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 때로 돌릴 수만 있다면 하고 후회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다 못해 내가 방금 한 말과 방금 한 행동까지도 후회하고 시간을 돌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는, 십 분 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 사실 내가 한 말을 몇 명이나 믿을 성싶다. 판타지 영화 속 주인공도 아닌 그냥 현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흔한 대학생이 갑자기 명동 한복판에서 마이크를 들고 "여러분! 전 시간을 돌릴 수 있어요!" 하면 틀림없이 정신병원에서 나를 이송하러 올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을 말인 걸 알기에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고, 이 글로 내 능력을 남에게 알리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가 찍힌 후에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괜히 어렵게 말을 했다만 사실은, 이게 내 유서라는 뜻이다. 나는 이때까지 이 능력으로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었다. 많은 사람을 구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내가 이아린을 만난 것도 이 능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내가 이 능력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소름이 끼치고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능력을 쓸 줄 몰랐었다면 하고 후회한다. 정말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겨우 십 분의 시간만을 돌릴 수 있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다.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걸 바꾸어 놓았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젠 내 능력에 대해 얘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그날도 다른 날들과 크게 다를 게 없던 날이었다. * 1교시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야속하게도 여전히 빨간 불을 띠고 있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던 신호등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오른손 엄지로 왼손 엄지를 괴롭히며 초조하게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다 파란 불이 켜지기가 무섭게 횡단보도를 뛰어 건넜다. 반대편 인도에 거의 다다랐을 때 뒤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그 무언가가 뭘지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난생 처음 들어 보는 섬짓한 소리가 들리고 자동차의 브레이크음이 고막을 찢을 듯 높게 울렸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자 웬 남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어깻죽지 아래로 벌겋게 흘러내리는 피가 소름이 끼쳤다. 한 발자국 물러섰다 뒤돌아 서 크게 숨을 한번 쉬었다 눈을 감았다. 내가 살려야 했다. 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다시 뒤를 돌아 그가 입은 옷을 쳐다보았다. 청남방, 검은 스키니 팬츠, 검은 비니, 머릿속으로 그의 옷을 상기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열을 세고 다시 눈을 뜨면 늘 이렇게, 십 분 전이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느리게 가야 했다. 횡단보도 앞에 다다르자 마자 신호가 바뀌었었단 걸 기억해내곤 비교적 느리게 뛰기 시작했다. 도착한 횡단보도는 이미 신호가 바뀐 후였고 나는 알맞게 도착한 것 같았다. 맨 앞에 서 있었다가는 뒤늦게 온 그를 못 볼 것이 분명했기에 뒤로 물러서 상가 건물의 현관문 바로 옆에 섰다. 그리고 바로 검은 바지에 청남방을 입고 검은 비니를 썼던 그가 나타났다. 그의 옆으로 가 얼굴을 확인한 내 얼굴은 아마 하얗게 질렸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 동아리 선배인 순영이 형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다는 듯이 그 특유의 방정을 떨며 내 어깨를 감싸안았다. 신호가 바뀌자 바로 건너려는 형을 저지하며 횡단보도는 좌우를 보고 건너는 거라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쯤에나 배웠을 말을 꺼내고는 잠시 후에 길을 건넜다. 아까 형을 쳤던 그 차는 사람들이 건너기 전 횡단보도를 꽤 침범한 채 정차했고 사람들에게 미안한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구했다. 내가 구했어, 형을. 이때까지 구했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 혹은 지나가다 가끔 마주친 적만 있는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처음으로 내 지인을 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시간을 돌렸던 건 순영이 형을 구할 때만이었어야 했다. 기껏 학교에 갔더니 1교시 3시간짜리 수업이 공강이라는 문자가 뒤늦게 도착해 휴대폰 LED등을 밝혔다. 다음 수업은 점심시간 후에나 있어서 비는 시간이 4시간이 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할 거라도 들고 올 걸…. 