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 백현의 눈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떠지는 동안 경수는 아직도 집에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 씨발 년. 오후 4 시를 가리키는 시침이 퍽 역겨워진 백현은 뉘인 몸을 일으켜 앉아 침을 침대 위로 뱉었다. 휴대폰의 전원은 왜인지 꺼져 있었고 밖은 왜인지 아주 흐렸다. 비가 오려나, 좆같게. 반만 걸쳐진 이불을 발로 걷어찬 백현이 무심히 뒷머리를 긁으며 나른히 하품을 찍 했다.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은 경수의 집이 짜증 났다. 단정했던 화이트 침대 위에는 백현의 침과 함께 온갖 과자 부스러기가 자리잡았다. 우리 집도 아닌데 뭐.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고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가는 와중에도 백현은 괜한 집에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왜 여태껏 안 들어왔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박찬열일 것이다. 검은색 소파에 먹힐 듯 푹 들어가 앉은 백현이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좋아, 집 나간 마누라 잡으려면 전어라도 구워야 하나. 생각과는 다르게 텔레비전 전원을 켠 백현은 리모컨을 힘주어 꾹꾹 누르며 채널을 돌려댔다. 아, 뭔가 도경수가 좋아할 것 같은 야생 동물들이다. 잠깐 머리를 스친 도경수에, 무너지는 듯 차오르는 분노에 백현은 리모컨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여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자조적으로 픽 웃은 백현이 방으로 들어가 채 충전이 마쳐지지 않은 휴대폰을 억지로 켜 다이얼을 하나하나 누르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경수에게 딱 맞는 기본 신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끊겼다. 이것에 나름대로 만족한 백현이 물어뜯던 손을 내리고는 팔짱을 꼈다. 충전 케이블 덕분에 이동 반경이 확연히 좁아진 백현은 일어난 지 5 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 침대에 다시 털썩 앉으며 경수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5 초면 아주 느린 시간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이내 입이 떨어진 경수를 생각하며 백현이 킥킥 웃었다.
- 네, 도경수입니다.
- 나야.
- 뭔데.
도경수입니다. 백현은 전화를 받을 때 본인을 소개하는 경수가 좋았다. (사실 참 짧지만 백현의 기준에서) 가장 긴 신호음이 끊어지고 가장 처음 듣는 소리가 도경수의 목소리로 부르는 '도경수'라니.
- 음, 나 너희 집인데.
- 알아. 기어들어 와 자는 것 확인하고 나왔으니까.
- 그래, 그래서 어딘데?
- 밖이야.
- 밖?
- 그래, 집에 도착하기까지 한참 남았어. 얌전히 기다려.
- 얌전히는 이미 글렀어. 네 침대에 침을 뱉었거든.
하아, 감춤 없이 들리는 경수의 한숨에 백현이 만족한 듯 비싯 웃음을 흘렸다. 애써 예쁘게 올린 머리를 헤집은 경수가 핸들을 꽉 쥐며 꽉 문 잇새로 말을 뱉었다.
- 또라이냐? 장롱에 새 이불 커버 있어. 네가 씌워.
- 당장 달려와, 보고 싶으니까.
- 좀 걸린다고 했잖아.
- 응, 경수야, 이 이불 커버 태워도 돼?
- 아... 난 네가 죽을 만큼 싫어.
- 그럼 죽어. 다시 태어나서 날 사랑해.
- 미친놈. 끊어. 거실에 앉아 있어.
뚝. 정 없게도 끊긴 전화에 백현이 엉덩이를 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침대를 좀 괴롭혔으니 그만 할까. 침대 옆 작은 협탁에 휴대폰을 가지런히 올려 두고 마음 편하게 살랑이며 거실로 나갔다. 우리 마누라 속 좀 타겠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고운 손에 얼굴을 푹 파묻으며 백현이 중얼거린 말이다.
그 시각 경수는 뒷좌석에 휴대폰을 거칠게 던졌다. 씨발. 꽉 깨문 입술에 결국은 피가 맺혔다. 거칠게 핸들을 돌리며 경수는 생각했다. 짜증 나서 미칠 것 같아.
