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때는 여름이 아니었을까 싶어.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곳에서 떠질 생각을 하지 않는 무거운 눈을 어렵게 떴을 때, 흐린 시야 사이 색을 잃은 창문 너머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거든. 귀에서는 쨍한 소음만이 맴돌았고 온 몸에는 힘이 없었어. 그러니 내가 잃은 게 세상인지, 단순한 색채인지 도통 감도 오지 않았고. 그냥, 어렴풋이나마 나는 드디어 내가, 결국 죽고 있는 걸까.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감았지. 내가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너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10
“야, 일어나. 언제까지 잘 거야.”
그런 내가 다시 눈을 뜬 건, 나를 부르는 한 남자의 목소리 때문이었어. 귀가 아플 만큼 소란스러운 주변은 여전한데 올곧게 귀로 새어 들어오는 그런 목소리가 있었거든. 얼굴을 보기 전까지 나는 네가 온 줄 알았어. 야, 탄소야. 하고 조금은 퉁명스럽게 나를 부르던 네 목소리와 어쩐지 조금 비슷했거든. 막상 눈에 보인 사람은 아마 너보다 조금 더 작은 체구 였을 거야. 팔짱을 낀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더라. 네가 올 리는 없는데, 왜 난 그렇게 생각 했을까. 뭐랄까. 너보다 좀 더 선이 연했어. 좀 동글동글한 얼굴에 입술이 예뻤고. 그리고 어, 피부도 하얗고. 입술은 진짜 빨갛더라. 잘 웃지도 않고. 귀신이 존재하면 이렇겠다 싶기도 했어. 근데 이렇게 잘생긴 귀신도 있나?
“귀신 아닌데. 저승사자야.”
아마 내 표정 되게 바보 같았을 걸. 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가니?
“미안하게 됐어. 널 데려가야 해.”
-9
태형아, 다시 나야. 나 다시 왔어. 어제 저러고 또 기절했었나 봐. 얼마간 기절 했었는지는 모르겠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수도. 원래도 병원 신세기는 한데, 그래도 기절을 이렇게 자주 한 적은 없었거든. 그런데 말이야. 내가 더 놀랐던 건 뭔지 알아? 그 남자가 아직도 날 내려다보고 있었어. 이게 꿈일까, 눈을 감고 한참 생각하다가 다시 그 남자를 바라봤는데 엄청 화나 보이더라. 내가 계속 잠들어서 그런 걸까?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데,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어. 목도 타들어 가는 것 같고, 얼마간이나 말을 안 하고 살았는지. 입술에 본드라도 발라 놓은 것 같았어.
“통성명도 못 했는데. 뭘 그리 많이 놀라, 난 박지민. 전에 말한 그대로 저승사자.”
“넌 누군지 말 안 해도 알아. 18세, 김탄소. 열흘 뒤에 죽지. 내가 데리고 갈 거거든.”
“지상에서는 뭐라 그러지, 전담 기사? 그렇게 알아두던가.”
“그래도 너는 좀 양호하네. 죽음의 문턱에 자주 서 봐서 그런가. 내 얼굴만 봐도 열댓 번 기절하는 놈이 있었는데. 걔한테는 통성명만 5일 걸렸어. 불쌍한 새'끼, 지 명줄을 줄여요. 주어진 시간도 딱 6일 뿐이었는데.”
뭐, 그러니까,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인가 봐. 몇 번을 곱씹어 봐도 그 얘기를 하는 것 같았어. 바보같이 네 얼굴이 먼저 떠오르더라. 넌 내가 죽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슨 말을 할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많이 슬플까? 아니면 나를 반길까. 어쩐지 심장이 좀 아픈 느낌이다. 이상하리만치 죽음이 두렵지는 않아. 아마 그 세계엔 네가 있기 때문이겠지?
