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은 이상한 꿈도 꾸고 하여튼 잠에 들지 못할 것 같았는데 얼떨결에 잠이 든 모양이다. 포근하면서 은근 까슬한 감촉이 볼을 덮기에 손으로 끌어내리며 눈을 떴다. 어제의 몸살이 꽤 고단했던 모양인지 눈이 꾹 맞붙어 뜨는 데에는 평소보단 과정이 길긴 했지만. 눈을 부비고 손을 떼자 이젠 익숙한 가슴팍이 보인다.
"……."
"잘 잤어?"
잘 잤느냐고 묻는 얼굴이 말끔하다. 엉겁결에 비볐던 눈을 다시 비비며 눈곱의 여부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없는 것 같았다. 아침에서 일어나 맨 얼굴을 다듬는 모습을 보자 웃긴지 한차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는다.
"..왜 웃어요."
그에게 틱틱거리는 말투는 병 앓이에서 오는 예민함때문이 아니다.
"고양이 같아서."
"..에?"
"고양이가 세수하는 것 같아."
"……."
"어리광 부릴 때는 가슴팍이든 어깨든 얼굴 부비면서."
"아, 아니 그건 아파서 힘이 없어서 그런 거라니까요?"
아플 때의 일을 들먹이다니. 치사한 사람이다.
"근데 또."
"……."
"밀어낼 땐 엄청 밀어내는 것도. 고양이같다."
"……."
서운함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내 이런 태도에 섭섭해 하는 내색은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문득 너무 심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가 내게 한 짓에 비해서는 심하지 않다. 난 덕분에 부모님과도 생이별을 하게 된 거고. 여긴 내가 있어야할 곳이 아니니 언젠간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겠지, 하는 그런 막연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그의 말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침 먹어야지?"
"……."
그러더니 어제처럼 내 밑을 받치려 들기에 아프지 않게 그의 뺨을 챱챱 때렸다. 아니, 엄청 폭력적으로 보이는데 친구가 실없는 소리를 할때 장난으로 툭 치는 그 정도의 강도로.
"미쳤어요? 아침부터."
쌀쌀맞은 내 말에 권순영씨가 그냥 웃는다. 그냥 어제처럼 안겨있어주지.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냥 다시 드러누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밥차리고 오면 깨워요. 저 다시 좀 잘거에요. 끝으로 이불을 턱끝까지 덮으며 눈을 감았다. 가만히 앉아있던 권순영씨가 몸을 일으키자 한복이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낸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다가 눈을 떴다. 역시 잠은 오지 않는다.
요계 4
"아, 심심하다."
진짜 무료함의 연속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창밖을 내다봐도 민속촌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 마냥 놀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뒹굴거리다가 문득 생각 난 건 휴대폰이었다. 가만, 내가 올 때 휴대폰을 들고 왔었나. 기억을 더듬자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장터에서 달릴 때 묵직했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휴대폰을 끄고 보조배터리에 충전을 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다가 마루밑으로 떨어졌…. 헉, 대박. 주머니에 휴대폰 있다.
"권순영씨! 권순영씨이!"
집안에 소리를 지르며 권순영씨를 찾았다. 내 방과 권순영씨의 방은 맞은 편에 있었기에 얼마 있지 않아 권순영씨가 미닫이문을 열고 '왜.'하고 짧게 물으며 들어왔다.
"제 옷 어딨어요?"
"무슨 옷."
"입고 온 옷이요. 저 처음 온 날 한복 주고 옷 어디에 놨어요?"
"옷?"
"네. 옷이요."
권순영씨는 말 없이 발 끝만 톡톡 마룻바닥 위를 비볐다. 입을 꾹 다문 모습이 뚱하게 보이기도 해 뭐해요? 옷 달라니까. 하고 보채자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주면."
"네?"
"주면 도망갈 것 같아."
"……."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선녀처럼."
그러면서 내 눈치를 슬쩍 봤다. 이번엔 내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디 안 가요.' 하는 내 말에 권순영씨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빤히 마주한다. 아니,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간다고. 어이가 없어서 그를 흘겨보았다. 그는 조심히, 옷은 왜?하고 물었다.
"옷 안 줘도 돼요."
"……."
"주머니에 뭐 있어서 그것만 꺼내게. 빨리요."
"그게 뭔데?"
"있어요. 핸드폰."
"휴대봉?"
