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픽션이며,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가 없음을 알립니다.▽
조선, 유월
00.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소리쳐도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서글픈 마음을 가득 담긴 꽉 찬 보름달이 떠오르던 날, 누군가가 침대 위에서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순간이였다.
그 밑에 떨어진 몇 가지 숫자들로써 상황은 쉽게 정리되었다. 떨어진 숫자들, 올리기 힘든 것들이 가득 담긴 의미들.
그리고 들려오는 큰 소리들이 방문을 타고 넘어와 누워있는 인영을 감싸들고 바늘로 콕콕 쑤셔대듯 아픈 부분만 골라 찍었다.
차라리 도망치고 싶어.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그렇게 수십번을 흐르는 눈물에 소망을 가득 담아 떠나보내었다.
별들아 달들아, 내 소원 좀 빌어주라 나 죽기전에.
다음 번에는 제발 나도 사랑받으면서 살아가게 해주라.
마지막으로 귓등을 훔치고 지나간 바람이 비웃듯 머리칼을 흩뜨리고 도망갔다.
이제 마지막이야, 두 눈을 감고서 마구 쿵쾅대는 심장을 무시하고 발바닥이 간지러워지는 허공에
두 발을 내밀었다. 질려버린 하얀 손이 창 틀에서 사라졌을 때에, 하얀 달이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다는 착각을 불어일으킬 정도로
눈물나게 밤하늘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01.
"호석이 형아야, 오늘도 백리향 이야기 해주세요!"
"지민이 너는 허구헌날 백리향 이야기만 뭣헌다고 들으라 하는가?"
"형아가 해주는 전설이 제일 재미있으니께 그러하지!"
어색하게 호석의 사투리를 따라하던 지민을 보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호석은 '이리와봐라'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굴며 한 쪽 팔을 내주었다. 이야기를 곧 해줄 터이니 지민이 신이나 좁은 이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새로 발리지 않은 얇은 창호지 사이로 귀뚜라미소리, 달빛도 호석의 조근조근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서 찾아온 날이였다.
하루 일과중에 지민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였다. 무서운 어른들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아이는 호석의 품 속에서
서서히 멀어져가는 음성 속에서 백리향은 뚜렷이 기억나는 이야기였다.
'6월달이 되어 달이 환하게 뜬 날, 높은 산 중턱에 올라가 숨어보면
요정의 왕이 한 여름밤에 모든 요정들과 같이 야생 백리향의 꽃밭에서 춤을 춘디야.'
'근데 그 요정이 참말로 이삔게 요고 백리향의 보랏빛을 꼭 닮았다고 허드래.'
천천히 졸린 눈이 감긴 지민의 마지막 상상 속에는 아름답에 저와 함께 춤을 추는 백리향과도 같은 요정이 서있었다.
02.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귀찮은 듯한 윤기의 목소리가 귓 등으로 넘어갈 때에즘, 태형이 튕겨나가듯이 정국의 방으로 뛰어갔다.
오늘 밤에는 궐 밖, 장터내에서 작은 축제가 있을거라고 했었다.
무용수들이 와서 춤을 추고 엿장수들이 와서 신기한 장난들을 치고 하는 작은 축제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단 것쯤을
윤기는 잘 알고 있었기에 모른척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궐 안의 축제가 더 컸지만, 자세를 바르게 잡고 근엄하게
축제를 바라보는 일이란 건 어린 아이들에게 지루하고 곤욕스러운 행사들 중 하나였기때문에,
매 해 여름마다 격식이 필요없는 이 축제를 더워지기 이 전부터 태형은 기다려왔다.
가지런한 이를 환하게 드러내고 웃는 아이를 보며, 저 세자꼬맹이가 붉은 곤룡포를 입는 상상이 쉬이 되지가 않았다.
잘 매듭지어지지 않은 옷을 여며주며 '어린 세자를 잘 데리고 다녀야 합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어차피 두 아이들만 내보낼 건 아니지만 윤기는 걱정이 되었다.
으레 이 나이 또래 아이들이 그러했듯이 툭 튀어나가곤 했었으니까.
03.
호석은 제법 춤을 맛깔나게 추고있는 지민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훌쩍 큰 아이는 더이상 밤마다
백리향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아이가 아니였다. 달 빛을 촛불삼아 매일 밤마다 궐 안에서 춘다던 처용무를 흉내내고 있었다.
궐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던 지민은 이제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 하고있었다.
