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처음 만나던 날.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하였다.
처음 본 순간... 그대를 雪花 라 일컬으니 너는 내게 스며들어와 하얀 '눈꽃' 이 되었다.
"설화라... 참으로 예쁜 이름입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보이는 선월과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그에 답하는 쑨양.
둘 사이에 따스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은...이날 밤 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뜻마저 너무 예뻐 입가에 미소짓게 만드는 이름은 그의 마음이 담겨있기에 더욱 선월의 마음을 울렸다.
[설화라는 이름은 나으리께서만 불러주시어요. 그 누구에게도 허락치 않겠습니다.]
그 이후로 쑨양은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설화' 를 찾았다.
술 몇잔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남자와 여자의 어색한 만남이 아닌... 편한 친구와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듯한 대화가 많아졌다.
문득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쑨양의 알 수 없는 표정에 마음 한켠이 무거워지기도 했지만
어느새 따스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대하는 그를 보며 그런 생각은 곧 지워버렸다.
다른 사내들처럼 자신의 손을 함부로 잡으려하거나 천대하지도 않았다.
늘 예를 갖추고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에 오히려 편히 자신을 대해 달라며 설화가 부탁하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알수는 없었으나 그의 품행과 언행.. 그리고 단정한 옷차림만 보아도
쉽게 대할 이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처음 그를 데려온 이가 당상관 나으리라는 이야기를 뒤늦게 여주인에게 들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탁자 위에 조심히 내어놓은 서책 한권에 설화는 두 눈을 크게 떠올렸다.
"문학에 관심이 많은듯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표지를 고운 손길로 쓸어내리는 모습에 쑨양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채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여인들과 달리 사내와 같은 올곧은 성품에 평소 글과 문학에 관심을 보이던 설화에게 꼭 내어주고 싶었던 책이었다.
저리 예쁜 미소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쑨양은 가지고 오길 잘하였다.. 그리 생각했다.
혹, 부담스러워 받지 않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였는데 여인의 표정을 보니 그런 생각이 사라져버린다.
쑨양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술을 살짝 적시고 여전히 서책만 쓰다듬는 설화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겨울이 깊어져 찬 바람이 가슴에 이는데 봄을 닮은 하얀 꽃잎이 내 가슴에 날아와 스민다.
어디서 날아온 것인가, 주위를 둘러봐도 알 길 없는데... 내 눈앞에 그대의 미소가 봄빛을 닮아있다."
조용한 그의 목소리에 서책을 쓰다듬던 설화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다정한 얼굴.
눈이 마주치자 붉어진 뺨을 감추려는듯 곧 시선을 피해 다시 술잔을 들어올리는 그를 바라보다 설화는 살풋이 웃어보이고
붉은 입술을 달싹여 그에 답했다.
"시린 겨울 바람과 같은 내 마음에 찾아들어온 이여, 차가운 내 마음의 빗장을 열어 봄빛을 선물하니,
나는 그대의 부름으로 하얀 꽃잎이 되었습니다."
곱고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생각지 못한 여인의 화답에 쑨양은 놀란 얼굴로 설화를 바라봤다.
살풋이 웃으며 고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에 쑨양은 환한 얼굴로 마주 웃어보였다.
겨울이 자꾸만 깊어져 차가운 바람이 목채 건물 안으로 스며드는데...
두 사람 사이엔 따스한 봄과 같은 기운만이 감돈다.
"이보게. 김재호! 자네 그 얘기 들었는가?"
술 한잔을 들이키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둥글한 인상의 한 남자가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끝으로 닦아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행동에도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는 다른 남자의 얼굴에는 궁금해하는 기색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의 호들갑스러운 행동에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요~산자락 하나 넘어 들어가면...은밀하게 열리는 술집이 있다하던데. 그 집에 '선월'이라는 계집아이가 그리
이쁘다하더구만."
'선월' 이라는 계집의 이름 하나에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던 김재호의 시선이 그제서야 남자에게로 향했다.
"대화방인가..뭔가..하던데. 흥미가 생기지 않는가?"
