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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수업 내용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문화, 일본의 정치 따위는 전혀 배우고 싶지도 공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수업 내내 펜대를 굴리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높디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덜 뜨거운 봄날의 햇볕을 쬐며 나는 고향을 떠올렸다.
남준은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수업 할 때에도 쉴 때에도 남준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었다.
그의 자리를 볼때면 가슴이 불안해져 편히 생각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그의 자리 쪽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괜한 정을 쌓았다가는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 틀림 없었기에.
보잘 것 없는 수업이 완전히 끝났다는 종이 울리고 나는 빠르게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그때 내 자리 앞에 몰려든 일본 학우 무리들의 발들이 보였다.
"어이, 조선인. 우리 나라의 어디가 그리 좋냐."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의 말에 일일이 대꾸해주지 않았다.
"어디가 좋아서 조선을 등지고 이곳에 왔냐고."
그러게, 나는 어디가 좋아서 이곳에 흘러 들어오게 된걸까. 아까 생각했던 고향이 다시 떠올랐다.
길게 뻗어있는 느티나무, 그 밑에서 놀던 나의 자매들. 동네 친구들. 어머니가 알려준 노래를 흥얼거리며 난 그렇게도 해맑게 웃었었다.
치마자락을 펄럭이며 곱게 딴 머리를 흔들며 숨바꼭질을 하던 나, 그리고 우리. 그토록 평화로웠던 우리를 꽃을 밟듯 밟아버린 나라.
치가 떨려왔다. 그리고 화가 났다. 나는 챙긴 가방을 들고 잔뜩 뭉쳐있는 그들 틈을 비좁고 빠져나왔다.
그 틈을 빠져나오니 건방진 모습으로 의자에 걸터 앉은 태형이 보였다. 그래, 저 아이도 저들과 똑같은 아이들이다.
꽃을 밟은 나라 뒷꽁무니를 좇아 다니는 더러운 친일파. 어쩌면 그 나라보다 더한 놈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교실을 나가려 했는데 무리에 있던 한 아이가 내 머리 끄댕이를 잡아 바닥에 내팽겨쳐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아이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굴러 쓰러졌다.
"어디서 말을 무시해. 그렇게 무시하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어."
"……."
"벙어리야? 왜 한 마디를 안해? 계집애처럼 생겨가지고. 제대로 달려 있기는 하냐?"
모든 관심이 나에게로 쏠렸다. 태형도 나를 보며 비웃고 있을까, 나는 그의 시선이 문득 궁금해졌다.
바닥에 굴렀더니 교복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나는 새하얗게 일어난 교복을 흘깃 바라보고는 그대로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말을 더이상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이상은 무의미했다.
그들에게 달려들자니 내겐 체력이 모자랐고 힘도 부족했다. 그렇다고 말로 이기자니 나는 아직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있는 것이다.
나는 버려진 인형처럼 입만 꾹 다문 체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그들의 시선이 익숙해질 때까지 버티고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사탕 빠는 애새끼들 같네."
"뭐야?"
"노는 모습이 애같다고. 너희들."
틀림없는 태형의 목소리였다. 태형은 어느새 걸터 앉아있던 의자에 내려와 쓰러져 있는 내 앞에 서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그의 가느다란 다리가 보이자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빠르게 한탄했다.
이런 황야같은 곳에서 남의 도움 따위를 받다니.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같은 조선인 편들어 주는 거냐?"
"아니. 사람 대 사람으로 한심하게 보여서 그래."
"한심이라고?"
"유치하게 편가르지 마. 힘 좀 있다고 새로 온 전학생 괴롭히지도 말고."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러고선 교복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냈다.
태형과 말싸움을 하던 아이는 금세 얼굴이 새빨개졌다.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 아이는 태형의 비아냥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그를 말렸다.
"그만 해, 건들여봤자 좋을 거 없어."
"개새끼, 족보도 없는 졸부 새끼가."
졸부라, 태형이 힘없이 웃었다.
"미안한데, 졸부는 아니야."
늘 자신넘치게 말하던 태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서글프게 들려왔다. 일본 학우들은 교실 바닥에 침을 뱉고는 우르르 교실을 몰려 나갔다.
그렇게 교실에는 태형과 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태형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다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웠다.
"사무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나 도와주지 않아도 돼."
"왜? 이런 거에 부끄럼타니?"
"아니."
네가 난처해지잖아.
태형은 나를 바라보다 바보같이 웃어보였다. 그러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들고는 뒷문을 열었다.
"난 부활동에 가야해."
"그래서?"
"넌 아직 부활동이 없지?"
"약올리는 거니."
"내가 있는 부활동은 조선인들이 꽤 많이 있는 곳이야."
"……."
"이곳에 오면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고 다양한 얘기를 나눌 수 있어."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야."
"나기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파도가 잔잔해지고 바다가 평화로워진다는 뜻이지.
남준이가 지었어. 우린 여기서 글을 써.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가끔은 고향에다 편지도 적어 올리지. 대부분은 보내지 못하지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네가 이곳에 들어왔으면 좋겠어."
태형은 그렇게 교실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