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죽여 드릴까요? 03 _킬링포인트
"잘잤어?"
"몇시야?"
"안 알려줄 거야. 시간이 뭐가 중요해. 우리 지금 한이불 덮고 있잖아."
"곧 보스 올거야."
"어제 대담하던 리아 어디갔지?"
얼마 전에 보스도 상대하고 어젠 정호석까지 상대하니까 정말이지 안 아픈 곳이 없네요. 그래도 정호석이 부드럽게 해줘서 골골댈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허리가 부서질 것 같아요. 어쩐지 눈을 감고 있어도 뜬 기분이 들더라니, 정호석은 나와 같이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할 땐 꼭 저러고 있어요. 자는 모습이 얼마나 추할지 상상도 안되는데 그게 예쁘다면서 바라보는 게... 오죽하면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잠결에서 확 깨버려요.
"어젠 니가 너무 섹시했잖아. 인정해."
"넌 내가 망가진 모습을 너무 좋아해."
"근데 하지마 이젠. 약속해."
"노력해볼게."
날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걸 들켜도 정호석은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날 계속 쳐다보네요. 그 눈빛을 먼저 피한 건 나에요. 이러다가 정말 내 눈에 구멍이 나겠다 싶어서. 정호석과 마주 보던 내 몸을 반대로 돌려서 정호석을 등진 채 바로 보이는 책상을 바라보면, 어제 정호석을 헤롱헤롱하게 만든 장본인이 있네요. 헤로인. 내가 예전에 정호석한테 알려준 거. 어찌 보면 정호석을 끝자락으로 가게 만든 건 나일 수도 있겠네요.
"무슨 생각해? 나 두고."
"그냥...다른 애들도 알아?"
"몰라. 너밖엔. 팀원들 중에선 내가 제일 멀쩡한 사람이잖아."
하지만 정호석한텐 미안하지 않아요. 직접 본인의 팔에 주사기를 찔러 넣고 눈이 풀려 한숨을 쉬는 모습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섹시해서 맘에 들거든요. 근데 고작 헤로인으로 죽는 건 너무 어이없으니까 이젠 다른 걸 가르쳐야죠. 정호석은 아주 좋은 스펀지거든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대로 다 흡수하니까.
"어쩌면 김태형이 제일 멀쩡할지도."
"귀가 안들리잖아."
"나도,"
"넌 내가 있잖아."
"...보스도 있고."
* * *
"태형아 나 메스."
"........"
"태형아. 김태형? 쟤 또 저러네."
갑자기 보스가 수술실로 날 불러서 며칠 통 제대로 못 잔 잠을 자다가 나와보니 태형이가 배시시 웃으면서 윤기형이 유난 떨어서 실패할 뻔한 작전의 타깃을 가지고 왔어요. 윤기형이 하도 뭐라고 해서 리아씨가 작전에서 빠졌다고 하던데... 아쉬워요 솔직히. 난 태형이 말고 리아씨가 수술실에 오면 좋겠거든요. 여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아까부터 계속 태형이 부른 거 봤죠? 근데 수도 없이 불렀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잖아요. 리아씨가 한 번도 설명해준 적 없나? 태형이는 청각장애 4급이에요. 선천적 말고 후천적. 보청기를 안 끼면 주위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린대요. 자기 말론.
"나한테 뭐 달라고 했어? 잠깐 딴생각하느라,"
"태형아 이건 의사로써 하는 말인데 너 큰 병원 가서 진료 제대로 받고 보청기도 새로 바꿔."
"나 진짜 딴생각 하고 있었어! 뭐 줄까? 이거? 칼?"
근데 제가 보기엔 보청기를 껴도 주위 소리가 점점 안 들리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이쪽 일은, 그것도 브로커인 태형이는 소리가 안 들리기 시작하고 그걸 상대한테 들키면 언제든지 나 같은 의사의 수술대 위에 올려져서는 이것저것 다 떼서 어딘가에 팔릴 수도 있는 건데 태형이 쟨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냥... 날 너무 의지하는 것 같아요. 내가 의사라서.
"브로커씨. 항상 만나던 그 브로커씨랑은 언제 만나기로 했어요?"
"아씨 존댓말 하지마. 이상해."
"언제 만나기로 했냐구."
"내일."
"그럼 지금 바로 병원가. 예약해줄게."
