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감화서
w.규닝
14.
초겨울의 한기가 알알이 박힌 서릿발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퍼부어지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눈더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꺾인 잔가지가 큼지막한 바위 위, 수북이 쌓인 눈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겨울은 점점 그것의 중심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더는 추워질 수도 없으리라 여겨질 만큼 강추위가 계속되었고, 홑겹의 도폿자락을 스미는 한기는 이미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체력에 치명적이었다. 그것은 성규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받아 놓은 귀 덮개는 공연히 방구석 어딘가로 던져놓고 집을 나선 성규가 꽁꽁 얼어붙은 몸을 움츠리며 대궐과 집을 오가던 것도 벌써 겨울의 중반쯤으로 접어들었다. 혹독한 바람으로 끝이 헐어버린 갓을 당겨쓰며 또 너댓번은 고쳐 썼다.
그 일이 있고부터 한동안은 또다시 궐에만 묶여 살다시피 지냈다. 일부러 궐 바깥에는 걸음하지 않는 이유는 오롯이 우현의 탓이었다. 혹 실수로라도 만나게 된다면 가까스로 다잡은 마음이 힘조차 써보지 못하고 쉬이 무너질 것만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다. 매일 밤을 대유재에 헌납하며 피곤함에 절절 절어 바닥까지 떨어지려는 머리를 힘겹게 들었다. 그래도 이토록 피곤한 것이 도리어 나았다. 잠시나마 우현을 마주하게 되는 것보다는. 성규는 뜻하지 않게 마음이 흐려질 때쯤이면 소리 나게 제 뺨을 제 손으로 내리쳤다. 집중하자. 의서에 집중하자. 이미 너덜너덜해지다 못해 책장이 덜렁거리는 서책을 억지로 붙잡아보았다. 그에게도 분명, 서릿발 무성한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우현은 그날부로 쉬이 넋을 차리지 못했다. 조금만 무엇인가에 집중을 할라치면 자꾸만 누군가가 등 뒤에서 제 이름을 불러왔기에. 어디에 가십니까? 너무하십니다. 바로 잠에 드십니까? 꼬박꼬박 공대를 하며 무의식의 뒤를 그림자처럼 좇아오는 목소리가 환청마냥 귓가며 머릿속을 맴돌았다. 느즈막한 시간, 간단한 약주를 걸치고 반궁으로 되돌아오는 길목에서는 서운합니다. 하며 고개를 숙였던 인영이 제 옆에서 되살아나는 것도 같았고ㅡ 섬돌 위로 속속 쌓이는 백설을 보고 있자면 머릿속에서 환영처럼 무엇인가는 살아났다.
도헌께서는 반궁에서 몇 해나 겨울을 나셨습니까? 조용조용한 목소리는 제게 그리 물었다. 우현이 차게 얼은 마룻바닥 위에서 넋을 놓았다.
“도합 두 해….”
재작년과 작년. 두 해밖에 나지 않았다. 그 때와 같은 대답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트인 공기 속으로 섞여들었다.
정이 동하면 위험하다 했다. 언젠가 제게 서생원이 일렀던 말은 이제야 꿈결처럼 저린 마음에 와 닿는 듯 했다. 저와 달리 자신은 위험한 게 무엇인지 알기에 하지 않을 생각이라 말하던 목소리가 화살처럼 제 속을 가르고 들어왔다. 앞마당 잣나무의 빈 가지 끝으로 넋을 빼던 우현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과연 명석한 녀석이었다. 지독하도록 맞는 말이었으니까. 정이 동하면 위험했다. 꼭 지금처럼. 아니 꼭 지금을 염두해 두고 한 말이었던 것처럼. 우현은 제가 충분히 위험하고 또 위태로운 벼랑 끝에 오직 혼자만이 몰려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밉고 또 미운 제 사람은 결국, 위험한 일에 함께해주지 않았다. 먼저 벼랑 끝을 벗어난 사람을 향해, 마음속으로 밤새 먹을 갈았어도 그 끝으로 더욱 내몰리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우현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렸다.
온몸으로 떨어지는 벼락을 저 혼자 감당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댓가임이 분명했다. 무모한 연심을 앞 뒤 잴 것 없이 시작해버린 것에 대한.
그러나 같은 하늘을 탄 벼락은 두 갈래였다. 다른 곳에서도 그것은 몰아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새에. 같은 시각. 성규가 선 땅은 이미 미세하게 금이 가고 있었다.
1799年. 영춘헌의 처마 아래, 서릿발에 사무친 보랏빛이 어렸다. 언제나 그랬듯 한시가 바빴던 내의원이었건만 그 날만은 기운이 달랐다. 궐내 각사들을 지나, 내의원의 문턱을 넘자 마주한 난장판에 성규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어깨며 옷 속을 후벼 파는 강추위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끔 허리가 펴졌다. 가늘은 눈이 서서히 커졌다. 관복이며 관모를 다듬을 새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분주하던 의관들이 본청에서부터 다른 각사로 달음박질하다가 바닥으로 넘어지는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짝을 잃은 신이 눈바닥 위로 흐트러져 있기도 했다. 뒤주머니 끈을 쥐었던 성규의 손에 힘이 풀렸다.