-8
태형아, 오늘은 부모님이 왔다 가셨어. 어쩐지 온통 회색빛 세상이 이상하더라니,. 이걸 코마 상태라고 한데. 이게 무슨 말이냐면. 나는 분명 제 발로 걸어 다니고 말도 하고 이렇게 생각도 하는데, 전부 허상이라는 거야. 나는 지금 인간의 세상도 아니고, 천상 세계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대. 저승사자가 말 해줬어. 아마 내가 정말 죽기는 할 건가 봐. 한 번도 날 보며 운 적이 없으신 강한 부모님인데. 눈을 감고 있는 날 보며 한 마디 말도 못 하시고 우시는 모습을 보니까 조금은 실감이 나더라. 아직 이렇게 저 살아 는 있다고 말 하고 싶었는데... 뭐, 그래도 난 괜찮아, 아직까지는, 정말이야. 저승사자는 오늘도 그냥 묵묵히 있다가 갔어. 가끔 질문에 대답은 해 주는데 영 재미는 없는 사람인 것 같아. 아, 맞아. 그래도 오늘은 그 사람이 먼저 나한테 말 걸어줬다. 그 사람이 나보고 어린 나이인데도 왜 이렇게 죽음에 담담하냐고, 미련 같은 게 있지 않느냐고 물어보기에. 네 생각부터 나서 그냥 그렇게 말했어. 네가 나를 더 이상 바라봐 주지 않는 현실도 돌아가기 무섭다고. 오히려 난 그냥 이렇게, 네 기억만 가져가는 것도 좋다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나는 너무 어려서 세상을 모르는 거래. 바보 같대. 그 때는 그냥 웃고 말았는데 맞는 말이기는 한 것 같아. 내 세상이 너인데, 네가 나를 보고 웃어주지 않는 세상이 과연 내가 있을 곳인가 싶어.
-7
태형아, 오늘은 병실이 조용 했어. 내 화분이 곧 말라 죽을 것 같아. 누구라도 와서 물 좀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화분에는 관심이 없나 봐. 나 같아서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사람이건 화분이건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지. 태형아, 나한테는 네가 필요해. 네 관심과 사랑.
-3
오늘은 좀 이상했어. 내 심장이 잠깐 멈췄었대. 나를 살리겠다고 바쁘게 움직이는 간호사 언니들이랑, 의사 선생님을 마치 남 일 보듯 보니까 미안하더라. 나는 정말 이 삶에 미련이 없나 봐. 박지민이는, 오자마자 혼냈어. 정해진 명이 있는데 자꾸 한계 이상으로 좋지 않은 생각을 하면 명이 더 빠르게 줄어든다고. 정말 여기서 죽기라도 하면 자기 일정이 꼬인다며, 네 생각 그만하래. 내가 지금 우울해 하고 있는 걸까? 곧 죽을 사람인데 우울한 생각을 안 하는 사람도 있나? 아니면 그냥, 내가 너무 죽고 싶어 한 걸까. 나는 네가 보고 싶다. 태형아, 태형아.
-2
몸에 힘이 없다. 이젠 정말 별 생각도 안 들고. 오늘은 박지민이가 가보고 싶은 곳은 없느냐 그러기에, 네가 있던 병실을 마지막으로 다녀왔어. 밖으로 나올 생각을 미리 좀 했으면 아마 여기 계속 있었을 텐데. 네가 없는 병실은 많이 빈다, 태형아. 네 웃음 소리 하나만으로도 이 병실을 가득 채웠었는데. 휑한 게 병실 뿐만은 아닌 것 같아. 내 마음이 많이 허해, 지금.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아마 내일은, 여긴 다시 안 올 것 같아. 네 생각을 하니까 죽음이 몰려 오는 게 느껴진다. 너도 지금 나를, 그리워 하는 거니?
-1
오늘은 박지민이가 온 종일 내 옆에 있었어. 있어봤자, 가만히 앉아서 웬 종이들을 계속 뒤적거리는 게 그 사람이 하던 전부이긴 한데. 원래 하루 전부터는 담당 저승사자가 계속 지켜보는 게 원칙이래. 담당 저승사자라고 하니까 되게 이상하다 그치. 혹시나 싶어서 김태형이라고 옆 병실에 있던 내 또래를 아냐고 물어보니까, 하루에도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기는 일일이 기억 못 한대. 저승사자한텐 잘생긴 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나 봐. 나는 첫날 너를 본 이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네가 기억이 나는데. 태형아, 태형아. 드디어 내일이야. 나는 정말, 준비가 다 된 것 같아. 다행이야. 오늘은 간호사 언니가 내 화분을 발견 해 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