때늦은 후회를 하며 시간을 돌릴까 생각도 했지만 집에서 출발했던 시각은 1시간 전이기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 상황에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고는 캠퍼스 밖으로 나섰다. 오늘따라 날씨는 유난히 맑았다. 학교 캠퍼스 뒤쪽 구석진 골목길에선 무슨 재개발을 한다며 매일 공사로 인한 먼지가 날렸다. 초여름이긴 하지만 더운 날씨라 높은 곳에 매달린 인부들의 땀방울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학생도, 회사원도, 공사장 인부도 제 위치에서 모두 바쁜데 나만 한갓져 보였다. 깡, 깡, 쇠로 된 지지대를 연결해 안전을 확보하는 작업 중인지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렸다. 고막을 통해 머릿속까지 찌릿대는 느낌이 들어 한쪽 귀를 막고는 달동네 같은 골목길을 걸어 올라갔다. 저 위쪽에서 내려오던 어떤 여자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다 그녀의 팔과 내 팔이 엉켰던 건지 그녀의 왼손에 들려 있던 책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책을 주워 건네자 "감사합니다." 하고 말해오는 그녀의 음성이 앳되어 보이는 얼굴과 어울렸다. 내가 한 열 걸음 정도를 떼어 공사장에서 멀어졌을까, 위에서 다급한 인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요!" 퍽- 또다시 섬짓한 소리가 울렸다. 웅성웅성하는 인부들의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이번엔 그녀가 머리에 철 자재를 맞고 쓰러져 있었다. 재수 한 번 참 뭐 같은 날이라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나는, 또 그녀를 구해야 했다. 내가 비록 진짜 슈퍼맨은 아닐지라도 그 자리에서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슈퍼맨은 나였다. 십 분동안 내게 있었던 일을 차근히 떠올렸다. 공강 문자를 뒤늦게 확인하고, 한숨을 쉬고, 가방을 도서관에 던진 채 휴대전화와 지갑만을 달랑 들고 나섰다. 아까와 똑같은 순서로 해야만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건 어느새 내 몸이 이미 알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열. 다시 눈을 뜨면, 나는 지금 공강 문자를 막 받았다. 아까와 같이 후회의 말을 뱉었다.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뒤 정수리를 톡톡 두드려 정리했다. 교문 바로 옆에 자리한 도서관의 거의 텅 빈 열람실로 들어가 아까와 대충 비슷한 자리에 지갑과 휴대폰을 꺼낸 가방을 던졌다. 그리고 맑은 하늘을 한 번 본 뒤 학교 뒷길을 타고 올라갔다. 아까와 같은 지점에서 그녀를 만났다. 팔이 맞부딪혔다. 우수수 쏟아진 그녀의 책을 주워 책 윗머리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일부러 그렇게 쓴 건지 위아래로 긴 네모 모양에 맞춰진 영어 알파벳이 보였다. 중학교 때 수행 평가로 열심히 썼던 판본체를 알파벳 버전으로 쓴 것 같았다. 이아린, 그게 그녀의 이름이었다. 책의 제목은 실용음악의 기초. 음대에 다니는 것 같았다. 책을 주길 바라는 듯 나를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 대학이에요? 제 친구가 이 책 가지고 있던데." 당연히 구라다. 괜히 동아리 잘못 들어 형들한테 이끌려 다니느라 친구 관계도 못 넓혀 봤는데 공대와 가장 멀리 있는 음대에 친구가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믿는 건지 친구 중 음대생이 있다는 말에 활짝 웃으며 우리 학교 이름을 대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주변인을 많이 구하는 것 같았다. "음대 인원 되게 적은데. 친구 이름이 뭐예요?" "아, 사실 거짓말인데." "네?" 어이 없다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 쨍강- 이제야 철 자재가 떨어진 건지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다행이라는 듯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아찔했던 것 같았다. 내가 말을 걸지 않았으면 자신이 죽었을 거라는, 뭐 그런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섞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 안 했으면 그 쪽 죽었겠다. 그쵸?" "…." "이것도 인연인데 번호 좀 줄래요? 저도 그 대학 다녀요." 대담한 얼굴을 하며 휴대폰을 내밀자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숫자를 누르고는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 바로 끊은 뒤 그녀는 내 휴대폰을 몇 번 더 만지작거리다 전화를 돌려주었다. 15 실용음악과 이아린. 간결하게 저장된 이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생겨서는 깔끔하고 정돈된 사람이었다. 15학번이면 나보다 누나려나. 책을 고쳐 들고 골목길을 내려가기 시작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캠퍼스에서 오다가다 보면 밥 한 끼 사 줘요, 누나." 골목을 총총 내려가던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제 이름." 김민규예요. 나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워낙 게을러서 완결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치환하기 전 이름 이아린으로 해 놨는데 이유는 제 필명에 있슴다 ㅎㅅㅎ 김칠봉 같은 걸로 하기 어색해서 지었어요 ㅋㅋ 재작년에 써 놓고 이름 바꾼 거라 어색한 부분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ㅅ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