 우리 둘 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태형이는 좀 천재적이게 잘 그렸다. 예술적 감각은 타고난다는 말이 뼈저리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아무리 연습을 해도 태형이보다는 잘 그리지 못 했다. 가끔은 서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태형이를 옆에서 쭉 보다보니까 인정이 되었다. 김태형은 그림을 그릴 때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진지했으니까. 어쨋든 그래서 태형이와 나는 현재 일본의 한 예체능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다. 태형이가 먼저 다녔고 내가 전학을 온 이 학교는 처음에는 그냥 예술 고등학교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축구, 유도, 야구, 수영 등 운동까지도 같이 하는 학교였다. 아무래도 이 근방에 예체능 학교가 없고 꽤 큰 학교이다 보니까 우리 학교에는 꽤 다양한 국적이 있었다. 중국인, 미국인, 캐나다인, 인도인 그리고 프랑스인까지. 여러 나라 사람들이랑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고 즐거웠지만 한국인이 김태형과 나뿐이라는 것은 어쩐지 좀 서운한 일이었다. 워낙 애들마다 하는 전공이 다르다보니까 속해있는 반이 있어도 그 개념이 좀 무색했었는데 어제는 어쩐 일인지 담임 선생님이 내일 조회 시간에 빠지지 말라며 반 아이들에게 엄포를 놓으셨다. 이런 날 지각이라도 했으면 아주 된통 찍힐뻔 했는데 태형이도 나도 늦지않고 책상에 얌전히 잘 앉아있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 그 놈의 스고이는 진짜. 솔직히 너 할 줄 아는거 스고이밖에 없지? " " 아닌데. " " 대체 너는 왜 일본어가 늘지를 않아. 나보다 1년이나 더 살았으면서. 신기하다 정말. " " 어허- 말 돌리지 말고. 너 앞으로 그 자전거 타지마. 알았지? " 태형이는 이상하게도 내 자전거를 참 싫어했고 지금도 싫어한다. 내가 자전거를 탈 때마다 본인을 혼자 두고 간다고 생각하는게 첫번째 이유였고, 자전거에 뒷자석이 없어서 자기가 나를 태우고 다닐 수가 없다는게 어이없는 두번째 이유였다. 그래도 내가 자전거를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알바를 해서 번 내 돈으로 산건데. 일본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는게 내 오랜 로망이었다는 것을 태형이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 싫어. 내 자전거야. " " 타지 말라면 타지마. " " 알았어. 자전거 타도 너 안 두고 갈게! 그럼 됐지? " " 그거 참 감사하긴한데 그거 말고 자전거 체인 때문에 안돼. " " 어? " " 전에 보니까 녹슬어서 끼익거리고 금새 꼬일거 같더라. 그러다 사고 나. " 그건 또 언제 봤대. 별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태형이의 전에 없던 세심함에 좀 놀랐다. 뭐, 그런 이유라면 일단은 인정. 아무래도 당분간 자전거는 수리점에 맡겨야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걱정이 많은 겁쟁이 친구를 위해서. 그러고 보니까 아직 아침에 체인 꼬였었던거 얘기를 아직 안 해줬다. 또 엄청 놀라겠지. " 안그래도 아침에 체인 꼬였었어. " " 뭐? 진짜? 너 안 다쳤어? " " 응. 느낌이 이상하길래 내렸지. 근데 누가 도와ㅈ... 아! " " 어? 왜? " " 야야야, 나 아침에 우리 학교 교복 입은 애 봤는데! " " 근데? " " 근데 완전 한국인처럼 생겼어. 아니 그냥 완전 한국인이야! " 짧은 찰나였지만 소년과 눈이 마주쳤던 순간 얼굴을 제대로 보긴 봤다. 일본인 얼굴도, 중국인 얼굴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누가봐도 한국인 얼굴이었다. 이건 한국 사람으로서 느껴지는 촉이었다. 그래서 놀랐고 정말인가 확인하고 싶어서 말이나 걸어보려고 했는데 틈도 안 주고 쌩하게 가버렸다. 싸가지인듯 싸가지아닌 싸가지같은 그 소년은. " 이름이 뭔데? " " 몰라. " " 우리 교복 입었다며? " " 응! " " 우리 학교 한국인인데... 우리가 모른다고? " 아, 그러네. 하긴 그러고보니 주변에서 아무 소리도 못 듣긴 했다. 학교에 또 다른 한국인이 있으면 우리가 제일 먼저 알게 될텐데. 그럼 한국인이 아닌건가. 