다른 것도 아니고. 병원 가라는 건데. 태형이 쟤는 뭐가 불만인 건지 입이 삐죽 나와 선 누가 봐도 나 지금 삐졌어요- 하고 있네요.
"그럼 이것만 보고."
"너 리아씨한텐 맨날 피뭍혀 온다고 뭐라고 하면서 내가 칼 들 땐 왜 오히려 보고 싶어서 안달이야?"
"걘 걔고 형은 형이니까."
"호칭도. 누나라고 해야지."
"아 진짜 다 잔소리꾼들! 칼줬으니까 빨리 해!"
못 이기는 척 제가 메스를 들고 타깃의 배를 가르면 태형이는 또 눈이 반짝반짝해서는 꼭 맛있고 커다란 막대사탕을 바라보고 있는 5살짜리 꼬마 아이 같아요. 하지만 어린 표정과는 상반되게 매번 옆에서 해부를 지켜본 탓에 피가 너무 많이 나오면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석션으로 빨아들이고 나중엔 혈액 팩으로 옮긴다던지 개복 후 장기를 정교하게 떼어내어서 밧드 (*수술도구를 담는 통)에 올려놓으면 본인도 장갑을 끼곤 만지면서 이름을 중얼거린다던지 하는 걸 보면 어쩌면 태형이 얘는 정말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아이구나. 생각이 들어요.
"심장하고 이어져서 내려온 이게 대동맥이었나? 이거 잘리면 바로 죽는 댔는데, 맞지?"
특히 장기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방금처럼 찌르면 급소라서 바로 죽을 수 있는 부위는 한 번씩 꼭 짚고 넘어가기도 해요. 꼭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듯이. 이러다가 리아씨랑 포지션이 바뀌는 건 아닌지.
"이번엔 젊으시고 체격도 있으셔서 꽤 높은 값이겠다. 브로커들 만날 때 항상 조심하고."
"알았다니까? 맨날 그 소리!"
"니가 덜렁대니까 그러지. 이어폰 꽂고 노래 듣지 말고. 이건 의사로써 잔소리."
"네네 알겠습니다 의사쌤- 나 갈게."
"딴 데 세지 말고 곧장,"
"병원간다구요 병원...이비인후과! 잔소리 그만하고 거울이나 봐. 얼굴에 잔뜩 피가 튀겨선...공포영화 한장면이야. 나 진짜 갈게!"
병원 가랄 땐 삐죽였어도 그래도 말은 잘 들어요. 이어폰 꽂지 말라니까 이어폰은 또 놓고 갔네요. 귀여운 자식.
* * *
"윽, 아파요...먹기 싫어요..."
"리아 며칠 동안 말 잘 듣길래 예뻐해 주려고 했는데."
"그만, 그만해요 제발..."
"이게 그리웠구나?"
정호석방에서 정호석과 단둘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냥 계속 침대에 누워있었어요. 어젯밤 모습 그대로. 근데 그러다 보니까 보스가 올 시간이 훌쩍 넘었던 거에요. 항상 보스는 숙소에 오면 내방으로 와서 날 살핀 뒤 자기방으로 돌아가는데 오늘은 내가 없었으니 이곳저곳 날 찾으러 다녔나 봐요. 그러다가 정호석 무전으로 온 보스의 말에 내껀줄 알고 내가 대답해 버리는 바람에,
"왜? 옛날 생각나고 좋잖아. 안 그래 리아?"
"흐윽..."
내가 지금 이 꼴인 거예요. 보스는 날 자기방으로 불렀고 그 뒤는... 다 알잖아요? 근데 오늘은 좀 달라요. 아까부터 보스가 나한테 먹이는 알약은 로히프놀. 이것도 일종의 마약인데 수면제라고 생각하면 돼요. 단기기억상실을 유발하는 수면제.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어깨를 단단히 쥐고는 먹이는데... 악력이 얼마나 센 건지 어깨가 곧 부서질 것만 같아요. 아, 그리고 수면제라도 마약은 마약이니까 당연히 쾌락도 있어요. 근데 먹기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보스가 계속 자극을 주니까 깨어나 보면 내 기억 속엔 없지만 보스의 기억 속엔 존재하는 딱 '보스가 좋아하는', 쾌락 끝에 있는 나 자신이 있겠죠.
"내가 말했지. 거기서 널 꺼내준 날 항상 기억하라고."
"......."
"근데 내가 없다고 도청기도 떼놓고 작정하고 호석이한테 갔던데?"
