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겸께서 미루 너를 불렀다지."
"예, 행수님."
"...그 분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게 좋을 것 같구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농이 심한 분이시니,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는 미루 네가 곤란해질 것 이다."
"...."
"그렇다고 나쁜 분은 아니시니 귀하게 모시거라. 어여 들어가보거라."
여주는 황진이의 말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다가 이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술상을 들고 유생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오, 이제 들어오나 봅니다."
"...술상 올리겠습니다."
여주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다른 기생들과 함께 술상을 올리고 어색하게 술을 따라보였다.
"들어오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자세가 영- 어색하구나."
민규는 여주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했다.
여주는 황진이의 말을 기억하고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민규에게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덜덜 떨며 술을 따르기 급급했다.
"명색이 연화기방 기생인데 이런 간단한 일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내 알려줄테니 잘 보거라."
민규는 짓궂게 웃어보이고는 술을 올리는 여주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차분히 감싼 뒤 지훈의 술잔에 병을 기울였다.
여주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급하게 손을 뺐다. 그 바람에 술병을 놓치며 옆에 앉아있던 석민의 두루마기 위로 술이 쏟아졌다.
"제성... 농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아무리 그래도 여인에게 무례하게 어찌 그러십니까."
지훈은 얼굴을 찌푸리며 민규를 나무랐다.
여주의 놀라는 모습에 당황한 민규는 손을 어찌할 줄 모르며 갈팡질팡했다.
"소녀가 이리 놀랄 줄 몰랐소.... 이... 이 어찌 합니까... 죄송하오... 내 그저 장난을 치려고...."
"아... 아닙니다.... 소인이 손이 미끄러져 진사님의 옷을 버렸습니다... 송구합니다...."
"나는 괜찮다. 모든 사람이 처음 하는 일은 그르치기 마련인것을."
석민은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여주에게 괜찮다는 인사를 전했다.
"제...제가 어서 가서 닦을 천을 가져오겠습니다."
여주는 황급히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내...내가 지금 무슨 실수를 한거야!! 진사님 옷에 술을 쏟다니... 설마 천 값을 치르라고 하지는 않겠지?'
문을 닫자 마자 여주의 머리 속은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감히 성균관 유생의 옷 위에 술을 쏟았다는 생각에 행수님께 경을 치를 것을 생각하며 울상이 되어 천을 가지러 갔다.
"뭐야, 미루 너 '나비님'들 방에 들어간 거 아니었어?"
"들어가긴 했는데.... 나 큰일났어...."
"왜, 뭐 실수했어??"
"나..... 이 진사님 옷에 술을 엎질렀어."
"..야!!! 미루 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 옷 진사님이 평소에 아끼시던 옷이잖아!!"
"나도 내가 잘못한거 알아.... 그니까 매화야... 잔말 말고 닦을 헝겊이나 줘...."
"다른 애들은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난 '나비님'들 방을 친히 지시받고 들어간 년이.... 참 잘~ 하는 짓이다. 어떡해!!"
"아 몰라!!!"
미루는 기생들의 방에 들어가 매화와 대화를 나누었지만 매화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매화는 여주를 걱정하며 손에 헝겊을 쥐어줬다.
"이 진사님을 따로 모셔서 옷 닦아드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기나 해!!"
매화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여주의 뒷모습에 소리쳤다.
여주는 알겠다고 간단히 대답하고 잰걸음으로 '나비님'들의 방에 들어갔다.
"....진사님... 따로 모시겠습니다. 이 쪽으로 오시지오."
여주는 긴장이 역력한 모습으로 석민을 다른 방으로 인도했다. 석민은 그런 그녀의 말을 따랐다.
유생들의 방에서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조용하고 달빛이 밝은 작은 방에 다다랐다.
"...앉으시지요. 옷을 닦아드리겠습니다."
"설마, 내 이 옷을 입고 있는 채로 닦는 것이냐?"
"그.. 그렇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아까 제성의 손이 닿았을 때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네가 사내의 몸에 손을 얹는 것은 더더욱 놀라지 않겠느냐."