"...휴대폰이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게 뭐야, 하고 물었지만 무시하고 빨리 가져오라며 악을 쓰자 그는 알겠다며 손을 튕기고 사라졌다. 얼마 있지 않아 손에 작은 손가방을 달고 온 그에게 눈짓으로 묻자 그는 아,하고 작게 탄식하며 손을 들어보였다.
"주머니에 있는 거 빼왔어."
어지간히 불안한 모양이다. 그 모습에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보는 걸 알았는지 내게 불쑥 손가방을 내민다. 내 주머니엔 꽤나 많은게 들어있었는지 립스틱도 있었고 보조배터리도 있었고, 무엇보다 휴대폰도 있었다. 궁금한듯 내 주변을 맴돌며 기웃거리는 그가 불쌍하게 보여 물건을 늘어놓고 하나 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립스틱이라는 거에요."
"……."
능숙하게 뚜껑을 열어 끝을 돌리자 빨간 립스틱이 위로 솟아나자 신기한듯 기웃거렸다. 예전에 문 열렸을 땐 이런 거 없었어요? 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이렇게 바르는 거에요."
"……."
바를 마음은 없어 입 근처에 호선을 그리며 바르는 시늉을 했다. 되게 보부상같기도 하고. 왠지 촌스러운 그가 웃겨 이리오라고 손짓하자 기다렸다는 듯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대충 그의 턱을 붙들고 내 쪽으로 휙 돌리자 약간 놀란 듯 눈이 크게 떠졌다. 립스틱을 쥔 손을 그의 입가로 가져가 그의 도톰한 입술에 붉은 칠을 하기 시작했다. 립스틱이 입에 닿고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그의 입이 약간 벌어진다. 립스틱의 뚜껑을 닫고 음파-음파- 하며 따라하게 하자 그는 움,파 움-파 하면서 서툴게 따라했다.
"아하하. 이게 뭐야."
꽤 고혹적인 얼굴이 됐다. 권순영씨와 붉은 립스틱. 하얀 머리와 빨간 입술. 뭔가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단장한 것 같은 그런 모습이 어색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에 와서 이렇게 크게 웃은 적이 없었는데. 권순영씨는 손을 튕기더니 어느새 생긴 손거울로 얼굴을 살피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기생년 같아."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엔 말투에 불만을 가득 담았다. 거친 표정을 했으면서 입술은 새초롬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푸웁, 웃음을 터뜨리자 권순영씨가 소매로 입술을 닦으려 들기에 그 손을 붙잡았다.
"아흐, 풉, 권순영씨. 잠깐만요."
"……."
"사진 한 장만 찍어요."
"..사진?"
그는 멈칫하며 나를 내려다 보았다. 또 한바탕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참고 손가방으로 달려가 휴대폰의 홀드버튼을 꾹 눌렀다. 익숙한 소리와 함께 검은 화면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뒤에서 구경하던 권순영씨가 움찔하는게 느껴졌다. 예상은 했지만 통화권 밖이라는 표시가 상단바위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애초에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무료한 일상에 휴대폰이면 잠깐이라도 즐거울 수 있으니까. 익숙하게 카메라 앱을 켜 그의 얼굴에 들이댔다.
"거울이야?"
"아니아니, 여기 봐요."
그가 고개를 돌리자 찰칵-하는 셔터소리가 나고 화면엔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
그의 입이 벌어졌다. 밤중에 김치찌개에서 고기를 빼먹다가 엄마한테 들켰을 때, 딱 그 표정이었다.
"같이 찍을래요?"
"..이거 대체 뭔데."
"사진이요. 음…, 순간적인 모습을 장면으로 남겨두는 거에요. 두고두고 볼 수 있게."
"……."
"너도 해."
"네? 뭘요."
"너도 바르라고."
그가 땅에 떨어져있던 립스틱을 주워들어 서툴게 뚜껑을 벗겨내고 다가와 내 턱을 쥐었다. 내가 아까 그의 턱을 쥐었을 땐 그의 말랑한 볼이 꾸욱 눌릴정도로 아무렇게나 쥐었는데,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너무 살살쥐어 그의 손끝이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아까 내가 했던 것처럼 아랫입술에 서툴게 색을 칠했다. 그리고는 권순영씨가 직접 음파음파를 선보였다.
"풉."
"……."