“…김 권지!”
문간채를 뛰어 지나던 이가 마악 도착한 성규를 불렀다. 허공으로 넋을 놓았던 성규의 눈에 정신이 돌아왔다. 곧이어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한 눈이 허겁지겁 제 앞에 선 이와 마주했다.
“아. 판관 나리…”
“김 권지, 이제야 오는 겐가? 조참 때부터 얼마나 찾았는데!”
성규의 앞에 멈춰 선 판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초조함으로 얼룩진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걸 보자 성규의 입도 서서히 벌어졌다. 판관의 등 뒤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의관들의 관복이 쉴 새 없이 눈앞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황 판관은 거의 혼이 나가 뵈는 성규의 어깨를 맞잡았다. 김 권지.
“잘 듣게나. 수의 대감께서 방금 전 영춘헌에 드셨네.”
뒤주머니 끈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자 도리어 판관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헌부 관원들이 몰려왔었네. 당장 수의 대감과 해당 의관들을 영춘헌에 들라 하라고.”
“허나 판관 나리, 수의 대감께서 평소에 드셨던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각입니다.”
“그래. 그 뜻이 무엇이겠나?”
성규의 입이 다물어졌다. 판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자네는 마침 자리에 없었네. 그래서 그동안 탕약 조제를 거들던 의관이며 쓸만했던 당상관들 가릴 것 없이 모두 영춘헌에 들었고.”
“…저도, 저도 가야 합니다.”
“끝까지 듣게. 대감께서 내린 명이네.”
“…….”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는 영춘헌에 따라 들어서는 아니되네. 혹시라도 뒤따라올 자네의 출입을 엄금하라고 대감께서 그리 이르셨어.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성규의 손끝이 결국은 힘에 부쳐 덜덜 떨렸다. 절반 정도 벌어졌던 입이 다물어졌다. 울멍울멍 화기가 차오른 눈이 종래에는 흐려졌다. 성규의 어깨를 다잡은 판관의 손에 힘이 실렸다.
“대감이 그리 이르신 데에는 이유가 있잖는가. 부디 잘 헤아려보길 바라네. 그리고 일단…”
“…….”
“돌아가 있게. 집으로.”
갑작스럽기도 했으며, 혹은 전혀 갑작스럽지 않았던 기별이기도 했다. 이쪽에서 맞은 벼락은 그러했다. 성규는 혼비백산으로 뛰어오던 사자관 하나가 본청으로 몸을 들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황 판관의 심도 있는 목소리가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심장에 더욱 무거운 돌덩이를 달아주었다.
*
“대감.”
상서원 앞을 바삐 줄지어 가던 기인 행렬이 일제히 멈추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헌부 관원들의 행렬 또한 그처럼 멈추었다. 비교적 좁은 각사의 마당에서 맞닥뜨린 두 행렬이 서로를 마주보고 서게 되자 각 무리의 수장은 자연스레 얼굴을 나란히 했다. 초조한 걸음을 옮기던 수의의 시선이 올곧게 그에게로 향했다. 대사헌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영춘헌으로 드신다는 소식을 들었소.”
“그러하오. 한시가 바쁘니 내 먼저 자리를 비키겠소.”
그러나 옆으로 비켜가려던 수의의 앞을 다시 가로막은 것은 대사헌 쪽이었다. 그 바람에 수의의 뒤를 따르던 의관들의 행렬 또한 주춤했다. 수의의 눈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무슨 용건이시오?”
“귀감에게 모두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
“노신의 어쩔 수 없는 노파심이라 여겨 주시고 들어 주시오. 어쩌면 승정원에서도 오늘 밤만을 염두해 두고 각사 일기를 작성하고 있을 지도 모르니…”
대사헌의 말에 수의의 눈이 험악하게 굳었다. 그에 반해 대사헌의 입매에는 묘한 웃음이 서리자 온 몸에 분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수의가 목구멍 안쪽으로 그의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상당히 불쾌한 발언이오. 그대는 나의 심기를 건드리려 작정하고 나오신 것이오?”
“선대 왕. 금상의 아비 되시는 분을 기억하시오?”
“대사헌!”
“등창이셨잖소.”
대사헌의 눈이 알게 모르게 호선을 그렸다.
“대감께서도 그 때 선조 왕께서 승하하신 자리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소. 허나 이젠 대감의 몫이오. 제 아비와 같은 병에다, 같은 자리….”
“…….”
“영춘헌에서 두 번의 같은 역사가 쓰여지도록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오.”