경수가 헐떡이며 집으로 도착했을 때 백현은 소파에 과자 부스러기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 중이었다. 벌컥,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였다. 과자 부스러기도 침도 없었다. 조금의 구겨짐도 없이 바르게 정돈된 침대는 늘 경수가 정리하던 그대로였다. 조금 진정된 경수가 허탈히 걸음을 옮기며 소파에 널브러진 백현을 봤다. 힐끔 경수를 보고 있던 백현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 어, 왔어?
- 변백현, 너 뭐야.
- 뭐긴 뭐야. 역시 집 나간 마누라 잡아들이는 데에는 구라만 한 게 없지.
- 씨발 년, 내가 너때문에 지금...
- 내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샐쭉 백현의 눈꼬리가 예쁘게 처졌다. 음, 일단 침 뱉은 건 미안해. 눈을 떴는데 옆에 네가 없는 걸 보니까 좆같아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경수는 기가 찬다는 듯 한 번 웃어 주고는 냉장고를 열어 작은 생수병을 깠다. 컵을 꺼내 물을 받으며 속으로 변백현을 열나게 씹고 있었다. 깔깔깔. 귀 뒤로는 배경에 깔린 음악처럼 백현의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물을 한껏 마신 경수가 벽에 물컵을 집어 던졌다. 깨져 바닥에 흩어진 투명한 컵을 보며 그곳으로 경수가 발을 내딛었다. 하얀 양말이 이내 경수의 발에서 흩어진 피로 물들었다. 끌어안고 있던 쿠션을 차분히 내려 둔 백현이 바지를 툭툭 털며 경수에게 경고했다.
- 움직이지 마.
- 변백현.
- 뒤로 빠져 나와.
거실의 공기는 이내 얼어 붙었다. 유리 위에 서 있는 경수와 소파 앞에 서 있는 백현의 눈빛이 서로 얽혔다. 조용한 공기 속 텔레비전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좆같아진 백현이 하, 하며 고개를 살짝 꺾었다. 백현이 쥐고 있던 리모컨을 텔레비전으로 던졌다. 화면에 부딪혀 떨어진 리모컨에서 건전지가 쏟아졌다. 텔레비전 화면도 깨졌다. 경수의 집에 필요한 것만 위치한 이유였다. 백현을 보며 입꼬리를 올린 경수가 아까 세게 문 탓에 상처난 입술이 따가워져 다시 입꼬리를 내렸다.
- 지금 뭐하자는 건데?
- 백현아.
- 빠져 나오라고 했어, 도경수.
발에 박힌 유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꾹 디디고 밟은 경수가 발을 바닥에 비볐다. 아, 진짜 또라이 같은 년. 백현 역시 뛰어들었다. 맨발로 디딘 유리 조각에 백현이 인상을 썼다. 네가 이러면 안 되지. 차라리 날 죽여야지 네가. 내가 보는 앞에서 네가 다치면 안 되는 거지. 말을 뱉은 백현이 경수의 턱을 아프도록 움켜 쥐고 경수의 입술 위 상처난 곳을 혀를 내 살짝 핥았다. 지금 이 상황을 봐서 알다시피 뭇 주위의 연인마냥 달달한 분위기의 커플은 아니었다. 서로를 상처내지 못해 안달난 사람마냥 둘은 굴었다. 주위에서 뭐라든 둘만 행복하면 그만인듯 싶었다.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원한다면, 상대가 원한다면 금방이라도 목숨을 내어 주며 해사하게 웃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에 대한 기준이 있었던가?
소파에 앉은 경수의 발에 박힌 유리를 백현이 뽑고 있었다. 아프다며 인상을 찌푸린 경수가 백현에게 도리어 짜증을 냈다.
- 몸에서 피를 좀 빼고 싶었어.
- 앞으로는 내 피를 빼.
- 내가 미쳤다고.
- 앞으로 내 앞에서 다치기만 해.
다시 조용해진 거실 경수의 발에 남아 있던 마지막 유리 조각을 빼며 백현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마주친 눈빛에 당황한 경수가 고개를 살짝 뒤로 주춤했다.
- 당장에 목을 긋든, 밖으로 뛰어내리든 어떻게든 꼭 죽어 줄 테니까.
- 아, 진짜...
경수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허리를 굽혔다. 피에 젖은 양말을 벗긴 백현이 구급상자에서 소독약을 꺼냈을 때였던 것 같다.
- 이럴 때마다 진짜 죽고 싶다.
