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의 시작과 끝. 어느 드라마이던 시작과 끝은 정해져있다. 우리가 아무리 특이한 드라마를 찍는다고 해도, 타인에 의해 언젠가 드라마는 끝이 날 예정이다.
원래부터 가까운 사이는 아니였지만 요즘들어 더 멀어진 것 같다. 이여주가 영화 촬영을 한다고 했나, 그래서 여자에게 잔뜩 상처를 주고 난 후로는 얼굴 조차 보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답답해져만 가는 것은 비단 나뿐이였다. 사람 마음에 대못을 박고, 어떠한 변명도 늘어놓지 못하는 것에 절로 죄책감이 들었다. 나도 참 웃기는 새끼였다. 여자가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면 범죄자가 되는 것 같다고 뭐라 면박을 줬으면서, 이제야 실로 그 죄의 형량을 체감하고 있었다. 여자의 우는 모습은 큰 잔상을 남겼다. 집에 가서도, 회사에 나와 업무를 봐도, 식사를 해도 자꾸만 소리내어 울지 않으려 애쓰던 여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 온종일 저를 괴롭혔다. 나처럼 망나니같이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속으로만 삭히려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D그룹 장녀의 마약 투입 혐의건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저번에 만났을 때도 제정신은 아니였던 것 같았는데, 운이 안 좋게 걸렸는지 곧 재판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기사가 났다. 이여주와 함께 이 여자를 본 게 언제였더라, 벌써 두 달은 지난 이야기였다. 한창 제가 이여주를 싫어했을 때. 둘만 있을 때는 그렇게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는데, 제3자가 우리 둘의 영역에 개입을 하면서 나는 치밀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여주는 그런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아마도 그녀는 다 알고 있을 것이였다. 나는 가업을 위해 꼭 필요한 희생적 존재임을. 아버지의, 혹은 할아버지의 명령 혹은 지시로 나는 행동해야함을. 그리고, 대기업 후계자라는 우리 안에 갇혀 나는 평생을 그들의 감시를 받으며 자라나야했고,
“부사장님, 사장님 호출 있으십니다.”
지금도, 그들의 지시를 받아 실행에 옮겨야하만하는 희생양이라는 것을.
“기사는 너도 봤겠지. 그 여자가 지금 경찰 조사 받고 있다는 걸.”
“..네.”
“제 발로 스스로 구렁텅이에 든 것이니, 우리로써는 잘 된일이라 할 수 있겠지. 수고했다. 진작에 알았으면 고발이라도 했을 걸, 아쉽구나.”
“….”
“덕분에 여주씨와의 계약도 예정보다 빨리 종료시키려고 한다. 너도 알듯이, 더 이상 둘이 연인으로 보여질 이유가 없어졌으니 말이야.”
“….”
“결별설 기사를 15개월 후에 내보내려고 했는데, 10개월 후에 내보내기로 했다. 지금 타이밍에 결별기사를 내보낸다면 그들이 또 가만두지 않겠지. 분명 그 여자의 모든 것을 캐내려할 것이야. 너도 그렇고. 그래서 텀을 두기로 했단다. 여주씨에게는 따로 말 해놓을테니, 그동안이라도 조금만 더 힘쓰렴.”
“….”
“그럼, 가보거라.”
나는 항상 내 의사를 내비춘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저 조종사였고, 나는 조종사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로봇이였다. 28년을 그렇게 살았다. 15개월이나 남아있던 여자와의 의무적 관계는 10개월로 줄어들었고, 약속했던 10개월이 지나면 우리는 또 그 전처럼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는 채 살아갈 것이다. 그녀는 그녀대로 연기를 하고, 나는 나대로 아버지에 의해 놀아나고.
