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호수다. 눈 앞에 잔잔히 흐르는 것은 호수다. 그렇다면 저건 무엇인가. 연꽃이다.
절대 가라앉지 않는 연꽃. 연꽃 옆에 있는 것은 소년이다. 저와 똑 닮아있는 소년.
태형은 자신과 닮은 소년을 바라보며 난간에 손톱 자국을 내었다. 저렇게 닮았는데.
태형은 저의 옆에 서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또한 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느냐."
보인다. 모든 것이 다 보인다. 하지만 태형은 보인다고 얘기할 수 없었다. 입이 굳게 닫혀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물쇠를 걸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태형은 손가락으로 입술 틈을 비집으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노인은 그런 태형을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노인의 손이 태형의 어깨위로 올라왔고 태형은 그런 노인의 손을 쳐낼 수 없었다.
어깨를 누르는 노인의 손이 점점 더 강해져왔다. 태형이 서있던 나무바닥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네가 거짓말을 하면 입술이 열릴 것이다."
그렇담 보이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태형은 연못가에 앉아 연꽃을 잡으려 손을 바둥거리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너무도 천진난만하게 웃고있었고, 연못가에 떠있는 연꽃은 오늘따라 아름다워 보였다. 그럼에도 태형은 거짓말을 했다.
"보이지 않아요."
그제야 자물쇠가 풀리듯 입술이 열렸다.
아, 이불을 박차고 일어선 태형이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꿈이다. 눈 앞에 펼쳐진 호수도, 연꽃도 소년도 없다.
그러니 방금 것은 꿈이다. 꿈이 틀림없다. 태형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새 없이 자신의 왼편 침대를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대는 누가 누웠는지 모를 만큼, 조금의 구겨짐도 없었다. 태형의 온 몸에 불안감이 맴돌았다.
손끝이 떨리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 태형은 침대에서 내려와 왼편 옷장을 덜컥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옷이 걸려있다.
창을 보니 하늘이 푸른 새벽이었다. 이 새벽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
"아, 아가씨."
방 문을 굳게 닫은 코묘는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애타게 문을 두들기는 하녀는 거의 울 것 같은 눈망울로 애타게 코묘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학교에 다녀온 이후로 코묘가 이상해졌다는 것은 집안 사람들이 전부 아는 사실이었다.
매일 같이 하녀를 괴롭히고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던 집안인데 그날 만큼은 고요했던 것이다.
하녀들은 아가씨가 이상해졌다며 결국 그녀의 어머니인 미코토 부인에게 전달했고,
미코토 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굳게 닫힌 코묘의 방문을 두들겼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아가씨라도 미코토 부인의 말 한 마디라면 꼼짝 없이 못 당했었는데. 이번에는 미코토 부인의 말조차 무시하는 것이었다.
섬뜻한 분위기에 질린 하녀들은 계속해서 코묘를 불러댔고, 곧 닫힌 문이 활짝 열렸다.
문 열리는 소음에 하녀들과 미코토 부인은 곧바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일이니."
미코토 부인은 무표정의 코묘를 바라보며 물었다. 역시, 하녀들의 말이 맞았다.
코묘는 불과 어제와 비교해봐도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코토 부인 뒤에 숨은 하녀들 또한 코묘의 얼굴을 흘긋흘긋 바라보았고,
코묘는 그 하녀들을 바라보다 미코토 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기는. 그리고 오늘 학교에 찾아갔다며. 아버지께 무어라 말했니."
"결혼 하기 싫다고 했어요."
"하, 그런 일 가지고 아버지를 힘들게 해야겠니? 너가 아직도 애야?"
"엄마."
"날 설득하려든 말아라. 결혼은 꼭 해야해. 내가 아버지께 말씀 드릴테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모양입니다."
"뭐? 누가."
"저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코묘의 볼이 발그스레 해졌고, 그녀의 모습에 놀란 하녀들의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놀란 것은 미코토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무작정 결혼하기 싫다고 때를 피우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갑자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몇십년간 코묘를 키우면서 이런 적은 없었던 아이다. 아니 누군가를 좋아하긴 했었나 싶었다.
미코토 부인은 말을 더듬거리다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결혼하지 않겠다고 거짓말하는 거라면……."
"거짓말 아니에요. 사실 좋아하는 감정 따위 전혀 몰랐는데 이런건가 봅니다."
"이, 이런 거라니?"
"심장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불을 쬔 것 마냥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리고……."
"그리고?"
"밤이 길었으면 좋겠는 마음. 맞지요? 사랑."
사랑, 요 어린 것이 사랑을 깨우치고야 말았다.
미코토 부인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마음을 고하는 코묘를 바라보다 눈을 뒤집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는 미코토 부인의 뒤에 서있던 하녀들은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부축했다.
코묘는 제 앞에서 쓰러지는 어머니를 바라보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뒷처리는 하녀들이 해줄테니 전혀 걱정할 게 없었다.
방으로 들어 온 코묘는 침대에 누워 옆에 트인 창문을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푸른 새벽녘에 어울리는 소년. 처음 접해본 소년. 코묘는 입술을 깨물고는 상기된 볼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언제쯤에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음번에 만난다면 반드시 이름을 물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