"....그것은 모두 소녀의 불찰입니다. 송구스럽지만 용서를 빌겠습니다."
여주는 그런 석민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아니다. 이런 일을 가지고 그렇게 고개를 숙일 필요까지... 내가 나랏님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사과를 하는 것은 내가 부담스럽다."
"아닙니다... 잘못을 하고 어찌 진사님 얼굴을 감(鑑, 보다)하겠습니까.그저 제 용서를 받아주시지요."
"거 참.... 생각보다 고집이 있으신게로구나. 고개를 들거라. 밝은 달빛에 비친 네 얼굴이 보고싶구나."
여주는 석민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찬찬히 들어올렸다.
그러자 석민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여주는 그런 석민의 눈을 피하고 헝겊으로 석민의 옷을 닦기 시작했다.
휘어지게 밝은 달빛 아래 기방의 넉넉한 소음이 듣기 좋게 들려왔고, 그들은 마주앉아 말없이 옷만 닦을 뿐이었다.
"가야국의 핏줄이라고 했지."
"...예."
"...그래서 그런지 넌 어딘가 모르게 묘한 구석이 있구나."
"......"
"다시 꿀먹은 벙어리가 됐구나."
".....그저 옷을 닦겠습니다."
"분명 아까 술을 얼마 들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취한 것인지..... 기분이 영 이상하구나."
"......"
"오늘 달이 맑아서 그런가.... 네 모습이 너무 어여쁘구나."
"......."
"기명(妓名)이 아닌 너의 이름이 무어냐."
"......"
"내 말에 대답하기 싫은게냐?"
"....기방에 뫼는 객(客)분들께는 기명이 아닌 이름을 누설하는 것은 기방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어허..... 그저 알려주면 되는것을 참 모질구나."
"........"
"그래.... 대답하는 것은 네 자유겠구나. 그나저나 오늘 달이 진심으로 곱구나. 너의 얼굴을 보는 기분이야."
"진사님 옷에 얼룩이 남을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기방에 옷을 두고가시면 제가 깨끗이 빨아두겠습니다."
"....계속 내 말을 피하는 구나."
석민은 여주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 달빛이 비쳐 영롱한 것이 마치 어리광부리는 어린아이의 모습과도 같았다.
여주는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마친 채 유생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석민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 까지 바라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띄고 방에 들어갔다.
"상유들, 나 없이도 잘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내가 없이 진행이 되기는 했습니까?"
"도겸 자네가 없으니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유익하고 즐거웠소. 이참에 앞으로 계속 불참하는 것이 어떻겠소?"
승철은 석민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을 했다.
"서장의가 그런 말씀을 하시니 섭합니다. 말씀도 참 짓궂게 하십니다."
"그나저나, 곧 있으면 반궁(半宮)이 닫을 시간이니 오늘은 이만 마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도록 합시다."
유생들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생들이 기방을 나서려고 하자 황진이가 나와 유생들을 배웅했다.
"오늘은 이야기들 즐겁게 나누셨습니까."
"왠일로 행수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이리 인사를 하시는군요."
"오늘 저희 아이가 진사님께 실수를 하였다고 들어서 이리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술상을 올리는 일은 처음하는 지라...."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그 아이가 약조한 일을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무엇을 약조 하셨는지...?"
"이 옷을 그 아이에게 전해주면 알 것입니다."
석민은 자신의 두루마기를 벗어 황진이에게 건넸다.
"이걸 두고가시면 진사님은 어찌 돌아가십니까."
"어차피 성균관도 여기서 얼마 멀지 않으니 금방 도착합니다. 그 옷을 그 아이에게 전해주기만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들 가시지요."
황진이는 의뭉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채 유생들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였다.
유생들이 가고 난 뒤, 기방은 여주의 실수로 소란스러웠다.
''미루가 실수했다면서.'
'아직 초짜인 애를 나비님들이 왜 찾으신거래.'
'왜, 쟤 신기때문에 그런거 아니야?'
'그래도 아직 화초 못올려서 기생도 아니잖아'
"미루, 너는 내 방으로 곧장 올라오갈."