진심으로. 그 말을 끝으로 사헌부의 행렬이 먼저 자리를 비켰다. 대사헌의 걸음이 수의를 스치고 지나자 그 뒤를 이어 사헌부 감찰들의 무수한 걸음이 방망이소리처럼 의관들의 속마음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수의의 뒤쪽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그를 뒤따르던 이들의 가슴도 그들의 수장처럼 짓이겨져가고 있었다. 수의의 눈동자에 초점이 가셨다. 그의 신은 한참동안이나 상서원의 문턱을 넘어 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침소에 드셔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영춘헌으로 걸음을 하던 내관 하나가 급기야는 그리 아뢰었다. 그 때에서야 수의의 발걸음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의 뒤를 따르는 당상관이 손에 든 시침 상자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
이미 난장판이 되어버린 내의원에 자리를 지키고 있어봤자 득이 될 것은 없기에, 성규의 걸음이 집을 향해 바삐 되돌아왔다. 성규의 눈시울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집을 향해 뛰듯이 걷던 성규의 걸음이 돌부리에 걸리고, 세간의 장사치의 봇짐에 채이기를 여러 번이었다. 결국은 땅거미가 어스름히 앞마당에 드리워졌을 때 즈음에 집 앞으로 도착한 성규의 숨이 거칠었다. 차게 꺼진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뒤주머니며 필낭을 내려 둔 성규가 방 안을 원으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이 초조하게 빨라졌다.
좁은 방 안을 빠른 걸음으로 돌기도 한참. 급기야는 제 손톱을 물어뜯느라 걸음은 느려졌다. 하얗게 튼 입술을 절로 문 성규가 손톱을 입에 물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툭, 툭. 그것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성규의 감은 눈 사이, 미간에 번듯이 주름이 잡혔다. 조금 전 보았던 내의원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생되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성규가 초조히 굴리고 있던 걸음을 멈추고 죽통을 챙긴 후 한달음에 방에서 뛰쳐나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덜덜 떨리는 손이 정처 없이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들끼리 맞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달그락 달그락, 조용한 부엌을 울렸다. 어느덧 바깥에는 끊겼던 눈이 나리고 있었다. 컴컴하게 꺼진 하늘에서 소복소복 눈이 쌓여왔다. 그것은 함께 부는 바람을 타고 장독 위에도, 문간 위에도, 발목만큼이나 올라온 문턱 위에도 내려앉았다. 식기가 맞부딪혀 내는 소리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결국은 제 손바닥만 한 그릇을 꺼내어 든 성규가 챙겨 온 죽통에 담겨있던 물을 그릇 안으로 쏟아내었다. 절반만큼 찬 물이 그릇 속에서 일렁였다. 성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우현에게 내어준 적 있는 어정수였다. 성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릇을 집어 들었다. 물이 흐르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떼어진 발걸음이 부엌의 문턱을 지나 밖으로 향했다. 이미 뚜껑 위로 두 뼘은 높게 쌓인 장독대 위의 눈을 한 손으로 쓸어내린 성규가 마침내 비인 자리에 그릇을 올려두었다.
장독 앞에 꿇어앉은 성규의 무릎이 눈더미에 묻혀 젖어들기 시작했다. 독 위에 올려 둔 그릇을 멀거니 쳐다보던 눈이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이미 벌겋게 달은 눈자위가 깜빡이자 방금 전까지 시야에서 어른거리던 눈물이 떨어졌다. 곧이어 무거운 고개가 속절없이 바닥으로 가 닿았다.
그 누구보다 애가 닳는 마음이 눈바닥 위로 덜컥 꺼내어진 것만 같았다.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 앉은 탓에, 눈 위에 맞닿은 소매가 무릎의 적삼처럼 젖어 들어갔다. 눈물이 뚝뚝 눈 위로 나리고 있었다. 컴컴하게 구멍이 뚫린 하늘에서 시린 눈송이들이 장독 위에도, 등 위에도, 갓을 벗은 머리 위에도ㅡ 떠다 놓은 어정수 위에도 쉼 없이 떨어졌다.
*
“탕약을 올려라.”
초조한 중전의 목소리가 불같이 호령했다. 평소보다 외려 탕약을 들이기에 시간이 걸리자 침소 안에 모인 대비며 중전의 안색 또한 그만큼이나 굳어가고 있었다. 그들과 마주앉다시피 한 수의의 손끝이 그처럼 딱딱하게 얼었다.
사실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밤 왕의 병세를. 이미 침소에 들기 전부터 자리해 앉아 있는 대비와 중전의 모습을 보자마자 직감 한 것이었다. 약침을 빼내어 든 수의의 손에 긴장이 실렸다. 수의의 곁으로 약물 그릇을 옮겨다 놓은 의녀가 앉은 곳에 계속해서 밀초를 켜 두기 시작했다. 눈앞은 차근차근히 환해지고 있었다. 경혈(經穴)을 짚은 손이 약침의 끝을 조준해 왔다. 수의의 눈은 선명하게 살아났다.
“내의원은 무얼 하고 있는가? 어서 탕약을 들이지 않고!”
중전의 목소리가 초조하게 올라가자 침소 앞을 지키고 섰던 내관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갔다. 덩달아 꿇고 앉았던 당상관들 두어명이 두서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앉았다. 뭣들 하고 있는 게야! 그 꼴을 보자 더욱 초조함이 치민 중전의 목소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약침을 찔러 넣던 수의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마마. 탕약은 뒤로 하고라도 먼저 시침부터 시작하겠나이다.”
