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조심히 들어가세요,"
"저기!"
"네?"
"데려다 주셔서 가, 감사하다고요."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녀의 볼이 조금 붉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원래 말 수가 적은 사람인지, 소녀는 대기하고 있던 검은 차에 빠르게 올라탔고 그 뒤로 소녀의 하녀들이 올라탔다.
빠르게 돌려지는 차는 그대로 학교 밖으로 미끄러지듯 나갔고 나는 다시금 뒤를 돌아 기숙사로 향했다.
오늘 꽤 큰 수확을 했다. 카제하야 에이타로 보이는, 게다가 성도 같은 카제하야 쇼를 만났다.
게다가 친해지자는 뜻으로 손도 잡았다. 내일은 하루종일 쇼에게 찾아가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더 깊은 사이가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뜻은 이 학교에 더이상 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어서 아버지에게 알려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편지는 무조건 검사 끝에 내보내질 것이고 애초에 학교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마사토가 떠올랐다.
김석진, 그의 도움은 애초에 받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꽤 유명한 인물인 것 같고 선도부에게 찍힌 이상 그와 함께 붙어있는 모습이 보인다면 나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웬만하면 나 혼자 해결해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숙사에 다다르자 건물 밖에서 누군가가 쭈그려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계속 마주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뭡니까."
그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선한 인상이었지만 풍겨오는 느낌은 강했다.
게다가 온 몸이 상처투성이었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거즈와 붕대. 터진 입술과 잔뜩 멍이 든 것 같은 얼굴이며 팔 다리.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리카?"
"네."
"운 좋게 여기서 만났네."
"뭐요?"
"마사토다. 그러니까 김석진이라고 하면 아나?"
김석진이었다.
그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버지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절 도와주시기로 했다고요."
"이, 인사 정도는."
"도움 필요 없습니다.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도움이 필요 없다니? 나 없으면 큰 일 날텐데?"
"그쪽과 함께 있으면 저도 큰 일이 날 것 같아서요."
"아,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나는 당황해하는 석진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빠르게 나를 돌려 세우려고 했지만 건물 안에 있는 학우들의 시선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는지 애꿎은 땅만 밟아댔다.
나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달려갔다. 이곳에선 조용하게 지내야 한다. 있는 듯, 없는 듯하게.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방 문을 열었다. 예지몽인가 싶었다. 분명 전에도 봤었던 풍경 같았는데.
태형은 내가 숨겨 놓은 밧줄을 언제 찾았는지 다시금 목에 휘감고 있었고, 나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잠옷 차림이라 애초에 교복을 벗을 필요도 없고, 또 여자 신분인지라 씻어도 새벽에 씻어야 하니까.
태형은 아무 말도 없이 침대에 눕는 나를 당황해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곤 슬금슬금 내게 다가와 나를 쿡쿡 찔러댔다.
"야, 야."
"어."
"아니, 그러니까. 왜 안 말려줘?"
"뭘 말려."
"나 밧줄로 목 감았어."
"봤어."
"왜 안 말리냐고, 나."
"말려주길 바래?"
이불 속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태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태형이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밧줄을 꽉 묶어서 피가 안 통하는 건가. 태형의 목으로 손을 뻗자 그가 빠르게 내 손을 쳐냈다.
그리곤 목에 감았던 밧줄을 거칠게 풀어내더니 불을 끄고 침대에 냅다 누워버렸다. 순식간에 방 안이 까맣게 변했다.
나는 창문으로 내리쬐는 달빛에 의지한 채 나를 등지고 누운 태형의 뒷통수를 바라보았다.
"토라진거야?"
내 말에 태형은 들은 척도 않고 몸만 뒤척일 뿐이었다. 그의 그런 행동이 나름은 귀여워 소리가 나지 않게 웃어버렸다.
나는 다시금 몸을 움직여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수업 시간 빼고 교실에 없을 거야."
"……."
"아니, 너희랑 얘기 안 할지도 몰라."
"……."
"애초에 친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그렇게 알아두고 있으라고. 알았지?"
고요한 침묵이었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학우들의 발소리, 그리고 말소리 밖엔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이런 낯선 곳에서 꽤 빨리 적응했다. 이곳을 나가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속을 알 수 없는 이곳 학우들과 친목을 다질 시간이 없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있으면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리고 들려왔다. 토라져 말을 안할 것 같던 태형의 목소리가.
"싫어."
"……."
"찾으러 다닐 거야. 너."
"……."
"같이 있을 거야, 계속."
오늘따라 유난히 밤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