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하! 어딜 가신 겝니까! 저하! 최 상궁은 대체 동궁을 지키질 않고 뭘 한게요!"
"저하가 긴히 할 일이 있으니 문 앞에 서 있으라 엄명을 내리신 탓에.."
진시가 채 이르지 않은 시각, 동궁전은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내관들과 궁녀들로 요란해졌다.
(*진시 = 아침 7~9시)
강 내관은 세자 대신 자신이 받을 문책이 두려워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저하.. 저를 위해서라도 어서 나타나 주십시오, 세자저하로 인해 맞은 제 종아리가 아직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그 시각, 소년은 동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저자를 물 만난 물고기마냥 헤집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아직 문이 열지 않은 가게가 있긴 했지만, 궁 안에 갇혀 살다 시피 하는 세자에게는 이마저도 행복한 일탈이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궁은 재미있는 것도 없으면서 나를 천날만날 가두려고만 한단 말이지."
물론 울부짖는 강 내관의 절절한 목소리가 들려 마음에 조금 걸리긴 했지만.
"이년이! 내가 애미애비 없다고 봐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근본도 없는 게...!"
할 일 없이 저자를 돌아다니던 소년의 귀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화가 단단히 난 듯한 사내가 누군가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본래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건 딱 질색이었으나, 소년은 간만에(일주일 전에도 오긴 했지만 소년에게는 나름 오랜만에) 나온 저자인데 무슨 흥미로운 일인가 싶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저는 물건을 훔치지 않았어요, 저번에도 그건.."
"됐어! 여기있는 사람들 중에 니년 말 믿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거다! 내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이었어야지, 나 원 참!"
소년도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자신보다도 더 작고 어린 것 같은 계집아이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에게 매달려 바들바들 떠는 모양새는 소년의 눈에도 퍽 불쌍하게 보였다.
어디서 나온 용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소년은 뒷짐을 진채 사람들을 비집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에게 다가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호통쳤다.
궁에서 항상 봐오던 아버지의 걸음과, 아버지를 항상 못살게 구는 최 병판 영감의 걸음걸이를 따라한 것이었으나, 아직 어린 소년이 어설프게 따라하는 걸음걸이는 퍽 우스웠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토록 조그만 계집아이를 근거 없이 책망하는 것인가!"
"허, 그럼 그쪽은 어느 댁 도령이기에 남의 일에 이렇게 참견을 하쇼?"
내가 이 나라의 세자다! 하고 자신있게 말하려 했건만, 생각해보니 여기서 자신의 신분이 들통나면 좋을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이미 내관이나 지밀에게는 들켰을지 몰라도, 사람들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으나, 괜히 자신의 신분에 대해 떠벌리고 다녔다간 아버지가 예를 그토록 중시하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온갖 말도 안 되는 상소로 시달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ㄴ..나는! 김 참봉의 자제요! 감히 너 같은 양민과 말을 섞을 수준이 아닌 몸이다!"
(*참봉 = 종 9품의 문관)
세자의 말을 들은 사내의 얼굴이 씰룩이더니, 비웃는 듯 푸하하, 하고 웃음 터뜨렸다.
"네놈이 나를 놀리려는 게냐! 여기 저자에도 부르기만 하면 발에 채이는 게 참봉인데, 말단 관직 가지고 유세하는 꼴이란!"
"ㅇ..아무리 그래도 나는 양반 가문의 자제다, 너 같은 상놈이 말대답할..!"
참봉 벼슬이 너무 낮다며 코웃음을 치는 사내를 보자, 소년은 좀더 높여 말할 걸 괜히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어린 계집애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람, 하며
입이 댓발 나온 소년이 무어라 더 쏘아붙이기도 전에 저 멀리서 소년을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저하!"
제기랄, 강 내관이었다. 궁사람이라서 여기까지 쫓아올 줄은 몰랐는데, 궁 근처 저자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당황한 소년은 길바닥에 움크려 있는 소녀의 손을 낚아채 사람들을 제치고 반대편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저, 저, 도둑놈 잡아라!"
사내가 소년과 소녀를 잡기 위해 뛰어가려 하자, 강 내관이 가쁜 숨을 겨우 몰아쉬며 사내를 붙잡았다.
강 내관이 환복한 의복은 꽤 고급스러워 보여, 양민들이 자신을 낮추게 만들기에는 충분해보였다.
"무슨 일이기에 우리 도련님을 잡으려 하는 겐가?"
"아, 나으리, 그게.. 저 계집아이가 제 가게 물건을 훔쳤는데 아니 그것이 실토하지를 않아서.. 그런데 그 도련님이라는 분이 그 계집을 데리고 도망갔지 뭡니까."
"이거면 저 아이가 훔친 물건을 배상할 만 하겠는가?"
강 내관이 도포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금 3냥을 사내에게 건네자, 사내의 얼굴에 이내 화색이 돌며 연신 굽신거렸다.
"아이고, 충분합니다요! 참봉 댁 자제라길래 별 유세를 다 떤다, 싶었는데 정말 귀한 가문의 자제 분이신 걸 이놈이 몰라뵈고.."
"너는 대체 뉘 집 아이냐? 정말 그 가게 물건을 훔친 게 맞아?"
"정말 소녀가 아니옵니다. 오늘은 그저 그 집 생선 굽는 냄새가 너무도 고소하여 냄새나 맡을까 싶어 기웃댄 것이었고, 저번엔 제가 아니라 점순이가 그런 것이었사옵니다."
소년과 소녀는 한참을 달려, 낡은 마구간의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았다. 고개까지 저으며 말하는 소녀의 눈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런데 왜 저 사내는 너를 자꾸 의심하는 것인데?"
"그건, 소녀가 아비도, 어미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그럼 어디에 살고 있느냐?"
"활인서에서 살고 있습니다. 낮에 청소를 하고 잔심부름을 하면 머물 수 있게 해준다고 하길래.."
"활인서? 거긴 역병이 든 자들이나 걸인들이 있는 곳이잖아."
"예, 맞사옵니다. 하오나 갈 곳 없는 저의 처지가 걸인과 다를 바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그런 이야기를 덤덤하게 말하는 소녀의 모습은 태어날 때부터 풍요 속에 살아온 소년에게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더니,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띄우고 소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너, 나와 함께 내 집에 가지 않을래? 거기 가면, 일도 더 적게 할 수 있고, 더 깨끗한 옷도 입을 수 있고.. 그래, 네가 좋아하는 생선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련님은 참봉 댁 자제 분 아니십니까. 어찌 참봉 댁에서 저 같은 천것까지 보살필 만한 여력이.."
"그건 내가 김 참봉 아들이 아니라, 용마루가 없는 집에서 난 아들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나랑 가자, 응?"
해를 품은 달 ost - 나비의 춤
아마 3,4편까지는 어릴 때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부족한 글이지만 댓글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