“뭐야?”
이미 경계에 날이 선 중전의 눈이 쏘아보듯 수의를 향했다.
“그럴 순 없네! 전하께서는 늘 드시던 탕약으로 잠시나마 차도를 보이시곤 했으니 거를 순 없단 말일세. 특히나 오늘 같은 날에!”
이미 평정심을 잃은 목소리가 당장 탕약을 들이라며 고함을 치자 대비의 팔이 그를 막았다. 한바탕 날이 섰던 목소리가 가시고, 조용해진 침소 안에 먹먹한 목소리가 그녀를 달랬다. 두고 봅시다.
“일단 믿고 봅시다, 중전. 어의께서는 계속 하시게….”
대비가 우선 중전을 어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수의가 크게 부풀은 종기 위에 천을 덧대었다.
길고도 길 밤은 이제가 겨우 시작이었다.
*
“야. 너 이리 와 봐라.”
청재 마루 끝에 걸터앉은 우현이 어린 재직 하나를 불러 세웠다. 취침(就寢)을 이르기 위해 막대기를 들고 앞마당을 가로질러가던 재직이 우현의 부름에 가던 방향을 틀었다. 우현이 앉은 마루 앞까지 후닥닥 달려 온 재직이 공손히 머리를 까닥였다.
“부르셨어요?”
“아까부터 니들 왜 실실 웃고 있는 거야?”
“예?”
“좀 전부터 다들 내 쪽만 보면서 웃고 있잖아. 니들 내가 우스워?”
이미 조금 전부터 우현의 심기는 어긋나있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보려 마루에 나와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것도 잠시, 저만치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제 쪽을 쳐다보며 키득이고 있는 재직들에 묘하게 기분이 수틀리고 있었다. 우현은 저희들 머리 위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탈탈 털어내며 저를 보고 웃고 있는 재직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우현의 앞에 불려다 세워진 재직이 저 쪽에 모여 있는 저희들 무리며, 눈앞의 우현을 번갈아 보았다. 재직이 코를 훌쩍이다 공연히 제 뺨을 긁었다.
“아. 유생님을 보고 웃는 게 아니어요!”
우현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럼?”
재직이 우현이 앉은 마루의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켰다. 여길 보고 웃은 것이지요.
“아까부터 쥐새끼 한 마리가 자꾸 요 아래 수로 위를 달음박질 하는데, 눈에 막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꼴을 보고 저희끼리 웃겨 웃은 것이어요!”
정말이지 별 것 아니라는 듯, 재직이 헤헤거리며 웃었다. 꼭 그렇지? 하며 동의를 구하는 듯 뒤를 향했다가 온 고개가 배시시 웃자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던 어린 재직들의 머리가 마구 끄덕여졌다. 그러나 우현의 눈빛은 험해졌다.
재직의 손가락질을 따라, 마루 아래로 머리를 숙여 본 우현이 수로 위를 찬찬히 뜯어 살폈으나 쥐는 보이질 않았다. 대신, 자그마한 것이 눈더미를 마구 헤친 자욱이 남아있어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현의 고개가 홱 쳐들어졌다.
“그게 그리 웃긴 일이더냐? 쥐새끼가 길을 잃은 것이?”
“예. 사람인 우리들은 온통 별밭인 백설 위를 밟고 노는 게 일이온데, 저 조그만 금수 새끼는 그것을 즐길 줄도 모르고 그 안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퍽 재밌었습니다.”
쥐가 했던 행동을 흉내 내려 하는 것이었는지, 이리저리 손짓까지 동원하여 설명을 늘어 놓은 재직이 종래에는 제 정수리 위를 탈탈 털어내며 웃었다. 우현의 속에 냉수가 부어졌다. 우현의 눈꼬리가 홱 올라갔다.
“쥐새끼 괴롭히지 마라!”
“예?”
“그것들도 모두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이 세상에 난 것들이 아니겠느냐? 이 조막만한 것들이, 금수 한 마리 귀한 줄도 모르고.”
저리 가서 놀아라! 급기야는 재직의 이마 위에 딱밤을 매긴 우현이 제 성에 못 이겨 씩씩댔다. 졸지에 딱밤을 먹은 재직의 헤헤 웃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앙다문 재직이 슬금슬금 우현을 올려다보았다. 우현의 인상이 평소보다 곱절은 좋지 않아 뵀다.
‘소인은 매년 이듬해 즈음엔, 사암침법과 동의보감을 외웠습니다.’
‘…….’
‘애초에 제세구민에 뜻을 둔 의학생도들에게 겨울을 나는 방법이란 오직 그런 것이었습니다. 취재를 위해, 또 다음 취재를 위해. 식년시를 위해, 또 다음에 있을 증광시 초시를 위해. 소인의 겨울은 매년 그리 절실하기만 했습니다.’
‘…….’
‘허나 소인, 반궁에 배당된 의관이니만큼 한 번쯤은 이곳에 쌓인 눈을 보고 쉬어보고 싶습니다.’