- 말만 해, 같이 죽어 줄게.
- 우린 죽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해.
- 사랑한다는 말 대신이라고 생각해.
- 따가워, 변백현.
- 갑자기 깝친 건 너잖아.
- 갑자기 좆같이 군 건 너 아니고?
- 탓하지 마.
소독을 한 뒤 연고를 짜 발라 준 백현이 경수의 발에 입 맞췄다. 백현의 발에는 아직 유리가 박혀 있었다. 욱신거리는 발때문인지 백현이 맞춘 입때문인지 기분이 묘해진 경수가 백현의 손에서 발을 빼며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 오늘 맑네.
- 해가 다 지고 있는데 무슨 개소리를 해.
- 백현아.
- 응.
- 아파?
- 뭐가.
- 발 말이야.
- 안 아파.
- 거짓말.
- 발보다는 마음이 아프지.
- 왜?
- 우린 왜 이렇게 좆같을까 싶어서.
무릎을 끌어 당겨 앉은 경수의 말에 발에 박힌 유리를 스스로 뽑으며 백현이 대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경수가 고개를 다시 창으로 돌렸다.
- 나갈 생각하지 마.
- 알았어.
- 발 다 나을 때까지 있어야 해.
- 그래, 알았다고.
그러고 또 한참은 조용했다. 몸을 좀 더 끌어당기며 경수는 혼자 생각했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아침은 밝았다. 띵한 머리에 경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옆에는 백현이 자고 있었다.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며 눈으로 찬찬히 백현을 살폈다. 백현은 피부가 좋았다. 학창시절에도 여드름 한 번 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특별히 관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무의식적으로 백현의 얼굴로 뻗은 손이 백현에 의해 저지되었다. 고운 손으로 쥔 경수의 손에 입을 맞추며 나긋하게 깼어? 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면 백현은 다시 눈을 감으며 더 자, 뱉었다. 어쩐지 이런 모습이 이제는 더 어색해서 경수는 말을 흐렸다. 괜찮아, 안 졸린데.
- 그럼 나 자는 거 보고 있어.
- 내가 그걸 왜 봐.
- 너니까 보는 거지.
- 백현아.
- 응.
- 행복해?
- 뭐가.
- 너 말이야.
경수는 가끔 저런 질문을 했었다. 백현은 어떤 대답이 최선의 대답일까 한참을 생각했다. 꽤 오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수는 재촉 한 번 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라고 발음하는 백현의 입꼬리가 언뜻 올라가 있었던 것 같다.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왜?
우린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항상 내 주위를 맴돌고 있어. 경수야,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죽음이 다가와서도 우린 행복하지 못할 거야.
백현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른 건 찬열이었다. 문을 살짝 열면 환히 웃으며 반기는 찬열이 서 있었다. 연락이 안 되길래. 묻지 않은 이유를 찬열이 먼저 말했다. 그제서야 차 뒷좌석에 던져 놓은 휴대폰이 생각이 나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 그리곤 문을 닫았다.
언제 오든 허전하고 싸늘한 집 공기는 늘 찬열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곁을 지킨 친구들은 자신 몰래 연인이 돼 있었다, 아주 지독한. 찬열은 아주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으며 경수에게 넌지시 물었다.
- 밥은?
- 아직이야.
- 시킬까?
- 그래.
- 중화요리? 넌 짬뽕이지?
- 백현이는 짜장.
- 그래.
찬열이 배달 어플로 주문을 하는 동안 경수는 분주하게 리모컨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경수, 뭐 해? 경수는 아무 말 않고 계속 찾았다. 텔레비전 켜고 싶은데.
- 발은 왜 절어?
- 어제 살짝 미쳤었어.
- 어디 봐.
자신이 앉아 있던 소파에 경수를 앉히고선 무릎을 꿇고 경수의 발을 들여다 봤다. 대충 덕지덕지 붙여진 반창고에 찬열이 슬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뭐야.
- 변백현 하는 짓이 그렇지, 뭐.
- 구급 상자 어디 있어?
- 식탁에 있을 텐데.
- 그게 거기 왜 있어.