일찍히부터 전국을 떠돌던 무용수들은 한양에만 머무르려는 지민과 몇 년 전에 이미 안녕하고 다들 흩어져있었다.
그런 지민이 마음에 걸려 같이 남은 호석은 그 해에 양반집 쌀을 못 갚아 두드려 맞던 옆집 흥복이 형님을 돕다가
다리를 잘 못 맞아서 절음발이가 되었다. 다리를 질질 끌고 들어오던 지민이 세상 떠나가라 바짓가랑이 부여잡고 울었고,
호석은 그에게 시방 내가 다쳤지 니가 다쳤냐, 내가 아파 디지겠구먼 지가 울고 앉았어? 하고 허허 웃었더래지.
그 때부터였나, 지민의 얼굴에서는 간간히도 어린아이의 밝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 제 탓이라고 여긴게야 하고 호석은 추측했고 다리를 절면서도 동네에서 가장 호탕한 사내로 유명했었다.
원체 얼굴 붉히는 사람이 아니였기에 돌아다니면서 떡도 얻어먹고 밥도 얻어먹고 굶어 할만한, 죽을 성격은 아니였다.
항상 열심히 해서 호석을 보살피리라 그가 저에게 했던 것처럼, 항상 지민은 생각하며 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인
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사실 이 꿈은 호석의 오랜 꿈이였는데 저때문에 이룰 수 없었으니
대신이라도 궐 안으로 들어가 호석에게 모든 궐 안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낮에는 양반집에서 일을 돕고, 밤에는 돌아와 달빛에 춤을 추고 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은 아니였던지라
지민은 또래 아이들보다 작고 왜소한 체격이였다.
가끔은 저도 남자다웠으면 했지만, 오히려 춤을 출 때에 가벼히 날리는 소매자락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왠지 실수가 없이 한번에 끝이났다.
기분 좋은 땀방울 하나가 턱 끝에서 탁 떨어질 때 즘, 호석의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들어가도 호석은 깨지 않겠지만 땀냄새가 나는 저의 체취에 땀이나 식힐까 뒷산을 바라보았다.
04
나이가 들어서, 왕위를 물려받을 나이가 가까워질 수록 태형의 선은 굵고 남자다워졌다.
어릴 때의 해맑던 웃음도 거의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런 세자를 따라가던 윤기는 역시 왕의 핏줄은 멀리서도 그 풍채가 드러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릴 적의 코찔찔이 세자는 이미 훌쩍 커버려 저의 어깨선을 이미 한참이나 넘겼다.
그래도 그러한 태형이 무장해제가 되는 순간이 있다면 정국, 그 성씨가 다른 세자였다.
나름 동생이라고 끼고도는 태형에게 어릴 적부터 정국은 무뚝뚝하게 안겨들어갔다.
둘의 성이 다르듯, 성질도 불과 얼음으로 나뉘었다.
불과 같이 온화하기도 하고 뜨겁기도 했던 태형과 얼음과 같이 한없이 차갑고 무뚝뚝하고 냉철한 정국,
태형이 아주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정국이 태어나기 전에 한 스님이 궐 밖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태형이라는 존재가 정국을 녹여버릴 것이라, 하고.
불이 없다면 얼음은 장차 이 나라의 큰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김씨가 그랬는지 민씨가 그랬는지, 그 해에 그 스님의 시체가 시장 바닥에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사실 윤기는 그냥 귀찮았다, 누가 왕이 되건.
사실 왕에 더 어울리기는 정국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한 번은 태형이 왕이 된다고 상상해보니 워낙에 방방 뜨는 성질이 없지않아
상소문을 읽다가 펑펑울며 모든 법률을 바꾸라 명할 것만 같았다.
혼자 뭐 이런 상상을 하냐, 윤기가 피식 웃으며 다 커서도 손을 잡고 걸어가는 두 뒤통수를 따라가며 상상을 그만두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여름 축제에 놀러나가는 길이였다.
저번에 들은 바로는, 태형이 산 중턱 어딘가에 백리향이 잔뜩 피어있는 별이 잘 보이는 언덕을 발견했으니
축제가 끝나면 그리로 놀러가자고 정국에게 말했던 것이 어렵풋이 기었났다.
오늘은 귀가가 늦을 예정이겠군, 귀찮아지는 윤기가 한숨을 쉬며 챙겨온 낑깡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백리향의 향은 딱 질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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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