우현의 머릿속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빙빙 돌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우현에게 딱밤을 먹은 재직이 제 이마를 여러번 문지르다가 마루 위에 올려두었던 막대기를 슬그머니 집어 들고 자리를 비킬 준비를 하며 게걸음을 하였다.
“그래봤자 어차피 봄이 오기도 전에 얼어 죽을 것들 아닙니까요?”
그리고는, 우현에게서 이렇다할 말이 돌아오기도 전에 지레 고개를 꼬박 숙인 재직이 멀찌감치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 한참을 흐트러지고 있던 우현의 머릿속에 재직의 마지막 말이 쿡 박혔다. 우현의 눈빛이 재직의 뒤꽁무니를 향해 사납게 틀어졌다.
저 쌍놈이! 이미 멀찌감치 떨어진 뒷모습에, 입모양으로만 욕지기를 뱉은 우현이 괜한 주먹을 들어보였다. 재직의 뒷통수에 두어번 꿀밤을 먹이고 나서야 허공에 놓인 우현의 주먹이 천천히 내려왔다. 취침이요! 취침! 각 방들의 앞까지 내달리며 취침을 이르는 재직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히 청재의 앞마당을 울렸다.
…얼어 죽기는 누가 얼어 죽어? 요즘은 키도 땅딸만한 것들이 아주 못하는 말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우현이 방 문 쪽으로 돌아앉았다. 우현의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그 때처럼 조용조용했던 목소리가 하릴없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궁에 쌓이는 눈은 참 아름답겠습니다.’
일부러 눈더미로부터 등을 돌아앉은 우현이 결국에는 사납게 방문을 열어 젖혔다. 뜨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드러누워 있던 그의 방우들이 고개만 빼어 들고 우현을 살폈다. 이제야 들어오는 겐가? 우현은 그들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방구석에 몸을 돌아앉았다.
괜히 쓸데없는 데에까지 서생원을 이입시켰던 것이라, 괜한 저를 자책하며.
*
탕약은 결국 들여졌다.
당장이라도 탕약은 취해야 한다는 중전의 성화에, 뜨고 있던 침마저 거둔 수의가 새로 들어온 약을 떠 올려, 의식이 없는 왕의 입에 흘려 넣어 주었다. 자꾸만 입가로 흐르는 탕약을 닦고 또 닦은 것도 한참이었다. 결국은 한 사발을 모두 비우고 난 후에서야 왕의 머리맡에 자리를 지키고 앉았던 중전의 냉가슴이 쓸어졌다. 우려하던 바를 게워내고 난 이의 입이 조용해지자 침술을 뜨는 것은 한 층 더 수월해졌다. 자꾸만 피고름이 차는 종기 위를 다녀가는 침이 약물에 소독되고 닦여지기를 수차례였다. 방구들 위로 피 묻은 천이 늘어감과 동시에 수의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빠르게 맺혔다.
그러나 병세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는 차게 식었던 몸이 외려 들들 끓기 시작하고 있었다. 수의의 눈빛이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 시침을 찔러 넣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수의의 옆을 지키고 앉은 의녀가 자꾸만 열에 닳는 왕의 이마에 찬 헝겊을 올려두었다. 다물렸던 왕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열에 달은 숨이 간헐적으로 끊기며 뱉어지고 있었다. 수의의 눈동자가 심상찮게 가라앉았다.
“대감. 점점 열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
“화기에 듣는 탕약을 대령할까요?”
열과 같은 증상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은 차려진 것이 없었다. 수의의 눈이 끄덕여졌고 금방 곁에 앉은 의녀는 물러갔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왕의 입에서 자꾸만 숨이 끊겨 나왔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것이리라. 대비와 중전이 쉴 새 없이 수의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꼭 수의의 것처럼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보료 위에 누운 왕과 그의 손을 살폈다. 중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아. 저하! 곧이어 대비의 손이 그녀의 팔을 당기자 이어지던 중전의 탄식이 막혔다. 수의의 어깨 위에 바윗덩이가 올려졌다.
잠시 후에는 의식이 없던 왕이 쿨럭이며 잔기침을 시작했다. 그의 벌어진 입에서 미처 식도를 타지 못한 탕약이 역류하며 뱉어졌다. 순간 수의의 눈이 설마하며 키워졌다.
짙은 갈색으로 변질된 약이 왕의 옷깃 아래를 타고 흘렀다. 수의의 입 또한 천천히 벌어졌다.
*
살얼음이 서린 수정과의 단면처럼, 떠다 놓은 어정수 위로 눈송이가 소복이 쌓였다. 찬 물에 빠져들고 또 녹아들기를 반복하던 물 위로 얇게 얼음이 일자 그 위로는 책장처럼 두께를 더해가며 눈이 쌓이고 있었다. 장독 위로 계속해서 쌓이던 눈더미도 간간히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투둑, 떨어져 내렸다. 장독 아래 하염없이 떨구어진 고개 옆으로 쉼 없이 눈송이가 나렸다.