*
쇼윈도 드라마 07 :: 끝은 정해진, 어긋난 드라마
처음으로, 이여주가 나온 영화를 돌려봤다. 이여주의 데뷔작. 4년이 지난 영화라 그런지 지금보다는 훨씬 앳된 모습의 이여주가 교복을 입고 나왔다. 몇 살이랬지. 생각해보니 이여주가 몇 살인지도 모른다.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이리도 그녀에게 무심했었나. 미안함은 자책을 낳고, 자책은 자신에 대한 화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대체 뭐라고, 이여주를 혐오했었는가. 가진 것도 없는 나같은 새끼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그녀를 밀어냈는지. 화면 속에서 화사하게 웃는 저 얼굴에 대고 내가 뱉은 말들이 꿈틀대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선을 지키세요.’
먼저 확정된 선을 넘어 그녀를 탐하고 있는 건 나면서.
‘설치지 좀 마세요.’
아무 말도 못하던 그녀가, 대체 나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여주가 죽어가는 엄마를 보며, 병실을 뛰쳐나가 급하게 주치의를 찾아다닌다. 환자를 보고있던 주치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이여주의 얼굴을 부며 인상을 찌푸리고, 여주는 그의 흰색 가운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잡으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결국 울며 주저앉는다. 터진 입술, 붉어진 눈가, 수도꼭지마냥 터지는 울음. 엉망이 된 여주의 얼굴을 보고 병실로 뛰어들어가는 의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힘이 풀린 다리에 어쩔 수 없이 주저앉아서는 얼굴을 벅벅 닦는다.
나도 모르게 화면을 정지시켰다. 내가 한 말을 듣고는, 그녀가 저렇게 울었던 것은 아닌지. 화면에서 울먹거리던 여자의 얼굴이, 얼마전 내게 지은 표정과 너무나도 겹쳐보였다. 소리를 내지않으려 입술을 꾹 깨물고, 얼굴까지 새빨게지더니, 눈물이 펑 터지자마자 문을 박차고 사라졌는데. 처연하게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얇은 소매로 제 눈매를 몇 번이나 닦고, 결국엔 두 눈가가 붉어져 퉁퉁 부었을텐데. 그리고 나는, 지금껏 모진 말에도 울지않으려 꾹 참아내던 그녀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터지게한 장본인이고.
그런 내가 뭐라고, 다시 그녀를 욕심을 낼까.
결국 영화를 다 보지 못하고 도중에 꺼버렸다. 그녀가 우는 모습을 그냥 연기를 잘하네, 하고 넘길 수 있을 때까지 내 자신이 의연해질 때 보기로 결심을 하고. 아마, 그런 날이 올까? 내가 그녀의 눈물을 보고도, 전처럼 증오의 감정을 잔뜩 담은 채로 그녀를 밀어낼 날이 오기나할까?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노트북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무 생각도 없이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다. 검색어 1위, 이여주.
'이여주·김태형, 영화 스틸컷 공개'
내가 마지막에 봤던 그녀의 얼굴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였다. 내 앞에서 저렇게 웃어줬던 적이 있었을까, 후회는 다시 자책으로 돌아와 내 가슴을 쿡 찔렀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분위기를 좆같이 만들었던 건 내 쪽인데 어떻게 그녀를 웃게하리. 단 몇 달만에 완전히 변해버린 상황에 또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든 것이 내 탓이였다. 내가 조금 더, 그녀에게 상냥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후회할 일은 없었을텐데. 또, 그녀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하진 않았을텐데. 평소에 그렇게 권력만 쥔 사업가들에게는 가식의 미소를 지었으면서, 그녀에게는 조금의 여유도 허용치않았다.