그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웃지마. 하는 말투가 들리는 듯하다. 결국 그가 잔뜩 내뿜는 무언의 압박에 했다, 음파음파. 골고루 발렸는지 손으로 입술끝을 매만지며 확인하다가 그를 돌아보자 그가 날 보고있다가 씨익 웃는다. 그의 귀 끝이 약간 붉어져있는 것같기도 하다. 뭐야, 혹시…. 아니다. 존나 나는 도끼병 좀 고쳐야해. 허튼 생각을 마무리하고 그에게 왜그렇게 보냐며 물음표를 띄고 올려다보자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그가 말한다.
"그냥."
"……."
"네가 하니까 예뻐서."
그가 붉은 입술로 조곤조곤 말한다. 아니, 사실 조곤조곤 말한게 아닌데 립스틱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묘한 분위기가 잡히는 듯했다. 둘의 거리가 너무 지나치게 가까운 탓도 있었다.
"으하. 권순영씨. 너무, 큿, 새초롬하고.. 흐으, 아 웃겨."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내 한복 입혀볼까. 저고리 끼려나. 아, 웃겨. 머리도 기름발라서 싹싹 넘기고 실삔 꽂으면 볼만하겠다. 실없는 상상을 하며 웃다가 카메라를 가져다 대며 마구 찍어댔다.
"하지마."
"햬쟤먜~"
그의 말을 얄밉게 따라하는 내게 그가 눈을 흘긴다. 오늘은 내가 뭔가 이기는 것 같아서 기분 째진다. 내친김에 동영상도 찍고 보여줘야지 생각하며 녹화버튼을 눌렀다.
"권순영씨. 여기 봐봐요."
그가 날 노려보는 눈을 멈추지 않은 채 소매를 입술에 대기에 한손으로 저지하고 남은 손으로는 휴대폰을 그의 얼굴에 밀착하며 촬영을 하다가 힘이 빠져 녹화를 멈추고 그의 팔을 풀었다. 그또한 지친 모양인지 약간 피곤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며 '이런게 재밌어?'하고 물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얼굴에 앨범을 들이밀었다.
"이거 봐요."
"권순영씨가 봐도 웃기죠."
"..아니."
그 모습이 또 새초롬하다. 새벽에 물맺힌 앵두처럼. 캬, 비유가 춘향이급이네. 여전히 들썩이는 어깨를 가누지 못하고 사진을 넘기며 흘리듯이 뱉었다.
"아, 현실로 돌아가면 우울할 때마다 봐야지."
"……."
근데 존나 이 말이 그렇게 잘못된 말인지 몰랐다. 갑자기 그가 여태껏 보지 못했던 서늘한 눈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봐.하는 말투가 뭔가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실언이에요. 방금은…."
그가 조용히 걸어와 내 앞에 선다.
"아직 각인을 할 수도 없고."
"권순영씨, 그건,"
그 서늘한 눈이 날 향하자 말문이 턱 막힌다. 작게 입을 벌린 채 그를 올려다본 눈을 차마 마주볼 수 없어 시선을 내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밝고 즐겁던 분위기가 축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네 손목에 새겨진 이름은,"
"……."
"내 이름이야."
"……."
"넌 못 가."
거부하고 싶던 사실이 피부에 닿는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의 말은 모든 음절에 힘을 싣고 또렷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여기서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나또한 지지않고 입을 열었다. 그와 만나고 나서는 틈만 나면 둘이 싸우는 것 같다. 내게 틈조차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그가 문제인 건지, 받아들이지 않는 내가 문제인 건지 혼란스럽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려 그의 눈을 힘겹게 마주했다. 그가 고개를 숙여 툭, 이마를 맞댄다.
"난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까봐 매일 무서운데,"
"……."
"넌 아니야."
"……."
"돌아가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네 모습."
그가 말을 하다말고 침을 삼키며 목을 축인다.
"난 그것도 네가 돌아가는 것만큼 싫어."
코끝으로 숨결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사고회로가 끊어진 것 같다. 코끝이 닿고 아랫입술이 서로 스치자 약간의 열기가 전해진다. 그에게서 뒷걸음질 쳐 벗어났다. 서늘한 눈이 애처로운 푸른 눈으로 변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래요."
"……."
"난 잘 모르겠어요."
"……."
"..쉴래요."
방불이 꺼지고 미닫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다.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서 열을 내며 달아오른다. 속눈썹이 조금 축축해진 듯한 것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물고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삼켜낸다. 피부로 닿는 현실이 버겁다. 꼬이고 꼬인 매듭의 시작점을 찾기엔 아직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