눈바닥 위로 닿은 이마가 빨갛게 얼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떠다 놓은 물 아래 굽혀진 허리가 벌써 한 시진(2시간)이 지나도록 펴질 줄을 몰랐다. 한결같이 몸을 굽혀 올리고 있는 절은 오직 영춘헌을 향한 것이었다. 대궐이 위치한 방향으로 놓인 머리 위에 찬 눈송이가 가늘게 쌓였다.
홑장의 도폿자락은 이미 완전히 젖어들어 있었다. 컴컴해진 하늘은 그와 대비되도록 하얀 눈을 퍼부어대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제는 차다는 감각마저 느낄 새도 없이 머리를 주려 앉은 성규의 볼이 꽁꽁 얼어 트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세게 물렸다. 눈바닥에 한 시진 이상 맞닿아 있던 손가락 끝의 맨살에 점점 감각이 사라져갔다. 성규의 눈이 꾹 감겼다.
부디 이겨내세요. 대감, 부디 오늘 밤을 넘겨주세요…. 밖으로 뱉을 수도 없이 간절한 목소리가 속으로만 절절히 절여졌다. 이제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침조차 차게 얼어 입 안이 시렸다. 성규가 간신히 숨만을 이어가며 엎드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달은 밝았다. 어찌되었든 이 밤은 흘러가고 있었다.
*
“혹, 남는 종이들 가지고 있나?”
한동안을 무엇인가에 토라져, 벽 위로 머리를 박고 있던 우현이 별안간 뒤를 돌아 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그의 방우들이 하릴없이 넘기고 있던 책장을 딱 덮었다. 종이?
“그것은 무엇에 쓰게?”
“아, 있어, 없어?”
“있긴 있네만.”
다른 방우가 그의 주역 책 아래 깔려 있던 여분의 종이를 던져 주었다. 팔랑거리며 우현의 앞까지 당도한 종이를 얼른 붙잡은 우현이 이부자리 위로 던져두었던 붓을 냉큼 집어 들었다. 그가 다른 방우에게로 대뜸 고개를 돌렸다. 먹 간 것 좀 있나? 그것도 좀 줘봐! 하여튼 뭐가 됐든 다짜고짜인 사람이었다. 방우가 혀를 끌끌 차며 제가 쓰려고 두었던 붓을 내어 주었다. 우현이 그것을 앗아가듯 가져왔다.
이대로는 도저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이제 이판사판인 셈이기도 했고. 우현은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제가 하고픈 말만은 하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일단, 제 녀석이 아무리 나를 피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할 말은 해야 하거든. 우현이 판판이 핀 종이 위로 붓모를 가져다 댔다.
쥐새끼에게. 무심코 붓을 놀렸다가 그 글자를 보고 퍼득 정신이 든 우현이 무의식중에 쓴 글자 위로 다시 끄적이며 먹을 입혔다. 그리고 나서 다시 쓴 것은 서생원에게. 허나 그것도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까맣게 칠을 해 지워버리고 다시 그 아래 글씨를 적어 넣었다.
김성규에게. 처음으로 적어 본 서생원의 이름이 문득 낯설다고 생각되었다. 이름까지만 적어 놓은 우현은 공연히 제 턱 끝을 간질였다.
*
시침을 뜨는 내내 왕의 잔기침이 는다 싶더니 결국 화가 일었다. 급기야는 크게 터진 기침에, 방금 전 들였던 탕약이 역류하였다. 서서히 불길한 직감은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차마 침착하게 천을 가져다 댈 생각조차 잃은 수의의 손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수발을 들던 의녀 둘이 왕의 입에서 넘치는 탕약을 닦아내었다. 대비와 중전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수의를 향했다. 수의의 눈동자에 초점이 나갔다.
“자, 잠시만 나와 보게!”
멀찍이 앉아 그것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삼정승 중, 가장 왼쪽에 자리하던 영의정이 별안간 몸을 일으켜 외쳤다. 내의원 도제조의 겸직을 맡고 있는 자였다. 아까부터 심상치 않게 흘러가던 기운을 그도 이미 알아차리고 있던 터였다. 급기야는 덜덜 떨리기 시작한 수의의 손을 눈대중으로 잡아 낸 그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그의 기척에, 침소 안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영의정이 대비며 중전의 앞에 가 머리를 숙였다. 송구하오나 소신, 일 촌각(1~2분)만 수의 대감과 말을 나누게 해주시옵소서. 영의정은 넋을 놓아버린 수의의 팔을 침소 밖으로 잡아끌었다. 문이 닫히고, 마루 위로 줄지어 늘어서 있던 각 대신들의 눈이 한 데 모아졌다. 영의정의 눈이 설마하며 수의를 향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엇인가…?”
“…….”
“그대는 알잖는가. 나조차도 멀리서 느낀 동태를 그대가 모른다는 게 말이 되지 않네. 솔직하게 말해주게. 지금 상황이 어찌 흘러가고 있는 겐가…?”
영의정이 그의 팔을 떨리는 손으로 붙잡았다. 수의의 눈동자에 흙빛이 실렸다.
“대감.”
“…….”
“음독입니다.”