여러 장의 스틸컷에는 내가 몰랐던 그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있었다. 나에게는 보여주지 못했던 미소와, 아름다움과, 우아함. 나를 볼 때마다 그녀는 금지된 행동을 취한 것을 들켜 부모에게 혼나기 직전인 아이처럼 그저 내 눈을 피하기만 했었는데, 역시 내 앞에서만 취할 수 있었던 제스쳐였나보다. 하긴, 어떻게, 내 앞에서 저렇게 예쁘게 웃겠어. 사진을 볼 때마다, 그녀를 바라보는 김태형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어째 찍힌 사진마다, 김태형은 하나같이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녀만큼이나 화사한 얼굴로. 최소한의 애정이 없지않으면 찍히지도 않을 눈빛으로. 무언가 끓어올랐지만, 금세 가라앉았다. 내가 그녀의 미소를 보지 못했던 것은 다 나 때문이였고, 김태형만이 그 웃는 낯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김태형이 그녀에게 나보다 더 잘해줬을테니까.
공식적인 연인은 나인데, 외간 남자보다도 못한 나의 능력에 무능함이 밀려왔다. 허나, 그녀와 나 사이를 묶어주던 실이 헤질만큼 나는 너무도 그 사이를 빙빙 돌고 돌았기 때문에 헤져버린 출발선을 다시 찾아와봤자, 관계 회복을 위한 마라톤은 이미 끝나버린 셈이다. 지금 와서 그녀에게 내가 미안했어요, 용서해줘요. 하기에는 내 양심이 그것을 허용하지를 못했다. 용서는 그녀가 해야하니까. 내가 무슨 낯짝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치고는 용서를 해달라며 손을 싹싹 빈단말인가.
드라마에서의 못돼 처먹은 새끼는 끝까지 못돼 처먹었다. 드라마에서의 악녀가 약점을 잡히고 곧바로 태세를 변화하는 것도 또 다른 루트를 통한 이익을 위해서였지, 정말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반성과 회개를 통해 변화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녀와의 드라마에서 나는 그녀에게 처음부터 못된 새끼였으니 끝도 못된 새끼로 남지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에게 저질렀던 못돼 처먹은 행동들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녀에게 뱉은 말들을, 보낸 눈빛들을 그녀가 용서한다쳐도 내가 나를 용서하지를 못할 것 같으니 나는 그녀에게 영원히 나쁜 새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말이지. 비록 지금은 그녀와 내가 주인공으로 촬영되고 있는 쇼윈도 드라마지만, 못돼 처먹은 나는 끝엔 결국 그녀의 꽃같은 웃음이 더욱 만개할 수 있도록 해주는 누군가에게 그녀를 처참히 뺏길 수밖에 없겠지. 그래야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끝이 날테니까. 처음에 우리 서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살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고. 그녀는 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줄 누군가와 막을 내릴것이고, 나는 그들이 골라준 돈많은 신붓감과 또 다른 드라마를 찍을 것이고.
나의 삶은 드라마의 연속이였다. 소재는 돈많은 도련님. 남들은 다 나를 부러워하지만, 내 인생은 내 존재에 대한 이유의 연속이였다. 끝내 결국 실질적 의미로의 존재의 이유는 찾지 못했으나, 형식적 의미로의 이유는 후계자 자리에 앉고는 얼마안가 알 수 있었다. 손쉽게. 그들의 놀임판에 나를 이용해먹으려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년은 쉽게 희생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하여 언론에 쉽게 올랐다. 그래서 이번 계약도 D그룹 장녀처럼 그렇게 실없는 여자를 만나 결국엔 깽판을 치고 끝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다. 20년간 이 놀음판에 건재하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경우로 흘러가긴 처음이였다. 내가, 계약녀의 눈물에 반응하다니. 여동생이 들으면 진짜 놀라자빠질만한 소리였다. 그렇게 남들이 들으면 놀랄만큼, 나도 그녀의 눈물을 실제로 보고 난 후 하루하루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라 생소했다. 그녀가 나온 작품을 보고, 그녀의 사진을 보고, 그녀의 미소에 다시 자책하는 것이 너무나도 생소해 이질감이 들 정도로.
