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매듭짓기
" 내가 또 어제 한 건 했잖냐. "
" ··· 너 또 무슨 일을 저지른거야. "
" 저지르다니, 누가 들으면 맨날 사고라도 치고 다니는 줄 알겠네. "
아니였어? 웃음을 터뜨리는 내 옆으로 민규는 더 가까이 붙어 섰다.
웃지 말고 들어봐. 간만에 좀 진지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까.
내 광대를 큰 손으로 내려주는 민규에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아니, 어쩌면 그 뒷 말에 저절로 굳혀졌을지도.
" 지은이, 얼마 전에 걔한테 내가 반했었잖아. "
" 그랬었나? 뭐, 일단 그랬다고 쳐. 그래서? "
" 내가 어제 먼저 연락했지. "
" 뭐? 연락···? "
" 응, 근데 애가 진짜 착한거야. 매력도 장난 아니고. "
김민규가 나 말고 다른 여자와 연락을 한다라···, 애당초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이었다.
중학교 때 부터 김민규 하면 김세봉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친했던 우리 둘이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내 앞에서 뭐라 뭐라 말 해대는 민규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하고, 목이 답답해서,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유는···, 알고싶지 않았다.
" 야, 듣고 있어? "
" ·····."
" 김세봉, 듣고 있냐고. "
" 어어, 듣고 있지. "
" 아까 내가 무슨 말 했는데? "
" 어, 음···. "
" 뭐야, 안 듣고 있었네. "
" 미안, 다시 말 해줄래? "
" 됐어, 집 빨리 들어가서 쉬기나 해. 피곤해 보인다. "
아프지 않게 내 볼을 꼬집으며 말 하는 너가 미웠다.
내 옆에 가까이 붙어 있는 채로 지은이와 문자를 주고 받는 모습도 싫었다.
질투일까? 내가 김민규한테? 대체, 왜···?
답답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냥, 혼자 조용히 생각 해보고 싶었다.
" 야,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갈게. "
"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 집 들어가는 꼴 봐야 나도 가지. "
" 너 그냥 내 친구잖아. "
" 그럼 친구지. 갑자기 왜 그래. "
" 근데 내가 집 들어가든, 뭘 하든, 너가 무슨 상관이야. "
" 야, 김세봉. 말이 좀 그렇다? "
" 앞으로 나 말고 지은이 데려다줘. 그래야 점수 딸 거 아니야. "
"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너랑은 별개잖아. "
" 나중에 너랑 지은이 잘 되면 지은이가 나 불편해 할 거 잖아, 내가 불편해서 그래. "
" 뭐 그런걸 벌써부터 걱정해, 너가 정 그렇다면 오늘은 그냥 가는데 내일부터는 아니야. "
보고 있을 테니까, 가. 몇 초간 나보다 한참 큰 너의 눈을 바라보다 뒤를 돌았다.
눈물이 차오르는게 느껴졌고, 쏟아지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항상 기분파였던 나라서, 내 기분에 따라 내가 하고 싶어 하던 것들을 다 해주던 너였기에, 이번에도 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했다.
그러고선 분명 내 뒤에서 걸어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을 널 알기에 굳이 눈물을 닦지는 않았다.
복잡한 생각으로 날 보고 있을 너를 생각하며 애써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워냈다.
' 그냥, 내 사람이 내게 소홀해지는게 싫어서 눈물이 나는 거야 ' 하고, 혼자서 마음을 단정지었다.
' 따르릉- '
시끄럽게 울어대는 알람소리에 눈을 떠 휴대폰을 확인했다.
[ 오늘 집 들어가서 푹 쉬고 ]
[ 안 좋은 일 있으면 말 해, 내가 뭐 잘못한 거면 더 말 하고. ]
[ 설마 아침에도 따로 가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
[ 내일 아침은 평소대로 나와, 기다릴게. ]
연달아 도착했던 문자들에 머리가 복잡해져 눈을 감았다 지그시 떴다.
어쩔 수 없지 뭐, 어제는 내가 예민하게 굴었던 것 처럼 보일 수 밖에 없으니까.
한숨을 푹 내쉬며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
이렇게라도 하니 조금 고민이 씻겨 내려져 가는 것 같기도 하고.
