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훈은 정말 또 우리 반을 찾아왔다. 다음 시간에도, 다음 다음 시간에도, 다음 다음 다음 시간에도, 다음 다음 다음 다음 시간에도!! 내 앞에 마주보고 앉아서는 혈액형이 뭐에요? 생일은 언제에요? 이름 무슨 뜻이에요? 형제 있어요? 제일 친한 친구 누구에요? 이상형이 뭐에요? 등의 질문을 쉴새없이 물었다. 처음 보는 녀석에게 내 얘기를 하는 게 어색해서 우물쭈물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녀석이 워낙 붙임성이 좋다보니 금방 친해졌다. 웃는 얼굴이라 쏟아지는 질문에도 귀찮다고 할 수 없었다. 박경도 뜬금없는 표지훈의 등장에 놀라는 듯 싶더니 나중엔 신나서 같이 내 얘기를 조잘거렸다.
"얘 존나 눈 높아. 지 주제에. 허벅지가 꽉 찬 여자가 좋다나?"
"헉 그게 뭐에요. 완전 변태네 변태야!"
너네는 수다떠는게 아줌마 급이냐.
"야 종쳤다. 빨리 가."
"벌써요? 으아~"
재빨리 뛰쳐나가는 모습이 생긴 것과 다르게 귀엽다. 자주 웃는 거 하며, 표정과 몸짓 하며, 아무튼 귀여운 구석이 좀 있는 거 같다. 박경은 표지훈이 사라지자마자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야. 야야."
"으 간지러! 왜."
"쟤 왜이렇게 니 좋아해? 둘이 뭐 있냐?"
이건 뭔 개소리야. 날 좋아한다니?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박경이 답답한 듯 말한다. 넌 꼭 사람관계는 둔하더라, 쟤 계속 찾아와서 네 얘기만 하고 가잖아. 그러고보니 그랬다. 전 상황을 곱씹어보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나한테 관심이 아주 많은 것처럼 보인다. 계속 찾아오는 이유조차 불명확했다. 수다떨고 싶어서? 그건 당연히 아니겠고. 박경은 생각에 잠긴 날 조용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쟤가 너... 아니, 못맡았을리가 없지."
"뭐? 내 냄새?"
박경은 한숨을 길게 쉬더니 잔다면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내 냄새 얘기는 왜 나와? 내 냄새. 내 향. 그러고보니 표지훈이 내 손목을 붙잡은 것도 내가 스쳐지나간 직후였다. 날 붙잡은건 내가 풍기는 향 때문이었나. 지금은 귀여워 보이는 표지훈이지만, 녀석에게 손목을 붙잡혔을 때 신비스럽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내 냄새가 뭐길래 그런 표정을 지은거야. 나한테 관심을 보이고 계속 찾아오는 것도 내 냄새 때문이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오늘 하루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지만 솔직히 말하면 표지훈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무서운 표정으로 말을 까더니 계속 선배, 선배 부르면서 말을 거는 것도, 목소리는 굵고 낮은 주제에 귀여워보이는 웃는 얼굴도 , 덩치는 커서 야무진 제스쳐도, 모두 의외였고 그게 표지훈에게 관심을 갖게 했다. 근데 녀석이 내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고작 내 체취뿐이라는 거야? 나는 이게 항상 콤플렉스였다. 내게 다가 온 많은 사람들이 나 자신을 보는 게 아니라 내 향을 맡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두려움. 잊고 있던 그 두려움이 지금 내 가슴 속에 일렁이는 듯 했다. 표지훈도 결국 그 중 한 명일까.
마지막 수업시간이 끝났다. 담임선생님의 종례가 끝나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우리 학교는 꼴통학교라고 소문난 곳이라 보충이나 야자를 하는 애들은 거의 없다. 시험기간에만 반짝 공부하는 애들이 대부분이고 꾸준히 공부하는 애들은 상위권 몇 명 뿐이다. 선생님들이 강제로 야자를 시키면 난장판이 돼서 역효과만 날 뿐이라 백퍼센트 자율이 된 후로는 더 그렇다. 나 또한 공부에 흥미 없는 애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바로 집에 갈 준비를 하고있었다.
"우지호! 나 먼저간다."
박경은 먼저 교실을 나갔다. 집이 완전 반대방향인 것도 있고, 저 녀석은 하도 여자가 많아서 하교할 때 같이 간 적이 없다. 이번엔 누굴 만나러 가려나, 하고 박경이 사라진 뒷문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표지훈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선배! 아까 우체국 쪽 사신다고 하셨죠? 같이 가요."