- 변백현이 거기 가져다 뒀으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찬열이 구급 상자를 가져오자 백현이 배를 긁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리모컨 어쨌어? 경수가 조금 짜증 난다는 듯이 말을 뱉자 백현이 거기 없어? 하고 되물었다. 구급 상자를 가지고 와 경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찬열을 보며 백현이 욕을 뱉었다.
- 넌 왜 왔어, 씨발 년아.
- 경수가 전화를 안 받아서.
- 남의 마누라 전화기 울릴 일이 뭐가 있는데.
- 아, 시끄러워. 도경수 발 왜 이 지랄인데.
- 지가 깨서 올라 타 밟은 걸 어쩌라고. 네 년 앞에 있는 고상한 년한테 물어봐, 어제 왜 그 지랄이었는지.
- 아, 리모컨.
찬열은 덕지덕지 붙어 있던 반창고를 다시 떼어내는 중이었고 백현은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반은 마시던 참이었다. 아주 익숙한 상황인 듯 셋은 그랬다. 설마 저기 개박살난 게 우리 집 리모컨은 아니겠지. 경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뱉자 백현이 코웃음을 쳤다. 리모컨뿐이겠냐? 텔레비전도 개박살인데. 저게 도대체 얼마짜리인데 저걸 부숴. 텔레비전보다 비싼 도경수도 부수는 마당에 텔레비전이 대수야?
- 아, 짜증 나. 변백현 진짜.
- 어쩌라는 건데 외간 남자 집안에다 들이는 년이 말이 많네.
- 유일한 친구란 말이야.
- 퍽이나 씨발 년아 박찬열은 네 년 좋다고 꼬리 흔들고 따라다니는 개새낀데.
- 변백현 왜 또 시비야.
- 시비 안 걸게 생겼냐?
생수병을 소리나게 식탁에 내려놓은 백현은 찬열에게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백현의 손에 닿는 모든 물건은 이상하게 모두 식탁으로 돌아갔다. 백현이 조용히 가운데 손가락을 둘에게 올리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박찬열은 나가고 도경수는 들어와라, 진짜 좆같으니까 니네 붙어 있는 거.
- 너무 신경쓰지 마. 쟤가 저래도 맘은 안 그런 거 알지?
- 마음이 안 그러긴 뭐가 안 그래. 다 마음이 시킨 말인데.
- 아, 좀 조용히 해, 변백현.
- 괜찮아. 네 발 병원이라도 가야하는 거 아니냐?
- 집 나가면 또 좆같아져, 변백현은.
그러고 한참을 백현은 안방에만 있었다. 밖에서 가끔 크게 들리는 박찬열과 도경수의 웃는 소리라든지. 꼭 나만 없으면 존나 세상 제일 행복할 년들이야.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 백현 혼자만 우울한 기분이었다. 도경수는 너무 어렵다. 도경수를 아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걱정했던 일은 전부 일어났고, 더이상 걱정하지 않는 일 같은 건 없다. 그게 백현이 미쳐가는 이유였다.
점심을 먹는 일이 어쩐지 경수에게는 고역이었다. 분명 셋이서 즐겁게 웃고 떠들던 적이 있었다. 말도 없이 짜장을 비비고 있는 백현이 어쩐지 우울해 보여서 경수는 걱정이 됐다. 경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이 지금보다 더 좆같이 돌아가도 결국 경수는 백현을 사랑할 것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상황에 짬뽕 국물을 들이키던 경수가 결국 말을 뱉었다. 분위기 왜 이래.
- 어? 왜 이러냐고.
백현도 찬열도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각자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경수가 한숨을 쉬며 타는 속에 짬뽕을 더 들이부었다. 그렇게 셋이서 아주 정적인 점심식사를 마쳤다. 찬열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경수에게 발 소독 잘하고. 하며 웃었을 뿐이다. 백현은 이 상황이 좆같았다. 나름 셋이 있을 때 즐거웠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둘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져 있는 모습만 봐도 둘을 엮느라 백현의 머리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 도경수.
- 왜.
- 네가 했던 질문, 나도 해도 되냐?
- 뭐?
- 행복해? 너 말이야.
또 허공에서 얽히는 둘의 시선에 주변의 공기가 잠시 얼었다. 요즘은 무슨 말을 해도 5 분은 기본으로 조용히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았다. 그렇게 경수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묻잖아, 답이 늦어. 재촉하는 백현에게 경수는 그저 웃었을 뿐이다.