수의의 말에 영의정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뭐…? 그렇게 되묻고 있는 목소리에 물결이 일었다. 수의의 입이 느리게 떨어졌다.
“종기의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한 음독입니다. 조금 전부터 전하의 호흡이 불안정해지신데에다가 팔의 근육부터 경직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등창의 증세가 아닙니다. 도제조 대감께오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그, 그럴 리가 없네. 기미 상궁은?”
“…….”
“분명 기미 상궁의 입을 거치고 올라온 탕약일 거란 말일세, 그럴 리가 없단 말이네!”
영의정의 목소리가 급기야는 커졌다. 허나 그도 예견하고 있었던 바였다. 다만 인정하기 싫어 악에 받친 목소리가 침소 앞을 크게 울린 것이었다. 침소 밖에 늘어 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대신들의 사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수의의 가슴 또한 큰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영의정의 믿을 수 없다는 눈빛과 수의의 결연한 눈이 공중에서 얽혀들었다. 그러다 그들이 밟고 선 마루가 삐걱이며 울었다.
“음독이라. 그것이 이토록 감찰이 심해진 마당에 가능키나 한 일이었단 말이오?”
대신들의 무리 중, 가운데에 섞여 들었던 대사헌이었다. 제일 앞까지 걸어 나온 그의 목소리가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영의정과 수의의 눈이 서서히 그를 향했다. 대사헌의 눈매가 짙어졌다.
“허나 음독이라 함은, 조금 전에 들였던 탕약의 효과를 본 것이라 해석되는 것이기도 한데….”
“…….”
“대감들이 지금 음독의 원천이라 이르는 그 탕약 또한 내의원에서 지어 올린 것이었소. 혹 수의 대감의 진단이 옳다면, 내의원을 싹 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단 말씀이시오?”
“대사헌!”
“내의원의 수장인 영의정과 수의 대감께서는 물론…”
대사헌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두 말 할 것도 없겠소?”
영의정의 얼굴색이 단번에 질렸다. 기도가 턱하니 막히는 기분이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대사헌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힘이 실렸다. 결코 헛으로 뱉는 소리가 아니었기에 수의의 얼굴색 또한 허옇게 변색되었다. 대사헌의 등 뒤로 사헌부 감찰들이 우르르 따르는 소리가 선연히 귓가를 때렸다. 그들의 수많은 발자욱 소리가 마루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침소 안으로부터 소란스러운 기척이 터졌다.
“전하, 전하…!”
그러자 침소 문 앞을 막아섰던 영의정의 손이 빠르게 그 문을 걷어 내었다. 문간채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마루에 섰던 이들의 몸을 굳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침소를 나섰을 때와 같이 곧게 누운 왕의 머리를 안아 엎드린 중전의 입에서 연이어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전하, 전하… 중전의 목소리가 아득히 머릿속에서 꺼져갔다. 대비의 흔들리는 눈이 천천히 수의를 향해 올려졌다. 맞은편에 자리한 의녀의 어깨가 후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한참 만에 떨어졌다.
“붕어(崩御)하셨사옵니다.”
그러자 곁의 대신들이 일제히 몸을 엎드렸다. 초겨울 한파에 갈잎이 스러지듯, 침소며 마루에 자리한 이들의 몸이 추풍낙엽과도 같이 엎드려졌다. 문지방을 짚고 섰던 수의의 무릎 또한 힘없이 꺾이었다.
전하.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수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전하. 전하. 이미 이마까지 바닥에 대고 엎드린 온 신하들을 눈에 담은 수의의 고개도 마저 떨어졌다. 구들장 위로 뜨거운 눈물 또한 뚝 떨구어졌다.
곧이어 침소 안은 대비며 중전의 곡소리로 차기 시작했다. 마루 위로 온 몸을 엎드린 대신들의 입에서도 전하, 하는 목소리가 무리를 이루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수의의 몸이 한없이 떨리고 있을 때 즈음, 그 옆에 마찬가지로 꿇어앉은 대사헌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듯하게 전해졌다.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소. 대감. 대사헌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바닥을 지났다. 아마 내일이면…
일벌백계(一罰百戒)가 될 것이오. 수의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침이 자꾸만 삼켜졌다.
*
장독 위로 위태하게 올려져 있던 물그릇이 그 위로 쌓인 눈과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낙하했다. 쨍! 단단한 독그릇에 부딪혀 사기가 깨어지는 소리가 살을 에는 바람을 갈랐다. 성규의 이마가 천천히 들렸다.
