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여자애는 달동네에 살았었어. 내가 살던 지역에서 달동네는 가난한 애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는데, 달동네 사는 애들은 보통 자신이 사는 곳을 숨기곤 했지. 애들이 좀 미숙해서 달동네 애들이랑은 안 친해지려 했었거든.
“너 집이 어디야?”
“달동네.”
“...아~”
“.........”
근데 그 애는 짝지의 질문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달동네 산다고 말하더라. 내가 걔 바로 뒤에 앉아서 다 봤는데, 짝지는 바로 일어나서 다른 애들이랑 대화하는 거야. 그래서 그 애는 혼자 남아있었지.
“달동네면 통학 오래 걸리겠다.”
“..........”
..응.
순간 툭 하고 뱉었어. 그 날 내 짝지는 안왔고, 걔 짝지는 자리를 비웠고. 그래서 뒤쪽에 우리 둘 밖에 없었거든. 내 목소리에 놀란 그 애가 뒤돌아서 날 보더니 답하곤 다시 앞을 봤어.
그게 첫 대화였어.
#2
나라고 달동네 애들한테 살갑게 굴어주진 않았어. 그냥 무시하는 게 유치해 보여서 무시에 동참하지 않았던 거지. 그래서 그랬는지, 달동네 애들이랑 조가 같이 걸렸던 애들은 선생님들한테 찾아가 조를 바꿔달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달동네 애들은 나랑 내 친구들이랑 조를 자주 했었지.
“재료만 사다 주면, 발표 신문은 내가 만들게.”
“그럴래? 우리 둘 다 손재주가 꽝이라. 고마워!”
“.........”
가난했던 그 애는 무언가 만드는 일이 있을 때면 재료값을 내지 않고 자신이 다 만들겠다고 했었어. 내가 재료를 사면 그 애는 달동네에서 내려와 사거리에서 만나 나한테서 재료를 받았지.
“내일까지 완성해갈게.”
“발표 금요일인데?”
“수정할 거 있을 수도 있잖아.”
“...그래, 편할대로.”
“잘 가.”
“응.”
근데 그 애는 늘 재료를 받으면 달동네로 올라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더라. 물어보진 않았어. 말했다시피 난 무시만 하지 않을 뿐, 내 관심 밖 아이였으니까. 그런 그 애한테 관심이 생긴 건 그 날이었지.
“...어, 쟤 달동네 아니냐?”
“..여주.”
“엉?”
“김여주. 쟤 이름. 조별과제를 같이 세 번은 한 것 같은데 기억 좀 하지?”
“뭘 기억까지. 야 가자.”
“..........”
친구랑 피씨방을 가던 길에 우연히 서점 안에서 책을 사는 그 애를 본 거야. 그냥 책을 사는 거였음 별 생각 없었을 텐데, 치마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파란 지폐랑 동전을 꺼내는 거야. 글쎄, 돈을 쓰는 걸 처음봐서 그랬는지, 카드를 쓰는 시대에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드는 게 현 시대와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그랬는지,
딸랑-.
“...여주야.”
“...어,”
아님 그 때부터 걔한테 관심이 있었던 건지, 난 뒤에서 날 불러대는 친구를 뒤로한 채 서점에 들어섰었어.
#3
“...뭐 샀어?”
“..........”
작별인사.
제노의 부름에 여주가 화들짝 놀라 제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곧 제노에게 들고있던 책을 보여주고, 제노가 부드럽게 가져가더니 휘리릭 훑었다.
“소설?”
“응.”
“책 좋아하는구나.”
“...응.”
“자.”
“..........”
제노가 여주에게 책을 다시 넘기고, 여주는 책을 받아 만지작 거리며 제노에게 말했다.
“넌 뭐 사러 왔어?”
“응? 아니. 난 그냥 너 여기 있길래.”
“...아.”
“집 가 이제?”
“아니, 나 여기서 읽고 가려고.”
“아, 그래?”
“응.”
“...혹시 나 옆에 있어도 되나?”
“어?”
“심심해서.”
...안 되나.
제노가 머쩍게 웃으며 묻자 여주는 건조하게 그래. 하곤 서점 구석에 자리한 소파로 향했다. 그런 여주의 걸음을 뒤따른 제노가 여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주가 책을 펼치고, 앞에 앉아있는 제노에 집중을 못하는 듯했지만 금방 책에 빠져들었다.
“.........”
“.........”
서점 주인이 틀어놓은 작은 티비 소리, 가끔 울리는 문에 딸린 종소리, 그리고 여주가 넘겨대는 책 장 소리가 둘 사이를 채웠다. 제노는 쓸데없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여주를 흘끗흘끗 쳐다봤다. 평소 몰랐던 여주의 외적인 것들이 제노의 눈에 들어왔다. 어중간한 머리 길이, 화장기 없는 얼굴, 날카로운 눈매. 제노는 생각했다. 꾸밀줄 모르는 게 아니라, 못 꾸미는 거겠지.
‘미친놈아. 피방 안 옴? -이동혁’
‘니 자리 안 잡는다. -이동혁’
‘아주 그냥 니 멋대로 해라! -이동혁’
“.........”
제노의 휴대폰 위로는 동혁의 메시지가 가득했지만, 지금 제노의 눈에 그게 들어올 때가 아니었다. 의미없이 들고 있던 휴대폰은 여주가 책을 절반 정도 넘어갔을 때 버려졌다. 완전히 여주만을 보고 있는 제노였다.