드라마에는 시작이 있듯이, 끝도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의 드라마는 형식적인 드라마보다 조금은 더 길게 촬영이 될 것이고, 시간이 지남에따라 조금씩 멀어져감을 보이겠지. 연애 초기의 불타오르던 마음이 조금씩 지날수록 수그러지듯이 뜸해질 정도의 정해진 만남의 수가 애정의 정도를 보여줄 것이며, '결혼'이라는 난관에 부딪혀 결국은 1년넘짓한 시간으로 끝을 보는 일반적인 커플로. 아마 이제 그녀를 볼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그녀에게 내 서투른 감정을 조금씩 보여주겠지만, 언젠가 나는 드라마의 끝을 위해 그녀에게서 멀어져야하는 역할이다. 비정상적인 우리의 관계가 정상적인 커플의 이별로 보여지기 위해서는, 그녀를 위해 내가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쪽을 택해야했다.
*
“태형씨, 이거 반응이 너무 뜨거운데..”
“근데 그거 진짜 잘 나오지 않았어요? 완전 맘에 드는데, 진짜 잘 어울려요, 여주씨랑 나.”
언제 찍힌지도 모르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가 김태형과 번갈아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김태형과 동선을 맞추려고 뜻하지않은 스킨쉽을 하다 스탭이 찍은 것 같은데, 카메라를 보고 있지않았는데도 마주보며 웃고있는 우리 둘의 모습이 고스란히 사진에 담기자 인터넷에서 또 난리가 났다. 나에게는 남자친구 있는 거 맞냐면서 잘 어울린다나 뭐라나. 관심이야 나는 좋지만, 뭔가 김태형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애정이 없고서야 나올 수 없는 눈빛이라며 궁예질을 하는데, 그렇게 느끼는 거야 뭐 김태형이 워낙 정이 많으니까. 공식적인 애인이 있는 나를 상대로 무슨 궁예질을 당하는 건가 싶어서 티는 안 냈지만 되게 미안해했다.
“이렇게 좀 웃지, 웃으니까 얼마나 예쁘고 좋아.”
“….”
“이 사진 찍힐 때, 하루종일 우울해있길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 날 또 집가서 술마시고 그런 건 아니죠?”
“술 안 마셨어요, 그때. 걱정하지마요. 내가 말했잖아요, 술 마시면 전화하겠다고.”
역시, 그럼 나중에도 꼭 전화해요. 당부하듯 말하는 김태형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이. 김태형은 항상, 내가 무슨 말을 할 때 확답을 주고나면 저렇게도 환히 웃었다.
“여주씨랑, 태형씨랑 인터넷에 뜬 사진 봤어요?”
왜, 뭔데? 하면서 주변에서 스탭들이 우리 주위로 몰려든다. 아직까지 포털사이트에 뜬 사진을 확인하지 못했던 것인지 몇몇의 스탭들이 누군가가 보여주는 우리 둘이 찍힌 사진을 보고는 탄성을 자아냈다. 뭐야, 둘이 언제 그러고 있었어? 저, 저도 모르겠어요. 얼버무리며 답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스탭이 입을 뗐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정국과 내가 실제로 사귀지않는 사이임을 모르는 여자스탭이. 그리고, 모두가 답했다.
“너무 예쁘게 나온 거 아니야? 여주씨 애인분이 질투하시겠다.”
“그니까요. 애인 분이 뭐라고 하시는 말씀 없으세요? 나같으면 엄청 질투할 것 같은데.”
말하자면 나는 내 나름대로 전정국을 내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노력중이다. 전정국이 나에게 애정이 없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기에 내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그의 관심이 따르길 바라는 것은 너무 어린 생각인 걸 알았으니까, 조금은 어렵겠지만 그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의 하루에서 조금씩 그를 비워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자꾸 주변 사람들의 말이, 꿋꿋이 노력하고 있는 나를 무너뜨리게 했다. 동료배우들의 말로, 스태프의 말로, 코디들의 말로인해 잊으려했던 그 말끔한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를테니까 저렇게 나오는 것이 당연한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반응이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전정국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입을 아꼈던 것이다. 나는 지금 당신들을 상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스탭들의 질문에 나보다 김태형이 더 당황한 눈치였다. 그들 눈에는 안 보이게 나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김태형에게 고개를 살짝 내젓고는 그저 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이게 내 역할이고, 내 대본이잖아.