어정수를 떠다 놓았던 그릇이 눈앞에서 두 동강으로 갈라져 있었다. 성규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솟았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발갛게 언 뺨 위를 하염없이 타고 흘렀다. 이미 감각을 잃은 손이 다시금 눈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빨갛게 상기 된 이마가 다시 바닥에 맞닿았다. 주체할 새도 없이 뚝 뚝 떨어지는 눈물이 뺨 위에도, 소매 위에도, 눈바닥 위에도 쉼 없이 떨어졌다. 눈 위로 떠다 놓았던 어정수가 모두 쏟아져 버린 탓에, 한 곳만 차갑게 녹은 눈 위에 닿은 손끝이 덜덜 떨렸다. 곧이어 그것은 온몸으로 전이되었다. 거칠 것 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성규의 어깨가 들썩여지기 시작했다. 대감, 대감…
“부탁입니다. 소인, 감히 바라고 있습니다…”
결국은 그의 눈물에 소리가 담겼다. 한 번 시작한 울음은 쉬이 그치질 못하는 법이었다. 급기야는 커진 통곡소리가 때로는 큼지막한 장독에 부딪히고, 온 몸에 내려앉는 눈송이에 앉히기도 했다. 성규의 온 얼굴이 볼품없이 눈물에 젖었다.
밤은 깊어감에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가히 폭설의 시작이었음에 분명했다. 눈 덮인 마당 위로 울음소리는 덧입혀졌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이미 젖어들었던 옷소매를 다시금 적셨다.
*
“기별이네!”
와당탕, 굳게 닫혔던 방문이 우악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리자 방 안에 들었던 이들의 눈이 일제히 새로 들어온 자를 맞았다. 쉴 틈 없이 줄줄 글자를 적어 내려가던 우현의 붓모가 삐끗하자 신경질적인 눈은 그를 향했다. 염병, 뭔데? 우현의 눈이 금방 뛰어 들어온 이를 흘겨다보았다. 그는 옆방에 기거하는 생원이었다. 갑작스레 기별이라 이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이의 어깨가 숨에 부쳐 오르내렸다. 한동안은 방 안에 그가 헉헉거리는 소리만 가득찼다. 우현을 제외한 나머지 방우들의 시선도 곱지 않게 그를 향했다.
“기별이란 게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리 난리야?”
일단 들어오게. 바람이 차네. 벽에 붙어 주역 책을 뒤적이던 방우가 열린 문을 닫으려 몸을 바깥으로 뺐을 때였다. 허둥지둥 마당을 가로질러가는 궐내의 관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머리가 기우뚱, 기울여졌다.
“대궐의 관리들이 이 시간에 반궁을…?”
그리고 관원들의 뒤를 이어, 허겁지겁 사모를 붙들며 달려가는 사자관까지 눈에 보였다. 그가 의문을 품고 있는 사이, 그들을 향했던 눈을 다시 종이 위로 가져온 우현이 픽 웃었다. 흥미를 잃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든지 지금 우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성규에게 보낼 서찰을 적는 것이었기에. 그러나 우현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옆 방 생원의 다음 말이었다.
“방금 전 금상께서 승하하셨다네, 그것도 바로 한 식경(30분) 전에!”
뭐야? 그의 말에 두 방우의 몸이 튀어 오르듯 일으켜졌다. 단박에 커진 눈이 그를 향했다.
“그게 사실인가? 참말로 사실이야?”
“암, 참이고말고! 내 방금 정록청 앞을 지나다가 궐에서 내려온 관리가 대사성 영감에게 전하는 기별을 듣고 오는 길이네! 아마 궐은 지금 사단이 났을 거네.”
갑작스레 낮아진 그들의 목소리에, 관심 없는 듯 비켜갔던 우현의 고개도 이내 흥미를 되찾고는 서서히 돌아왔다. 아닌 척 자세를 고쳐 앉아 그들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우현이 큼, 흠흠. 헛기침을 시작했다. 쓰고 있던 서찰은 은근슬쩍 한 쪽으로 밀어 놓은 우현이 그가 가져온 소식에 쫑긋 귀를 세웠다. 정말이지 은밀한 소식인 것만은 확실했다. 이방인의 목소리가 거의 속닥거리듯이 낮아졌다. 그리고 아마…
“사인은 음독일 거라고들 하네.”
“뭐?”
이번에도 두 방우의 몸이 펄쩍 뛰었다. 쉿, 쉿쉿. 생원의 몸이 더욱 숙여졌다.
“확실친 않지만 내가 들은 바로는 그러하네. 그러니 이제 지금까지의 조정은 끝이란 말일세.”
“허면…?”
“아무래도 말이네….”
그의 목소리가 거의 들릴 듯 말듯하게 작아졌다. 내일쯤이면…
도성에서 여러 목이 죽어나가겠지. 붓을 만지작거리던 우현의 손이 뚝 멈추었다. 음산하게 낮아진 목소리에 느닷없이 등골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탓이었다. 우현의 눈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갔다.
순간적으로 느껴진 한기에, 우현의 눈꺼풀이 아주 느린 속도로 깜빡여졌다. 하릴없이 붓을 굴리고 있던 그의 손에 서서히 힘이 풀렸다. 우현의 고개가 열려진 창호 문 바깥으로 향해 갔다. 어쩐지 서늘하게 들이차는 한기에 느낌이 좋지는 않았다. 바깥은 아직도 함박눈이 한창이었다. 끊길 새도 없이. 끊길 줄을 모른다는 듯이.
그리고 그것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겨울의 종결을 부르듯 칼바람을 동반하는 법이었다.
*
일벌백계[ 一罰百戒 ]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警戒)함
ㅡ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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