"ㅈ,잘못했어요..."
"넌 참 영악해 리아."
"그만 먹을래요...제발..."
도대체 몇 개를 먹이는 건지... 물도 없이 알약을 억지로 삼키려 하니까 목이 말라서 쓴맛이 더 심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오늘은 순전한 내 의지가 아니라 약에 취해서 이끌리는 몸이라 다행이네요.
"사람이 어디까지 화가 날 수 있는건지 궁금해서 그랬어?"
"......윽..."
"아님, 날 제대로 엿먹이고 싶어서 그랬어?"
"......."
"어떤 대답을 하든 넌 오늘 내 방에서 곱게 못 나갈줄 알아."
보스가 저 말을 하고 뒤엔 날 때렸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진 않아요. 내가 아까 말했죠? 보스가 나한테 먹인 거 곧이곧대로 받아먹으면 단기기억상실을 유발한다고. 내가 보스한테 뭐랬는지, 보스가 나한테 뭐랬고 어떻게 했는지 한 개도 기억나질 않아요. 다만 일어나보니까 여기저기 울긋불긋 멍져 있는 게... 나 많이 맞았나 보다. 입가에 딱지도 앉아있고. 눈을 돌려 옆을 바라보면 넓은 침대엔 나 혼자 덩그러니. 그래도 이불은 덮어줬네요. 여름이라도 새벽엔 춥던데 어쩐지 안 춥더라. 또 눈을 돌려서 문쪽을 바라보면 언제 열려있었던 건지...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말하고 싶은 전정국의 눈이 나와 달갑지 않은 인사를 하고 있네요.
* * *
"형, 누나 많이 괴롭히지마요."
콜록콜록. 주방에서 물을 마시다가 전정국이 하는 말에 그만 사레가 걸리고 말았네요. 팀원들한테 들킬까 노심초사하는 건 나뿐인 건지 되려 보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투로 전정국에게 되물었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그 타이밍에 사레가 걸려 기침만 하고 있는 나는 거실에서 대화하는 둘을 주방에서 굳이 내가 엿듣고 있었다는 걸 들킨 셈이기도 하죠.
"누나? 누구. 리아?"
"우리 팀에서 여자가 누나 말고 또 어딨어요. 시치미 떼지마요."
"내가 리아를 괴롭혔나? 리아 이리와봐."
저 사이에 내가 끼고 싶지 않았지만 난 또 보스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갔어요. 보스가 나에게 약을 먹인 그날은 벌써 일주일 전이지만 입술에 내려앉은 딱지는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았거든요. 없어질만하면 보스가 날 괴롭혀대서. 의뢰가 들어와도 요새는 민윤기가 계속해서 작전에 나갔기 때문에 편히 쉬고 있는 내가 어쩜 볼 때마다 생채기가 생기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더욱더 팀원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는데. 보스는 이런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나 봐요.
"저거 봐요. 입술에 딱지 진 거. 좀 오래되지 않았나? 날로 선명해지는 거 같은데."
"입술에 딱지 진 거랑 내가 리아를 괴롭혔다는 거랑 뭐가 연관성이 있는 건지 설명해볼래?"
"말 안 해도 잘 알잖아요. 다 봤어요. 그날."
"...ㅈ..전정국 그만 말해."
숙소엔 우리 셋 말고도 민윤기랑 김태형도 있는데 너무나도 조용한 이 상황과 공개적인 거실에서 전정국이 그날 있던 일을 다 말해버릴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전정국을 다급하게 말렸어요. 아니나 다를까 보스는 그게 고까워 보였는지 미소를 지우지 않던 표정을 굳히곤 전정국과 나를 바라보고 있네요.
"지민이 형처럼 형도 차라리 남자에 관심을 둬요. 괜한 사람 잡지 말고."
"남자는 재미없지. 듣기 좋은 소리도 안 나고."
"형의 그 고약한 성적판타지 맞춰줄 여잔 없으니까 누나 그만 괴롭혀요."
"근데 듣자 보니까, 내가 리아를 괴롭히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정국아. 너 조금 기어오르네?"
"또 형 듣고 싶은 대로만 듣죠. 이건 기어오르는 게 아니라 부탁이에요."
"아, 그럼 너도 한 번 맛보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진작 그렇게 말하지. 정국이가 혈기왕성한 스무 살인 거 형이 잊고 있었네."
나의 리아씨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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