“..........”
“..........”
그러다 책 위로 보이는 여주의 눈과 제 눈이 맞물릴 때면 제노는 작게 입꼬리를 올렸고, 여주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쯤 되면 여주가 제노에게 왜 같이 있겠다 했냐, 집에 안가냐는 물음을 던질 법도 했으나 여주는 그러지 않았다. 늘 예상을 벗어가는 아이었으며, 참 건조했다.
“..........”
“..........”
그러다 여주가 마지막 장을 다 읽었을 때 제노는, 잠에 빠져있었다. 책을 무릎 위에 둔 채 그런 제노를 빤히 바라보던 여주는 조용히 책가방에 제 책을 넣었다. 그리고서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책가방을 들고는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
제노만 홀로 남았다.
#4
“..........”
“..........”
쌀쌀한 가을이 되자 학교에서 난방을 틀기 시작했다. 그만큼 조는 학생들의 수가 많아졌고 아이들의 집중력이 잔뜩 흐트러져있었다. 그건 제노도 마찬가지였으나 이유는 달랐다. 제 앞자리인 여주에게 말을 걸고싶기 때문에 집중이 안되는 것이었기에.
사각사각-,
“…………”
“…………”
톡톡-, 여주의 어깨를 건들인 제노가 판서를 쓰고있는 과학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며 여주에게 쪽지를 건넸다. 여주가 쪽지를 받아 펼쳤다.
‘어제 왜 나 두고 갔어?’
“…………”
사각사각-..
여주가 살며시 뒤 돌아 제노의 책상 위로 쪽지를 두고 바로 앞을 바라봤다. 제노가 쪽지를 펼쳤다.
’잘 자길래.‘
“…………”
단순한 네 글자에, 그 네글자가 참 여주스러워서 제노가 살풋 웃었다. 제노는 쪽지를 곱게 접어 필통사이에 넣었다.
지루하디 지루한 수업들이 줄줄이 끝나고 급식시간이 되자 제노는 자연스레 여주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여주는 움직이지 않은 채 곧장 책상 위에 책을 정리하곤 엎드렸다. 이상하다. 무상급식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해도 어쩔 수 없이 그쪽 방향으로 생각하는 자신이 싫은 제노였다.
“야 가자. 오늘 닭강정이래.”
“…그래.”
원래 밥을 잘 안먹었었나. 하고 생각해봤지만 답을 알 턱이 없었다. 그간 여주의 동태를 살핀 적이 없었으니.
제노가 찝찝한 밥을 먹고난 뒤 올라왔을 때도 여전히 여주는 엎드려 있었다. 은근히 그 모습이 신경쓰이는 듯 제 자리에 앉아 숨쉬느라 오르내리락하는 여주의 등만 보는 제노였고, 앞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반장이 소리쳤다.
이따 7교시에 청소구역 바꾼대-.
“아 씨, 과학 2실 개꿀이었는데. 그치.”
“그러게. 이제 뭐하지.”
“영어1실도 꿀 아니냐?”
“그랬나.”
반장의 말을 들은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뭘 할지 정하기 시작했고, 그건 제노의 옆에 앉은 동혁도 마찬가지였다. 동혁은 잘 쓰지도 않던 머리를 빠르게 굴려대며 첫번째로 어딜가고 그게 떨어지면 어딜가고 그 다음으로는 어딜가자. 하고 정하더니 마지막엔,
“인원 안맞으면 걍 갈라서. 오키?”
“마음대로.”
“서로의 꿀 청소를 위해 갈라서는 거야.”
하 제발 가위바위보의 신이시여 이번엔 꼭-…
동혁이 두 손 모아 기도를 할 때에도 제노의 시선은 여전히 여주였다.
#5
영어 1실은 경쟁자가 많아서 패스, 과학 2실은 둘 다 가위바위보를 졌다. 이후로 동혁은 이리저리 쉬워보인다 싶은 구역에 손을 들어댔고, 제노는 여주를 바라볼 뿐 손을 들지 않았다.
“야. 몇 개 안 남았어 뭐해?”
“기다려봐.”
결국 중앙계단 청소를 맡은 동혁이 아무것도 들지 못한 제노에게 말했고, 제노는 뭔지 듣지도 않은 채 여주가 손을 들자 자신도 같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어, 그럼 그렇게 두 명.”
사용하지 않는 구 음악실이었다. 여주와 제노 쪽을 바라본 반장은 여주의 이름을 확인하는 듯 교탁에 붙여진 자리표를 한 번 보더니 칠판에 여주의 이름을 적었다.
‘구 음악실 ; 김여주, 이제노’
#6
“..........”
“..........”
구 음악실로 갈 때마다 복도에 아이들이 줄어들고 곧 둘만 남았다. 제노가 손에 들린 열쇠로 음악실을 열고 먼저 음악실로 발을 들였다.
“...으, 먼지.”
“..........”
공중에서 손을 휘적거리던 제노가 주변을 훑었다. 먼지가 가득한 책상, 마지막 음악 선생님의 필기가 있는 칠판, 굳게 닫혀있는 피아노. 여주는 제노의 걸음을 쫓아 들어오더니 피아노를 열었고, 끝자락에 맴도는 높은 음을 하나 눌렀다. 맑은 음색이 노을 덕에 한껏 누래진 교실을 채웠다. 제노가 뒤돌아 여주를 바라봤다.
“..........”
“..........”
제노 자신이 여주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