황진이는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여주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행수님."
"내 듣기로는 네가 이 진사님과 약조를 했다고 들었는데."
"...예? 무슨 약조를...."
"이 옷을 주면 네가 알 것 이라고 했다."
"아....."
여주는 그제야 자신이 그의 옷을 빨아놓기로 한 사실을 알아챘다.
"무슨 약조인지 더 깊게 묻지는 않겠다. 하지만 오늘같은 실수는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샹유들이었지만 고위관리들을 뫼실 때는 더더욱."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거라."
여주는 황진이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석민이 두루마기를 들고 빠져나왔다.
두루마기의 끝자락에 술로 인한 얼룩이 선명했다.
여주는 자신의 방 앞 마당에 앉아 우물에서 떠온 물로 석민의 두루마기를 헹구기 시작했다..
"에휴....."
"여주 낭자의 한숨소리가 예까지 들립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 한솔 도련님...."
여주의 방 바로 옆, 기방과 담 하나를 차이에 두고있는 옆 집 최씨 댁 아들이 눈에 천을 두른 채 마루에 앉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기분이 안좋은 일이 있던게지요."
"아.... 제가 오늘 일을 그르쳤습니다."
"어떤 일을요?"
"오늘... 성균관 유생들께서 저희 기방에 행차하셨는데, 그 방을 제가 뫼시게 되었습니다. 근데 제가 그만 실수로.... 진사님의 옷에 술을 쏟았습니다."
"저런..... 진사님이 노하지 않으셨나요?"
"다행히 성품이 인자하신지라 큰 성은 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제게 옷을 맡기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아닌 밤 중에 물소리가 들린거군요. 여주 낭자께서 오늘 참 힘드셨겠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제 팔자인 것을....."
"아, 낭자는 무녀였다고 하셨지요."
"실은 오늘 잠시 가매(假寐,낮잠)을 청하였는데, 그 꿈에서 사내가 웃으며 행수님께 옷을 건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럼 그 사내가 진사님인게로군요."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여주는 미소를 살짝 머금고 하늘을 쳐다보며 한솔에게 답했다.
"한솔 도련님....."
"예, 여주 낭자."
"오늘은.... 달빛이 참으로 어여쁩니다. 도련님도 이 달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낭자의 말만 들어도 달이 제 품에 안긴 것 같습니다."
한솔은 손으로 자신의 눈을 덮고있는 천을 더듬으며 답했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한솔 도련님도 들어가 주무시지요. 밤공기가 꽤 춥습니다."
"낭자 먼저 들어가세요. 전 낭자 말처럼 달빛을 더 즐기겠습니다. 여인네가 찬 공기를 쐬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낭자 먼저 들어가세요."
"그럼, 저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여주는 석민의 두루마기를 잘 헹구어 나무 사이에 걸어둔 줄에 조심히 널어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잘 채비를 했다.
야장의(夜長衣, 잠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기위해 기수(이불)위에 누웠지만 영 잠이 들지 않았다.
'아까 김 생원님을 통해 본 건 뭐였을까.....'
그녀는 자신이 본 민규의 미래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신통함은 사람의 손 끝을 통해 미래를 볼 수 있기에
술 상을 내고 민규의 농으로 그의 손이 맞닿았을 때, 그녀는 그의 미래에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뗄 수 밖에 없었다.
'평소 내가 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지 보였던 것인데... 어찌 이런 무의식 중에 생원님이 흘러온 것이지.....'
여주는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얽히고 섥히어 이내 생각을 멈추었다.
'생원님은 옷을 언제 찾으러 오실려나.....'
너무 고단한 하루였기에 수많은 생각들은 그녀의 잠을 방해할 틈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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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솔시★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놀랐습니다!!
정말 너무너무 감사드리구요ㅠㅠ 제가 필력이 부족해서 기대에 못미쳤을까봐 많이 걱정되네요ㅠㅠ
그래도 최선을 다해 글 써나갈테니까 많은 응원!! 부탁드릴게요~♥
[암호닉]
마듀, 제성
감사해용 8ㅅ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