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 첫사랑
w. 펄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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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1년에 한 두 번, 몸살이나 감기로 크게 앓곤했었는데 하필 그게 지금일줄이야. 나는 내가 건강함의 표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보다.
물놀이를 다녀와서,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꿈도 꾸지 않고 푹 자나 싶었는데.
오한에 눈이 번쩍 뜨였다. 긴 팔, 긴 바지 잠옷을 입고 있는데도 몸이 벌벌 떨렸다. 아까 젖은 옷을 오래 입고 있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가
발을 다쳤다는 걸 잊어버리고 다친 발로 땅을 디뎠다가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아버렸다.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겨우 침대를 딛고 일어났다.
후들거리며 책상으로 걸어 가 서랍을 뒤졌다. 감기약을 찾았지만 방 안이 너무 어두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 앞이 흐려왔다.
결국 약 찾는 걸 포기하고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손을 위로 뻗어 책상 위를 휘저었더니 핸드폰이 손에 잡혔다. 떨리는 손으로 잠금을 해제하고 메신저를 켰다.
최근 대화 목록에 떠 있는 경수와의 대화 방을 찾아 들어갔다. 아, 글자가 자꾸 두 개로 겹쳐 보인다.
[경]
[겨ㅇ수야]
[감]
[간기야]
[감깅ㅇ좀]
[감기약]
겨우 감기약이라는 단어를 보내자마자, 내 의지와는 다르게 눈이 감겨왔다. 손이 툭 떨어져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를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
그리고 눈을 떴다. 눈이 부었는지 눈꺼풀을 움직이기가 쉽지가 않았다. 힘겹게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수액, 뿌연 공기, 그리고 ……. 경수?
꿈인가 하는 생각에 손을 들어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아픈 걸 보니까 꿈은 아닌데 얘가 왜 여기 이러고 있지, 하는 마음에 전에 내가 경수의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던 것 처럼 내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는 듯 한 경수를 한 손으로 흔들었다.
경수야, 경수야, 일어나 봐. 너무 살살 흔들었나 싶은 생각에 손에 힘을 주어 경수를 꺠워보려 했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으, 몸을 일으켜 세우려 침대
매트리스를 짚는데도 어느새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그 때였다. 엎드려있던 경수의 몸이 움찔,
크게 떨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경수의 눈과 꺠어난 나의 눈이 마주쳤다.
'일어났어? 괜찮아?"
응, 괜찮……. 내 대답을 잘라먹은 경수가 누워있어, 하며 내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나를 눕힌다. 경수야, 이거 뭐야? 나 많이 잤어? 궁금한 건 더 많았지만
애써 차오르는 질문들을 삼키며 경수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누워 물어봤다. 경수는 뭔가를 찾는 듯 내 책상 위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 얼마나 잤냐니까."
찾던 걸 찾았는지, 책상 위를 뒤적거리던 손길을 멈추고 경수가 다시 내 침대로 다가왔다. 너, 이틀. 경수가 내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더니 나에게 내민다.
엄마에게 전화가 가고 있었다. 우리 엄마한테 전화는 왜? 궁금하다는 듯 내가 묻자 경수가 픽 웃으며 대답한다. 아주머니가 너 걱정 많이 하셨는데, 일어났으니까
목소리도 들려드려야지. 경수의 말을 듣고, 며칠 전 경수가 발작했던 밤이 지나고 내가 경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연희 아주머니, 어제 많이 놀라신 거 같던데 한 번 내려가 보는 게 어때?"
아, 맞다. 바보 박에리.
곧 통화 연결음이 끊기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에리? 에리니?]
"응, 엄마. 나야."
이제 막 일어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갈라지기까지 했다. 의도치 않은 음이탈에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큼, 큼, 헛기침을 했다.
[딸.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 미안, 내가 너무 신나게 놀았나 봐, 엄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약간 물기가 서려있는 것 같기도 하고. 코끝이 찡해졌다. 우리 엄마 이런 걸로 울 사람이 아닌데.
[연희 아줌마한테 대충 얘기 들었어. 의사선생님이 스트레스 탓도 있다고 하더라. 우리 딸 많이 힘들었나보네.]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엄마. 사실 좀 힘들었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 일곱 살 떼쟁이처럼 전화기를 붙잡고 엄마에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애써 웃어보였다.
"아이, 나 원래 낯선 곳에서 잠 못 자는 거 알면서. 갑자기 우리 집 아닌데서 자려니까 몸이 조금 힘들었나 봐. 원래 감기도 잘 안 걸리는데, 나."
[……. 그래. 힘든 일은 없는 거지? 괜히 엄마가 등 떠민 거 같아서 미안하네.]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괜찮아요, 내가 오겠다고 한 건데. 끝까지 책임져야지."
[그래, 이제야 내 딸 같네. 엄마가 가 봐야 하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 ……. 미안해 딸. 이럴 때 엄마가 옆에 있어줘야 하는데.]