백현이 있으면 다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다. 피할 수 없는 그 시선을 3 초라도 받아내고 있자면 세상에 모든 꽃을 피울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경수에게 백현은 그런 존재였다. 미소를 머금은 경수가 백현에게 대답했다. 백현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아니, 행복하지 않아.
다시 찾아온 새벽은 아주 길었다. 같은 침대에 누워서도 둘은 어딘가 어색했다. 머리에는 하나의 질문만이 경수를 계속 괴롭혔다. 정말 우리 이대로 괜찮아? 혼자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에 경수는 왜인지 억울해져 왈칵 울음을 뱉고 싶었다. 옆에는 백현이 팔로 눈을 가리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마주쳐지지 않는 눈을 바라보며 다시 경수가 말을 뱉었다.
- 백현, 자?
- 아니.
- 묻고 싶은 게 있어.
- 응, 뭔데.
- 나를 사랑해?
- ......
- 우리 지금 이대로 괜찮아?
- ......
- 지금 너랑 나, 이래도 괜찮은 거냐고.
종국에는 결국 경수의 울음이 터졌다. 지난 학창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연애. 보통 사람들은 아무래도 지금을 권태라고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이름을 닳도록 부르며 경수가 물었다. 정말 괜찮아? 우리 괜찮아? 경수의 울음에 결국 백현이 목울대를 울컥이며 말을 뱉었다.
- 나는, 나만은 행복하지 않더라도, 네 옆인 게 다행이야. 아주 사소한 것부터 커다란 것까지 그 모든 게 네 옆이라 괜찮은 것 같아. 근데, 근데 말이야, 도경수.
백현이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네가 행복하지 않은 건 싫어. 단호히 뱉어진 말에 경수가 더 울음을 냈다. 미안, 미안해, 백현아. 울고 있는 경수의 옆에서 아주 조용히 백현도 눈물을 흘렸다.
백현은 꿈을 꾸었다. 경수와 둘만 남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이 미쳐서 이 사랑을 망쳤다는 생각이 백현의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 하기사 여태 자신이 시작했던 일 중에 좋게 끝을 본 것은 무엇도 없었다.
우리는 정말 사랑했던 걸까? 괜찮았던 걸까? 우리가 서로 머리를 맞대도 절대 답이 없을 질문을 다시 백현 혼자 되새겼다. 지금 눈을 뜨면 다시 고등학생 때의 변백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손에 닿는 공기는 차갑다. 백현 주위의 모든 것들이 백현을 향해 욕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 완전히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미쳤다.
경수와 마주한 아침은 숨을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퉁퉁 부은 눈과 갈라진 목소리로 한 번 더 경수가 말을 뱉었다.
- 우리 헤어지는 거야?
- 행복하지 않다며.
- 백현아.
- 헤어지자.
- 나는...
- 미안하다, 내가 미쳐서.
씨발 년. 끝까지 부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만 놓으면 사라질 관계였음을 백현이 다시금 자각한다. 백현은 자신을 비웃었다. 미련하게 구는 게 얼마나 추한지도 모르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지막이다.
- 사랑한다고 해 줄 수 있어?
- 백현아.
- 어쩌면 나, 아주 후회할지도 몰라.
- ......
- 나 다시 네가 필요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제발, 도경수...
거짓말이라도 네가 사랑한다고 하면, 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경수는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 고마웠어, 변백현. 욱신거리는 발이 이제는 저릴 정도로 아팠다. 떼어지는 반창고를 보면서 경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백현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걷고 걷고 또 걸을 동안 경수는 식탁에 엎어져 한참을 울었다. 백현의 발에서 피가 배어났다. 채 아물지 못한 상처에 무리하게 걸은 탓이었다. 이를 꽉 물고 걸었다. 기왕이면 아주 멀어지고 싶었다,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다. 똑똑, 찬열이 식탁을 두드렸다. 울지 마, 도경수.
결국 세상에 백현 혼자만이 남았다.