“에이, 이런 걸로 질투하실 분이 아니세요. 그저 촬영 잘하고 오라고 하시던데요. ”
단짝친구의 비밀을 알아버린 소녀처럼. 남을 속이려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짓말을 술술 내뱉는 나를 보며, 자꾸만 동요를 일으키던 김태형의 눈동자, 동그란 고동색이 고요히 춤을 추고 있었다.
.
.
.
“네. 이번 주에 정국씨 만날게요. 네. 쉬세요, 사장님.”
D그룹 장녀의 사건 이후로, 우려했듯이 계약기간이 10개월로 줄어들었다. 사장님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끊기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이게 더 좋은 방안일 수밖에 없겠지. 맘 같아서 그는, 얼마나 지금 당장 결별 기사를 내보내고 싶을까. 그 남은 10개월을 함께 한다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그와 함께 보내는 것이, 어떻게 내게 행복할 수가 있을까. 평생을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서 놀아났을 그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 욕심을 버려야하지않을까. 사랑은, 상대방이 행복해야 사랑인 것이니.
*
“…잘 지내셨어요.”
룸으로 들어오는 이여주의 목소리에 내리깔던 시선을 들어올렸다. 촬영 중이라 어쩔 수 없이 다이어트를 한다던데, 진짜 맞는 말이였던건지 전보다는 더 헬쓱해지고, 가냘퍼진 얼굴과 몸으로 나에게 말을 건넨다. 물론 그녀가 저렇게 헬쓱해진 것에는 분명 내가 괴롭혔던 것도 포함되겠지. 이유없는 미움은 언제나 받아도 적응이 되지 않는 법이니. 그녀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근 2주만에 다시 보는 얼굴인데, 분위기가 전과는 또 달랐다. 내가 입이라도 떼면, 내 앞에서 위태로운 여자가 유리조각처럼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
“….”
뭐라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녀도 내가 말을 하길 꺼려하는 눈치인 것 같아서,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눈 조차 마주치질 않았다. 다시 만날 기회라도 되면, 용서까진 바라지않는다고 해도 내 자신이 회개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같이 힘이 없는 여자의 얼굴을 보니 무어라 입을 떼지도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내가 이렇게 만든 거겠지. 그렇게 쾌활했던 이여주를.
“하아….”
답답함이 적들의 손처럼 제 목을 조여왔다.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식사를 하는 이여주에 그냥 절로 한숨이 났다. 내가 들어갈 문을 철저하게 닫아놓은 것 같아서. 내가 얼마나 이 여자에게 상처를 줬으면 이 여자가 이렇게까지 벽을 치겠어. 터진 한숨에 약간의 놀란 기척을 보이던 이여주가 파묻던 고개를 들더니, 위태로운 눈빛으로 날 마주했다. 아마 내가, 지금 상황에 화가나서 자신에게 상처 줄 말을 던질 줄 알고 움찔한 것인듯 싶다. 오늘 처음으로 마주한 눈에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텅 비어보인 까만 눈동자. 마주친 두 눈에 제 심장이 저릿했다. 처음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눈빛에, 물밀듯이 죄책감이 밀려와 결국 저를 다시 괴롭혔다. 너가 저 여자를 저렇게 만든거야, 하고 누군가 소리지르는 것 같았다.
“..전정국씨.”
“네?”
“…남은 계약, 더 앞으로 당길 수는 없어요?”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제 표정을 본 이여주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내 결심한 듯 심호흡을 길게 하더니 말을 붙여온다. 무슨 소리야, 앞으로 길어봤자 10개월 남짓한 시간을, 더 당기자니.