방금까지도 표지훈을 생각하면서 심란했던 마음이 싱글벙글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풀리는 듯 했다. 그래, 같이 가자, 하고 교실을 나섰다. 옆에서 쫑알쫑알 얘기하는 모습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했다.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법을 아는 것 같았다. 내가 무심하게 대꾸해도 녀석은 계속 웃었다.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은 사람은 얘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근데... 얘가 정말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내 냄새때문이면 어떡하지? 또 다시 나를 감싸는 두려움에 좋았던 기분이 다시 가라앉는다. 내가 표지훈한테 호감을 느낄수록 그 두려움이 점점 더 커졌다. 겨우 오늘 몇 시간 얘기 나눈 것 뿐인데 이 녀석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진짜 미치겠네.
"선배? 왜 갑자기 표정이 굳었어요?"
"아니... 아니야."
"아니긴요. 선배 아까 향수 얘기할 때랑 표정 똑같아요."
내가 말이 없자 표지훈도 말을 아꼈다. 터벅터벅 발소리만 우리 사이를 메꾸고 있었다.
"나 사실... 좀 두려워."
곧 나도 모르게 말문을 열었다.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내 오랜 친구 박경에게도. 처음 본 녀석에게 내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춰 보여줘도 되는걸까? 아니, 오히려 처음 본 녀석이기에 내 마음을 보이기 편했다. 게다가 표지훈은 날 따르고 존중해 주는 게 눈에 보여서 더 솔직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우지호가 아니라 우지호의 향... 냄새만을 좋아할까봐. 그리고 너도 그럴까봐..."
표지훈과 나는 걸음을 멈췄다. 괜히 말했나, 하는 후회와 뭔지 모를 쑥스러움 때문에 진지하게 변한 표지훈의 눈빛을 피했다.
"선배, 있잖아요."
그 무거운 분위기를 먼저 깬 건 표지훈이었다.
"선배 굉장히 매력있는 사람이에요. 그 향... 그것만 매력있는 게 아니라요. 그니까, 음, 그... 이렇게... 아... 뭐라고 말해야되지? 그... 얼굴도 이쁘구요, 아, 이쁘다고 하면 안되나? 눈도 매력있고 코랑 입술도 매력있고 키도 크고 이르케.... 막 풍기는 분위기가요.... 막 일케, 막...!"
"푸핫, 야 너 왜 이렇게 말을 못 해!"
횡설수설하는 표지훈이 귀여워서 굳어진 얼굴이 풀리고 웃음이 나왔다. 핀잔 아닌 핀잔을 주자 그러니까, 제 말은요 하면서 설명하려고 하는 게 완전 애같다.
"선배가 좋다구요... 모든 게 다."
'내 모든 것이 좋다.' ...이 한마디에 머리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구 얽혀있던 실뭉치가 풀렸다. 너는 내 모든 것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내 향만이 아니라. 날 이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난 왜 향수를 뿌린 듯한 나를 그토록 싫어했을까. 그 향마저 온전히 '내 것', '나'인 것을 왜 몰랐을까. 그 향을 떼어놓으려고만 하지 말고 나의 일부임을 인정했어야 했다. 자연스러운 내 모습 그대로를 봐야 했었다. 지금 표지훈이 날 보는 것처럼.
"고마워. 나도 너 좋다."
홀가분했다. 내 오랜 고민을 표지훈이 해결해 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선배... 근데 제가 좋다고 한 건 그런 뜻이 아니라,"
"야 너 평소에 책 많이 안읽지? 말하는데 이르케가 몇 번이나 들어가는거야!"
내가 크게 웃자 표지훈이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꼬물거렸다. 저 하트입술, 진짜 귀여워. 기분 좋다.
"아, 난 이 쪽으로 가야돼. 오늘 만나서 좋았고, 고맙다, 지훈아."
오글거려서 성 떼는거 진짜 싫어하는데 이 녀석은 그게 더 어울린다. 욕쟁이에다 싸가지 없다고 날 욕하던 박경이 들으면 평생 놀림감이 되겠지. 표지훈은 살가운 내 말투에 놀라는 듯 하더니 어버버 말을 더듬는다. 내가 좋아하는 키티보다 더 귀엽다니까,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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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쓰고싶은뎅 컴할 시간은 없고 모티는 불편하고 ㅠㅠ 죄송해여 수능 끝ㄴㅏ면 더 자주 쓰도록 노력할게요 그리고 댓글 꼼꼼히 읽고 있어요! 계속! 부끄러워서 댓댓글은 못썼지만 헤헿 다음편도 기대해주thㅔ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