"아니, 아니야. 괜찮아. 진짜로. 다 나았어. 연희 아주머니도 잘 해주시고, 경수도 잘 해주고. 새 친구도 생겼어, 응. 다음에 또 전화할게."
[……. 엄마가 조만간 시간내서 꼭 갈게. 진짜 미안해.]
"엄마는 …….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알았어요, 응. 바쁜거 이해 해. 알지. 네, 끊어요."
엄마가 오지 못할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니 왠지 기분이 서러워져서 울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서운함을 꾹 눌러담으며 괜찮아, 나는 괜찮아, 하는 말을 되뇌며 엄마와의 통화를 마쳤다. 참는다고 참는데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씩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다가 느껴지는 시선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
당황한 듯한 경수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언, 언제부터 있었어……. 당황스러운마음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나왔는지 경수가 헛기침을 하며 내 눈을 피한다.
"그게, 약, 주려고 나갔다가 들어왔는데……."
마침 네가 통화를 다 한 것 같아서……. 경수가 말끝을 흐리며 내 옆에 약 봉투처럼 보이는 것을 내려놓았다. 그게,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니었어. 미안.
담담하게 사과하는 경수의 말에 결국 웃고야 말았다.
"아,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 많이 난댔는데."
진짜로 털 나면 네 탓이야, 장난스럽게 경수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자 내내 표정이 좋지 않던 경수도 어쩔수 없다는 듯 나와 마주보고 웃는다.
이제 약 먹어, 하며 경수가 방의 불을 켰다. 내내 어둡다가 확 밝아지는 시야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핸드폰 액정에 비친 내 모습이 참 귀신 저리가라다.
"악!"
내지르는 비명에 경수가 놀랐는지 서둘러 내 옆으로 달려와 왜, 어디 아파? 다정하게 묻는다. 차마 내 얼굴 때문에 그렇다고 말은 못하겠고, 고개를 못 들고
조용히 말했다. 머리, 머리가 너무……. 이상해……. 내가 더듬더듬 말하자 경수가 아, 하더니 알겠다는 듯 잠깐만 기다려. 하더니 어딘가로 걸어가고,
무언가를 찾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윽고 잠깐 나좀 봐. 하는 경수의 목소리에 고개를 슬쩍 들어 경수를 보니 내 앞으로 내밀어지는 머리끈 하나가 보인다.
"고마워……."
한숨을 쉬며 경수가 내민 머리끈을 입에 물고 머리카락을 묶으려 손을 뒤로하는데, 무언가가 걸린다.
뭐지, 싶어 옆을 보니 수액과 연결 된 바늘이 손등에 꽂혀있다. 아, 수액……. 내가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경수의 시선이 내 오른쪽 손등에 꽂혀있는 바늘로 옮겨간다.
"……. 묶어줄까?"
우리 사이의 정적이 깨진 건 경수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묶어줄까? 내가 대답이 없자 재차 물어오는 경수다. 경수의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방금 내가 확인한 내 머리 상태는, 그러니까, 이틀을 꼬박 누워있느라 감지도 못해 기름지고, 떡지고, 한마디로 답이 없는, 그런 상탠데……. 나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경수가 다시 책상쪽으로 가더니, 거울 앞에 놓아 두었던 큼지막한 빗을 들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아, 안돼! 머리끈을 입에 물고 있는 탓에 발음이 살짝 뭉개진다. 안 된다는 내 말에 경수가 다가오던 걸음을 멈춘다. 왜? 순수한 궁금증을 담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그게, 그러니까.
"지금 내 머리카락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나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내 목소리가 축 처졌다. 내가 만지기도 싫은 머린데 어떻게 네 손에 맡겨. 이어 대답하는 내 말에 경수가 또, 웃는다.
"……."
경수의 해사한 웃음에 넋을 놓고 보고만 있었다. 연희 아주머니께서 에리야, 네가 온 후로 경수가 자주 웃게 된 것 같아 참 고마워,
라는 말을 해 주셔서 자꾸만 경수의 표정을 의식해서 그런가, 요즘 경수의 웃는 얼굴을 보면 계속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경수를 보면서 한참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멈춰섰던 경수가 다시 나에게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오, 오지 말라니까? 괜찮아. 어차피 이따 씻을……."
아예 머리끈을 손목에 감고 손사래를 쳤다. 그냥 빗만 줘, 빗기만 해도 괜찮을 거야. 진짜.
빗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경수가 빗을 등 뒤로 감춘다. 괜찮아,
"손 씻으면 돼."
저 쪽으로 돌아앉아 봐, 경수가 어느새 내 옆으로 와 앉으며 말했다. 아, 진짜 괜찮다니까. 화장실에서 내 등을 토닥여줬던 그 때처럼 경수의 향기가 훅 끼쳐왔다.
순간 그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진짜 괜찮대도."