어찌 저희를 두고 다른데 가냐며 남자의 팔을 붙드는 기생의 애교에 남자는 귀찮다는 듯 떨쳐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만 가는 곳이라 하더군. 선월이라...캬~ 이름까지 색기가 도는 구만~"
입맛을 쩝쩝 다시며 술잔을 다시 들어올리는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김재호는 설핏 웃음을 지어보였다.
호남형의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는 권력의 실세인 사대부가의 자제이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단정하고
품격을 지키는 모습 외에 권세를 믿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비열한 족속의 인간이었다.
평소 글과 정세에 관심을 두기보단 기생의 치마폭에 쌓여 술과 도박을 일삼는 한량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여인의 소식은 흥미롭지 않을수 없었다.
온갖 기방은 다 떠돌아다닌 그인지라 안그래도 재미가 없어져 이짓도 그만두려던 찰나에 들려온 희소식이었다.
게다가 외모까지 출중하다니...!
술 한잔을 들이키는 김재호의 눈빛이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그 나으리가 요즘 자네한테 푹~빠져 사는것 같던데? 어찌 된 일이오?"
입술에 연지를 찍어 바르는 태환을 바라보며 금옥이 두 눈 가득 호기심을 내비쳤다.
경대에 얼굴을 비춰 모양새를 확인하고 가채만 매만지는 그의 행동이 답답한지 금옥은 태환의 어깨를 잡고 자신쪽으로 돌려세웠다.
"무엇이 궁금한거요?"
"아니..그러니까~ 그 나으리가 자네한테 빠진것 같은데... 둘 사이가.."
차마 입을 마저 떼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금옥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챘는지 태환은 흠~하고 작은 숨을 내어쉬고는
다시 경대에 자신을 모습을 비췄다.
"좋은 분이오. 금옥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 붙드시오."
어느새 단장을 마친 태환은 금옥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는 모란실로 가기 위해 치마자락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문을 밀고 나서려던 그가 밖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곧 행동을 멈추고 금옥을 바라봤다.
손님이 오기엔 이른 시간이건만, 아직 모란실에 들지도 못하였는데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방문에 두 사람은 크게 당황하였다.
"자네. 여기 계시오. 내가 보고 오겠소."
나서려던 그를 붙잡아두고 금옥은 급한 걸음을 떼어 밖으로 향했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여주인의 뒷 모습을 쫒으며 태환은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해 아랫 입술만 잘근 물어댔다.
"어찌 오셨습니까?"
불빛 아래 서있는 남자의 형상에 금옥은 잰걸음으로 그 앞에 다가섰다.
처음 본 낯선 얼굴의 남자가 차가운 시선으로 금옥을 깔아보고는 이내 목채 건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금옥은 등자락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뒷짐을 선채로 목채 건물을 이리저리 보던 남자를 힐끔 힐끔 바라보던 금옥은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 하나에
얼굴이 굳어버렸다.
"이곳에 선월이라는 아이가 있는가?"
딱딱하게 흘러나오는 차가운 음성에 금옥은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여보였다.
"맞게 찾아왔군. 내 그 아이를 좀 봐야 하겠는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그의 표정에 시선을 두었다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금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이 일러 준비가 덜 되었습니다. 잠시 이쪽에 머무시지요."
태환이 있는 곳과는 다른 반대 방향으로 그를 이끌며 금옥은 긴장감에 땀이 베어 나오는 두 손만 꼭 쥐었다.
어찌 알고 찾아온지는 알 수 없으나 차갑고 시린 그의 인상에 금옥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를 앞서 걸으며 이 상황을 어찌 대처해야할지 금옥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자네를 찾아왔는데..처음 본 사람이오. 눈빛이 서늘한게......어휴...기분이 좋지가 않으네. 무조건 조심하시오.]
걱정을 하며 모란실까지 그를 데려다주던 여주인의 말이 떠올라 선월은 긴장감에 한숨만 쉬어댔다.
애써 긴장을 풀어보려 애쓰지만 손에 베어나오는 땀 때문에 치마자락이 젖어든다.
이제나저제나 들어올까 입구만 힐끔 힐끔 바라보던 선월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곧게 자세를 잡고 앉았다.