“우리 더 이상 연인으로 보여질 이유가 없잖아요.”
“….”
“..전정국씨도, 계약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니까.”
“무슨 소리를,”
“전정국씨가 저, 많이 싫어하는 거 저도 알아요. 왜 싫어하는 지도 어렴풋이 짐작 가고요. 눈속임을 위해서 이행했던 계약이였지만, 이제 곧 파산이날텐데. 게다가, 정국씨도 이런 관계 싫어하셨잖아요. 저, 저는 뭐 상관없지만요. ”
전정국씨가 저 많이 싫어하는 거 저도 알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제 앞에서 저 말을 뱉을때까지, 그녀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냈을까. 그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싫어하는 게 아닌데. 나는 이제 그녀를 싫어하지않는데.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진 현재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이제와서야 저를 이해해달라고 여자를 조르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일이였어서 아니라고 말할 자신감이 생기질 않았다. 아, 그녀는 태생이 착한 여자였다. 자기 힘든 것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이유로 계약만료일을 당기자니. 저것도, 얼마만큼의 고민 끝에 나온 말일까.
“지금 당장은 주변 상황 봐야하느라 힘들겠지만, 차차 정리하는 게.. 어때요?”
“….”
“정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제가 직접 사장님한테 여쭤봐도….”
“싫습니다.”
드라마에서의 못돼 처먹은 새끼는 끝까지 못돼 처먹은 새끼다.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쪽을 선택하겠다했으면서도, 나는 사실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1년도 안 남은 우리 둘의 계약동안에라도 나는 그녀에게 과거보다 더 그녀에게 잘해줄 자신이 있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날 위해서라는 이유로 우리의 관계를 축소시키려는 것에 저도 모르게 화가 났다. 의아함을 담은 눈동자에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정말로 모르겠어서.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그녀를 포기하는 것이, 혼란스러웠던 그녀를 평안케해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데.
“여주씨가 제안한 거, 저는 못 따르겠는데요.”
자꾸만, 저 얼굴을 볼 때마다 욕심이 난다. 끝이 정해져있는 드라마를 부정하고 싶을만큼, 소유욕을 들게 한다.
*
여러분,, 저 생각보다 빨리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런가요..!
이번 편 부제는 끝이 정해진, 어긋난 드라마잖아요? 원래는 끝이 정해진 드라마, 어긋난 드라마 이 둘중 고민을 많이 했는데
뭐 하나 뺄 내용이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둘 다 합치기로 했어요.. 대책없는 게 느껴지시죠 ㅋㅋ
이번편 브금은 여러분들이 다 아실것 같아서 제목을 안 넣었습니다. 어긋난 두사람. 이 수식어를 떠올렸을 때 바로 lost stars가 생각이 났어요.
이번 편은 정국이가 메인으로 나왔으니까 정국이 심정으로 깔린 노래라고 해도 뭐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제 7화네요. 뭐 끝이 보일 것처럼 이제야 서로 풀리는 것 같지만 전 아직도 쓸 에피소드가 꽤나 남아있답니다.
제가 말했잖아요, 제가 쓴 빙의글 중 가장 큰 판이라고..! 끝없는 삽질과 삽질의 연속. 기대해주세요. 찡긋.
항상, 달리는 댓글 하나하나 유심히 보고있어요. 바빠서 일일이 다 피드백을 남겨드리진 못 하지만요, 생각 날 때마다 정말 많이 읽고있습니다ㅠㅠ
정말로 독자님들의 성의있는 댓글만큼 다음 화를 빨리 쓰고싶은 부스터도 없는 것 같아요.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거의 기본 6시간 정도 걸려요. 들인 시간만큼 좋지않은 퀄리티이기는 하지만, 성의있는 댓글을 보면 내가 들인 시간에 그만한 댓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아무튼 모두들 정말로 감사해요! 저는 다음편에서 보겠습니다ㅠ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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