경수는 굳어있는 내 어깨를 붙잡고 부드럽게 내 몸을 제 쪽으로 틀었다. 결국 나는 순순히 경수의 손길에 이끌려 몸을 틀고 앉았다. 한 번, 두 번, 경수가 빗으로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머리끈, 줘. 그리고 나에게 손을 내민다. 아으, 진짜 괜찮아. 라고 머리끈이 있는 손목을 감추려 하자,
나도 괜찮으니까 줘. 단호하게 달라고 하는 경수에게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결국 왼쪽 손목에 감아두었던 머리끈을 경수에게 건넸다.
이렇게 하면 돼? 빗어 둔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머리끈으로 감는 손길이 느껴진다. 부끄럽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다 됐다."
뿌듯한 목소리로 경수가 내 옆에 내려두었던 빗을 다시 가져가 책상 위에 올려둔다. 빗은 여기 둘게. 경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으, 응.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경수를 보기가 부끄러웠다. 지금 경수를 보면, 경수에게 내 빨개진 얼굴을 들킬 것만 같아서.
"그럼 난 나가볼게. 약, 꼭 챙겨먹고."
"……. 응, 고마워. 경수야."
"아니야, 뭐 이런 걸로. 아,"
"응?"
"그, 저번에 선물해준 거. 고마워."
그럼, 쉬어. 경수가 나갈 때 까지도 차마 경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미쳤나봐, 박에리. 여전히 화끈거리는 얼굴을 양 손으로 감쌌다.
차가운 손이 뜨거운 이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혀주길 바라면서.
얼마간을 그러고 있었을까. 팔이 저려와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림과 동시에 요란스럽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올라오나 싶어 고개를 쭉 빼 문 밖을 살펴보려 하는데 도저히 보이질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백현이 한 손에 물병을 들고,
다른 손엔 컵을 들고 요란스럽게 들어온다.
"이 몸, 등장!"
컵을 든 손을 쭉 뻗으며 이상한 말을 한다. 순간 백현의 손에 들려있던 유리 컵이 백현의 손에서 미끄러지려고 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아, 변백현!
"왜, 왜?"
다행히 컵은 떨어지지 않았다. 별안간 큰 소리를 내 놀랐는지 당황한 백현이 우물쭈물하며 물병을 들고 내 옆으로 다가온다.
"아니, 아까 경수가 약만 가지고 가고 물은 두고 갔길래 가져왔지."
아아, 그랬어? 하고 백현을 보자 백현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처럼 나를 쳐다본다. 뭐, 왜. 심드렁하게 대답해주고 경수가 가져다 둔 약 봉지를 들어
약이 들어있는 봉지를 하나 꺼내 윗부분을 뜯고 털어넣으려다 백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
물을 달라고하자 백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만있다. 아니, 물 달라니까. 재촉을 하자 마지못해 준다는 듯한 표정으로 컵에 물을 따라 내게 내민다.
약을 먹고 고마워, 하며 백현에게 웃어보였다. 그제서야 백현이 시무룩해하던 표정을 풀고 웃는다.
"그 말 언제하나 했네."
"무슨 말?"
"고맙다는 말."
내가 물 가져다 줬잖아, 라는 말을 덧붙이며 백현이 약 봉투를 집어든다. 어어, 그거 어디 가져가게? 하고 묻자 너 약이랑 같이 자려고? 하며 내 책상
위에 약 봉투를 올려놓는는다. 아아, 하고 수긍하자 백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나에게 나가온다.
"이번엔 왜?"
"……. 미안하다고."
"뭐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백현이 그러니까, 엊그제 내가 계곡가자그래서. 너 옷도 못챙겨서, 그래서, 아팠잖아. 라고 한다.
"야, 그게 왜 네가 미안해할 일이야."
"어?"
"아니 계곡 간다고 한 건 나잖아. 나 때문이지 뭐."
"그래도……."
"아 정말. 나 때문이라니까?"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하지 마, 라고 하자 백현이 울상을 지으며 내 옆에 털썩 앉는다.
"저번에 경수도 내가 괜히 물놀이 하러가자고 해서 아팠었단 말이야."
"……."
"근데 너까지 이렇게 아프니까,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가만히 듣고있자니까 어이가 없어서 백현의 머리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한 대 먹여줬다. 아! 왜 때려! 야, 지금 내 손 안보이냐? 힘 하나도 안 들어갔거든.
혀를 내밀며 백현에게 말하자 백현이 픽 웃으며 대꾸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놀러가자고 하면……."
"갈건데?"
"어?"
"네가 뭐라고 하든 무조건 갈 건데?"
"……."
이번엔 백현이 말이 없다.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미안해 하지도 말라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백현이 와락 나를 안아온다.
"야, 갑자기 왜이래!"
당황한 내가 백현을 밀어내자 쉽게 밀려나는 백현이다. 백현이 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렇게 말 해 줘서.
사담/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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