하늘 하늘한 장막이 걷히고 안으로 들어서는 커다란 사내의 모습에 선월은 시선을 내리깔고 가만히 숨을 죽였다.
"네가 선월이냐?"
차가운 공기를 깨는 낮은 음성에 선월은 흠..하고 숨을 내쉰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가만히 앉아있는 자신을 훑어내리는 그의 기분 나쁜 시선에 선월은 입도 떼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버렸다.
온 몸 구석구석을 핥아내리는 듯한 뱀과 같은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져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자신에게 다가와 앉은 사내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고 대단히 만족한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흠...제법이군."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선월은 얼른 시선을 거두고 옥빛 술잔을 들어 그의 앞에 놓으려 손을 움직였다.
그의 앞에 잔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손에 닿아오는 체온에 선월은 화들짝 놀라 행동을 멈추었다.
"손이 곱군. 이런 곳에서 술이나 파니 그런건가?"
손등을 감싸는 그에게서 서둘러 손을 뺀 선월은 굳어가는 입가에 겨우 미소 하나를 머금었다.
"이곳에서는 신체적 접촉은 금하고 있습니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십시오."
"접촉을 금한다라... 남, 여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어찌 접촉이 없을수 있는가?"
"이곳의 방도입니다. 높으신 분인듯 하니...알아주실거라 믿겠습니다."
부탁하며 고개를 숙여보이는 선월의 모습에 남자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 그렇다면 내가 너를 안으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그리 될 일은 없을 듯 하온데..."
아랫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끝을 흐리는 선월의 모습에 남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선월의 턱을 잡아 거칠게 치켜세웠다.
"당돌한 계집이구나.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느냐!"
"....................."
매서운 바람과 같은 그의 언성에 선월은 등자락에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턱을 쥐고 비열한 웃음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 두 눈을 내리깔고 애써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자 비틀어진 입술을 열어 그가 조용히 선월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여왔다.
"기억해라. 내 이름은 김재호이다."
"..................."
"그래.. 계집은 이런 앙칼진 맛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마음에 들었다."
"...무슨..."
"나 김재호가 너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말이다. 가지고 싶은 것을 쟁취하지 못한다면 그건 사내가 아니지."
턱을 쥐었던 손을 떼고 비틀린 웃음을 지어보이는 그의 모습에 치맛자락을 쥔 선월의 손이 땀에 젖어든다.
점점 붉어져오는 여인의 눈을 바라보던 김재호는 주병을 들어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그대로 입속에 털어넣었다.
그러고는 술값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가 살고자 한다면, 다음에 내가 올때엔 꽃같은 그 얼굴에 미소를 지어야 할 것이다."
입술을 꼭 깨문채 부들 부들 떨고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한번 맞추고는 김재호는 그대로 모란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살짝 열린 붉은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이 터져나왔다.
커다란 눈에서 떨어져 내리는 굵은 눈물 방울에 선월은 자기 자신도 너무 놀라 급히 훔쳐냈다.
그럼에도 쉴새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탁자 위에 놓인 돈을 바라보는 시선이 자꾸만 흐려진다.
***
안녕하세요..흰둥이입니다~
벌써 6화인데..진전이 그다지 없지요?
이번 연재는 좀 길게 해볼까 했는데...
지루해지고 있는게 아닌가....싶은 생각이 드네요.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고 있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음이야기 들고 오면...그때 암호닉 확인 한번 할께요..
이번 '설화'는 나중에 텍파 나눔할때 1화부터 현재까지 암호닉 주셨던 분들께만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왜 그러는지 설명드리지 않아도 아시리라 생각됩니다ㅎㅎㅎ
근데..암호닉 없이 댓글 달아주신 고마운 분들은....헙!
혹..암호닉 있으시면 댓글 부탁드려요!!
늘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차!! 그리고요....저도 그냥 흰둥님이나..둥이님이나..뭐 요런 필명으로 불러주세요~
작..가...님...은 볼때마다 부담작렬이라...ㅠㅠㅠㅠㅠㅠ
왠지 거리감 느껴지고..딱딱하고...불편하고..참...하..
암튼~필명으로 불러주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