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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문을 닫은 사무라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와 내 침대로 추정되는 곳에 가방을 내려 놓았다.
그리곤 서랍 문을 열어 작은 장도리로 가방 열쇠 부분을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쾅, 쾅. 나는 그 소리에 허겁지겁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사무라의 팔을 잡고 그를 말렸다.
"뭐하는 거야, 지금!"
"난 누가 내 팔 잡는 거 싫어해. 그러니까 넌 네 할 일이나 해."
"내 할 일?"
"팻말에 이름 쓰는 일 말이야."
콰직, 여러번의 망치질 끝에 가방 문이 열렸다. 사무라는 가방을 열고 안에 있는 내 짐들을 이리저리 파헤치기 시작했다.
옷 무더기 틈으로 나오는 일기장, 여러권의 책, 필통, 그리고 아버지의 편지가 나왔다.
사무라는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편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사무라가 손을 뻗은 것은 내가 여러개 챙겨 넣은 붕대.
사무라는 붕대 하나를 집어 내게 건네주었다.
"설명."
"내가 이걸 너한테 왜 설명해줘야 하니."
"안 해줄 거면 말아."
사무라는 곧 흥미가 떨어졌는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붕대로 시선을 옮겼다.
또 저 밧줄을 목에 감으면 어쩌지, 나는 사무라가 먼저 손을 뻗기 전에 밧줄을 잡아 챙겼다.
"갖고 싶었어?"
"미, 미쳤다고 내가 이걸."
"너무 겁 먹지마."
"겁 안 먹었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데."
별 안간 신기한 아이다.
나는 사무라의 끈질긴 시선을 피해 책상 앞으로 가 이름을 적었다. 아무리 적어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내 이름.
그때 뒤에서 소리없이 서있던 사무라가 내가 다 적어놓은 팻말을 낚아채 보았다. 손도 발도 빠른 도둑같은 아이였다.
"뭐하는 거야!"
"아키모토 아리카. 얼굴이랑 안 어울리네."
"너가 무슨 상관이야."
"나도 안 어울려, 내 이름이랑."
"네 이름?"
"난 조선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너도 그러냐?"
내가 어떤 애인줄 알고 조선 이름을 들먹이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이곳 사람에게 조선 이름을 들먹였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
"여기선 조선 이름이던 조선 말이던 쓰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를거야?"
사무라의 표정이 새침떼기 여자 아이처럼 변했다. 나는 나를 앙칼지게 바라보는 사무라를 보며 말을 얼버무렸다.
사무라는 친일파의 자식이 아닌가, 돈이 많은 집안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친일파의 더러운 냄새 따위는 나지 않았다.
사무라는 도대체 어떤 아이인지,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너처럼 눈이 맑은 조선인은 거짓말을 안 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난 다 알아."
사무라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난 모르는 게 없어."
사무라의 눈도 새파란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
사무라는 자신이 팻말을 걸어 놓겠다며 휘적휘적 문 앞까지 걸어나갔다.
굳이 필요하지 않는 친절을 베푸는 사무라는 이래저래 신경이 많이 쓰이는 아이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 아이와 함께 살면서 내가 여자라는 게 들키지 말아야 할텐데.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사무라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조선 이름이 뭐야?"
내가 묻자, 사무라는 태연하게 답했다.
주구장창 들었던 일본어가 아닌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조선말로 말이다.
"태형."
"응?"
"김태형."
태형,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