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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파파가 좀 말려줘, 난 도저히 그 새끼랑 결혼 못 하겠으니까."
"그리도 싫더냐."
"어, 싫어. 너무 싫어. 파파는 내가 그런 비곗덩어리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난 애초에 남자를 싫어한다고."
앙칼진 코묘의 말에 교장은 어쩔 수 없단 듯 고개를 내저었다.
파파는 꼭 져줄거야, 코묘는 교장이 자신을 얼마큼 사랑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알았다. 엄마에게 전화 넣어주마."
"고마워요, 파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코묘가 종종 걸음으로 교장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교장은 그런 코묘의 애교에 허허, 웃으며 등을 토닥였다.
코묘는 쇼파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작은 손가방을 들고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떠나는 코묘를 바라보던 교장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아비랑 같이 저녁이라도 할까?"
"괜찮아, 나 살 빼야하거든."
"네가 살 뺄 곳이 어디있다고?"
"여기. 나 갈게요. 나중에 또 올게요."
"나중에 올때는 그렇게 문 차지 말아라. 부서질라."
"지금 내가 중요해, 문이 중요해?"
"당연이 우리 코묘가 중요하지."
"칫, 나 갈게요!"
코묘는 그렇게 교장실을 나왔다.
날이 점점 저무는 탓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코묘는 복도에 불도 제때 켜지 않고 뭐하는 거야, 라고 중얼거리며 서둘러 본관을 나왔다.
저 멀리 기숙사로 향하는 학우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란 도란 얘길 하며 걷는 모습들이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고, 부러워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나처럼 이런 나이에 결혼 하라 등 떠미는 부모들을 갖진 않겠지.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코묘는 학우들이 지나가는 길이 아닌 샛길로 빠졌다. 지금은 사내들의 관심따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해가 빠르게 저물면서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샛길인 탓에 가로등 조차 없었다.
아무리 빨리 걸어보아도 길은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코묘는 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거의 달리다시피 걸었고,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저를 따라오고 있단 것을 느끼고 말았다.
불안함에 몸이 떨려오던 찰나, 뒤에서 코묘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기요."
조금은 긴듯한 머리카락에 남자치곤 얇은 몸선, 코묘는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소년의 얼굴을 자세하게 들여다 보았다.
이 남학교에 이런 애가 있었나, 싶어서.
"이쪽으로 가면 기숙사가 나오나요?"
소년은 교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외부인처럼 보이는 코묘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코묘는 그런 소년에게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 하나 한참을 망설였고, 또 여러 생각에 빠졌다.
이 애는 도대체 무슨 애지. 코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소년은 코묘의 끄덕임에 이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감사합니다."
미성의 목소리다. 변성기가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코묘는 계속해서 소년을 관찰했다.
소년은 코묘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전학 온지 얼마 안되어서요. 아직 길을 잘 몰라요."
"아……."
"날이 많이 어두워졌네요. 혹시 같이 걸을 수 있을까요? 조금 무서워서."
남자가 이런 옅은 어둠도 무서워하나. 코묘는 그간 자신이 만났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강한 척을 하며 힘을 과시하고 머릿속엔 오로지 살을 맞붙이겠단 생각밖엔 없었던 주변인들이었는데.
하지만 이 소년은 달랐다. 코묘는 그런 소년을 계속해서 보고싶단 생각밖에는 할 수 없었다.
소년은 코묘의 옆에 옷깃이 스칠 정도로 붙었다. 그리곤 거리를 유지하며 계속 두리번 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코묘의 시선은 소년의 턱에 닿았다가, 뒤에 닿았고, 허연 뺨에 닿았다가 긴 속눈썹에서 마무리 되었다. 참 묘한 소년이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누구 만나러 오셨나봐요."
소년의 물음에 코묘는 빠르게 말을 얼버무렸다.
"아, 그 도, 동생이요. 동생 만나러 왔어요."
"여기 면회가 꽤 까다로운데. 용케 오셨네요."
"면회가 까다롭…, 그렇죠! 까다로워서 고생 좀 했어요."
순간 코묘는 자신이 왜 이 소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거짓말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주변사람들에게 솔직했고 숨김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 소년의 물음에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나왔을까. 코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도리어 물어보았다.
"그, 그러니까 전학 온거면 꽤 돈이 많나봐요."
"네?"
"아,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여긴 사립이고 또, 꽤 돈이 많은 집안 자제들이 다니니까."
뭐 이런 질문이 다있어, 코묘는 소년에게 한 질문을 창피해하며 자신의 허벅다리를 세게 꼬집었다.
"그닥 돈이 많지는 않습니다. 주변 분들 도움이 컸죠."
"아, 그러세요."
"불빛이 보이네요."
코묘는 소년의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기숙사 불빛을 가리켰다.
왠지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짧은 시간동안 잠깐 걸어오면서 여러 감정을 느꼈었는데. 코묘는 조금씩 걸음을 늦추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찾아왔어요."
"아, 아니에요."
"저기."
"네?"
"같이 걸어드릴까요?"
"왜, 왜요?"
"밤이잖아요,"
밤. 밤이니까. 시덥지 않은 이유였지만 코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밤이네요.
소년은 천천히 걸으며 코묘의 걸음을 맞춰 걸어주었다. 함께 걷고 있는 길이 조금은 길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