태형이랑 나 말고도 이 곳에 다른 한국인이 있다는 생각에 잠시 설레었는데 김태형의 너무나도 현실적인 말들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비눗방울처럼 둥글게 떠오른 내 설렘들을 금새 펑- 하고 터뜨려버린 기분이었다. " 아쉬워? " " 어? 아니, 그냥... " " 괜찮아. 그래도 다른 좋은 친구들 많잖아. " " 응! 맞아. 한국인 친구는 너 하나면 됐지, 뭐. " " いいえ。私は日本人だよ。[ 아니. 나는 일본인이야. ] " " 죽는다. "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는 태형에게 꿀밤을 한대 먹여줬다. 태형이는 내 꿀밤에 꽤나 쎄게 맞았는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이마를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고있었는데 그 때 앞 문이 열리면서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뜻밖의 인물이 걸어들어왔다. 나뿐만 아니라 교실 속의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제야 태형이도 고개를 들어서 앞을 바라보았다. " 어? " 태형이가 두 눈이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까 만난 그 소년. 자전거 체인을 풀어주곤 사라진 아이. 선생님이 뭐라 말씀하셨지만 놀란 내 귀에는 그냥 중얼거림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에 나온 ' 전학생 ' 이라는 단어 외에는. 그리고 그 단어에 김태형이 호들갑을 떨었다. " 미친, 전학생이래. 대박. " 낯설었던 얼굴과 다르게 익숙했던 우리 학교 교복. 그제야 모든 것들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들어갔다. 전학생이었구나. 선생님이 뒤로 물러나시며 전학생에게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셨다. 그 아이가 한발짝 앞으로 나오자 웅성거리던 교실이 금새 조용해졌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고 잠시 주위를 살피던 아이의 눈과 내 눈이 딱 마주쳤다. 딱히 피할 이유는 없어서 피하지 않았는데 그랬더니 그 애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시작했다. " はじめまして。[ 처음 뵙겠습니다. ] わたしはかおるです。[ 나는 카오루야. ] " 간단한 자기소개였다. 한국인이라고 오해했던게 무색할만큼 완벽한 발음이었다. 아, 일본인이구나. 그래서 아까 내가 한국말로 말했을 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그냥 간건가. 어찌 되었든 왠지 모를 아쉬움에 실망하고 있을 무렵 옆에서 태형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 혹시 아까 말한 걔? " " 응. " " 엄청 한국 사람처럼 생겼는데 일본인이네. 의외다, 그치? " 그래. 태형이도 그런 생각을 한걸 보면 한국인의 촉이라는게 있는거 같긴한데. 혹시 그게 아니라 내가 너무 김태형이랑만 붙어다녀서 보는 눈까지 비슷해진건가. 어쨋든 신기하게도 태형이와 나는 어쩜 똑같은 생각을 하고있었다. 태형이 말에 대꾸를 하기 위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아직 끝나지 않은 목소리가 이어졌고 태형이에게로 바뀌려던 내 관심을 붙잡았다. " 그리고, " " ... " " 한국 이름은 전정국. " " ... " " よろしくおねがいします 。[ 앞으로 잘 부탁해. ] " 깔끔한 소개가 끝나고 반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내가 태형이에게서 다시 고개를 돌리자, 바로 전정국이라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정국이 살짝 미소지었다. 시끄럽게 들리던 반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 대박, 진짜 한국인이었어! " 정국의 미소가 눈에 담김과 동시에 격양된 목소리의 태형의 말이 귓가에 스쳤다. 아. 기분이 이상했다. 뭐가 어떻게 이상한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그랬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이 기류 속에서 우리의 관계가 마치 녹슨 자전거 체인처럼 꼬이기 시작했다.
카오루 : 좋은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