" 아, 맞다. 동아리. "
교복까지 반듯하게 차려 입고서 나가려다 오늘이 동아리 날이라는 게 기억이 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연극 대본이···, 아, 여깄네. 책상 위로 어지러진 종이들 사이의 대본을 가방에 넣고선 집 밖으로 나섰다.
" 오케이, 2분 늦었고. "
밖으로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체크하며 말 하는 김민규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 김세봉. 오늘은 기분 좀 괜찮나보다?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놓고서 그대로 걷는 민규의 발걸음에 맞춰 걸었다.
천천히, 서로의 발걸음에 맞춰 걷다 보니 우리 답지 않은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와중 민규가 목을 가다듬으며 내 앞에 멈춰 서더니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끝까지 먼저 말 안하시겠다? "
" ···뭐를. "
" 와, 모르는 척 하는 거 좀 봐. 어제 너 먼저 간 이유. "
" 그건 그냥··· "
" 너가 세상의 모든 일 중 그냥이라는 이유 붙일만 한 일은 없다며. "
" ·····. "
" 알았어, 보채지는 않을게. 나중에 너 편할 때 말 해. "
" ·····. "
" 내가 잊어버릴 만큼 너무 늦게는 말고. "
" 알겠어. "
어휴, 근데 너는 어제 그렇게 일찍 잤으면서도 키가 안 크냐.
이번엔 내 어깨를 자신의 팔 걸이로 쓰며 괜한 내 키를 트집 잡는 너에 팔꿈치로 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아프잖아 김세봉! 옆구리를 부여잡고 내게 소리치는 너에 살짝 웃어보였다.
괜히 민망해서 내 키를 트집 잡았을 너의 마음이 예뻐서 웃었다.
그냥 우리 사이로 환하게 내비치는 여름 햇살이 예뻐서 웃음이 났다.
" 야, 김세봉! 너 잡히기만 해 봐. 죽었어! "
"에베베, 잡아봐라! "
' 난 너가 계속 내 옆에만 있어줬으면 좋겠어, 민규야. '
앞으로 절대로 하지 못 할 말이 입가에서 맴돌았다.
그냥 평소와 별 다를 것 없는 무료한 수업시간들이 지나갔다.
평소와 다르게 내 머릿 속은 수업 내용이 아닌 온통 김민규로 가득 찼던 것만 빼면.
하루종일 머리 아프게 김민규만 생각하다보니 7교시, 동아리 시간이 되어 동아리 실로 갔다.
" 와, 김세봉 나 버리고 먼저 온 거 좀 봐. "
맞다, 김민규랑 같이 오는 걸 잊고 있었네.
입으로 계속 투덜대며 내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는 민규에게 미안하다며 대충 사과를 해주었다.
" 사과 하는데 진심인 거 같지도 않고, 변했네, 변했어. "
" 그만 좀 투덜대, 시끄러워 죽겠네. "
" 역시, 사랑이 식었네. 민규 삐짐. "
삐짐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내가 혀를 쯧쯧 차며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니 옆에서 단장 오빠가 와 내 비어있던 옆자리에 앉았다.
" 오늘도 세봉이랑 민규는 여전히 투닥대네, 귀여운 자식들. "
" 형, 얘 요즘 진짜 변했어요. 성격도 변하고, 얼굴도 변하고···. "
" 야, 뭐라고? 너 다시 말해봐. "
" 아, 당연히 원래 아름다웠던 미모가 요즘 더 아름답게 변하고 있다고 했지! "
" 와, 오빠. 얘 아부 하는 거 좀 봐요. 진짜 나 참 징그러워서···. "
" 왜, 아부 아니고 사실이잖아. "
" 네? 아, 진짜 오빠까지 장난 치지마요. "
" 장난 아니고, 진심이야. 그치, 민규야. 세봉이 예쁘잖아. "
" 형, 그렇게 진지하게 말 하면 얘 진짜인 줄 알아요. 버릇 잘못 들이면 안됩니다. "
" 난 진짜 예뻐서 말 한건데. "
" 예전부터 티 많이 냈는데, 눈치가 없는건지, 없는 척 하는건지 모르겠네. "
그렇게 말 하고는 웃어보이며 자리를 뜨는 오빠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멀뚱히 민규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인상을 찌푸리고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며 일어서 동아리실 밖으로 나가는 민규에 따라갈까 생각하다 그만 두었다.
복잡했던 실타래가 한 번 더 엉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