어딘지도 모르겠는 동네 놀이터 그네에 털썩 앉은 백현이 자책했다. 아무리 그래도 헤어지자고 해서는 안 됐다. 기다렸다는 듯 덥석 받아문 경수도 그랬다. 박찬열의 얼굴이 끝으로 떠오르며 씨발, 말을 뱉었다. 더 이상 얼마나 추해질 수 있을까. 백현도 스스로가 웃겼다. 죽음을 맹세해서는 안 됐다. 감히 그래서는 안 됐다. 백현의 주위를 맴돌던 불행이 이제는 백현의 어깨 위에 올랐다. 가끔 경수가 기댔던 그 어깨는 더 힘이 없어 보였다. 추적추적, 하필 비가 내렸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집을 뛰쳐나오는 순간부터 백현은 후회했다. 경수의 집으로 가던 찬열의 모습을 보고서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 둘이 잘 먹고 잘 살겠지, 씨발 년들. 나만 없으면 행복할 이들이었다. 놀이터 모래바닥에 도경수 이름 석 자를 쓰고 자신의 손에 입 맞춘 백현이 천천히 운동화 끈을 풀어냈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찬열이 서 있었다. 눈에 자꾸 차오르는 눈물이 멈출 줄을 몰랐다. 찬열이 한숨을 쉬며 팔을 떨궜다. 변백현 진짜 병신이네. 그 병신 좋아하는 도경수도 병신이고, 그 병신 좋아하는 병신을 좋아하는 나도. 답답한 가슴을 찬열이 탁탁 쳤다. 멍청히 경수가 울고 있을 때였다.
- 안 따라가?
- 어떻게 따라가, 걔를 내가, 어떻게...
- 내가 여태 너희를 봐서 아는데, 너희는 떨어지면 죽어. 죽는다고.
- ......
- 붙어 살아, 둘이 평생.
그 말을 끝으로 쑤시는 발을 이끌고 경수도 뛰쳐나간 것 같다. 찬열이 조용히 경수 집의 문을 닫으며 나왔다.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 셋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곤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선 안 됐다. 죽음을 맹세하면서까지 사랑한다는 저들을 떼어놔서는 안 된다. 죽음을 맹세한 사랑을 감히 내가 어떻게, 절대 가볍게 볼 수 없다. 그것을 그들만 모른다. 찬열은 조용히 기도했다. 둘이 다시 사랑하기를.
목을 매달아 죽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경수가 오기 전까지는. 밖을 전혀 나가지 않는 백현에 비해 꾸준히 바깥 생활을 했던 경수가 동네 지리를 모를 리 없다. 운동화 끈으로 만든 매듭이 초라했다. 뒈질 때도 이러고 뒈지네. 천천히 머리를 끼우려던 그때 품에 무언가가 안겼다. 변백현, 죽지 마. 알딸딸한 백현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속눈썹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꽤나 감흥스러웠다. 품에 안겨 미안하다며 눈물을 쏟는 경수를 어쩡쩡하게 끌어 안고는 토닥였다. 시끄러워, 도경수, 나 괜찮으니까... 어설프게 경수를 달래는 백현의 입을 기어코 경수가 막았다. 천천히 얽히는 혀에도 울음은 섞였다. 경수의 뒤를 단단히 받친 백현이 경수의 안을 좀 더 파고 들었다. 못 참아. 먼저 건든 건 도경수니까.
그러고 둘은 한참을 키스했다. 키스 와중에 멈추지 않는 경수의 눈물을 백현이 닦아냈다. 아쉽다는 듯 두어번 짧게 입을 맞춘 둘이 코를 맞대고 숨을 골랐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 도경수.
- 응.
- 행복해?
- 응, 행복해.
- 너 나 사랑해?
- 사랑해.
- 우리, 지금처럼 해도 괜찮아?
- 응, 좋을 지경이야.
- 환장하겠네...
품에 안긴 경수의 어깨에 파묻은 백현의 얼굴이 뜨끈거렸다. 백현의 목에 경수가 잘게 입 맞췄다.
- 미친 새끼야.
- 오빠 지금 좀 열 나는 것 같아, 어때?
- 그냥 또라이 같은데.
- 집으로 가자는 말이 그렇게 어려워?
- 야.
- 왜.
- 사랑한다고.
백현의 품을 더 파고들며 작게 웃은 경수의 머리를 백현이 살살 쓰담았다. 백현이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경수를 사랑하는 일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꾼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 경수의 젖은 머리를 손으로 자꾸 쓰담아 내리며 백현이 백 번은 더 속삭인 말이다. 다시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