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화
혹 새 달 할
할 길 글
迷 鏤 甘 和 書
15. 完
파루(罷漏)를 알리는 누고가 울었다. 마루 아래까지 깔려있던 새벽의 장막이 느린 속도로 거둬지고 있었다. 이유 없이 멀뚱히 떠진 눈은 자리에 누운 내내 천장만을 향해 보고 있었다. 우현의 머리맡에 내팽개쳐진 서찰이, 창호 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뒹굴었다.
기상을 알리는 소리는 평소보다 한 식경(30분) 정도 빨랐다. 졸음 가득 눈에 달은 유생들은 한 식경이나 빠른 기상 소리에, 세수를 하다 말고 젖은 손으로 조보를 꺼내 들었다. 간밤, 홍문관에서 내려온 조보에 승정원의 소식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제일 먼저 조보를 꺼내 든 이가 젖은 손을 말리다 말고 대번에 질겁하여 소리를 내질렀다. 뭐라고! 쩌렁쩌렁 대청을 울리는 목소리에, 대야에 받은 물을 쏟아 붓던 이들이 호들갑스럽게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무언가? 무슨 소식이 실렸기에 그런가? 너도 나도 조보를 꺼내드는 이들은 종래에 하나같이 얼굴색을 바꾸었다. 대문짝만하게 실린 왕의 승하 소식에 어떤 이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섬돌 아래로 주저앉고 말았다.
청재 마루에 걸터앉아 손톱 끝을 물어뜯는 이의 심경은 이미 잿가루가 되어 있었다. 이미 볼품없이 뜯겨진 손톱을 짓씹던 우현이 번뜩이며 일어났다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 아무래도 마음이 좋질 않았다. 그것은 결코 왕의 승하 소식에 정권을 향한 근심이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독살이라 일렀다. 그리하면 지금 이 시각, 가장 피바람이 몰아치는 곳은 분명 내의원일 것이 뻔했다. 우현의 귓가에 어젯밤 조용히 이르던 옆 방 생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아마 지금쯤 궐에서는 사단이 났을 거네. 그렇다면 그 모든 사단의 중심은 바로 내의원일 터였다. 사단이 아니라 내의원의 찬장이 두 갈래로 쪽박이 나더라도 났을 게 분명하기에. 생각에 생각을 더할수록 치미는 불안감에 우현의 눈이 초조하게 궐 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각, 정록청에 내금위의 관원들이 드나든다는 얘기까지 귓가에 들어왔다. 섬돌에 올려두었던 다리가 자꾸만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모두 방에서 나오시오! 상유들은 모두 청재 마루로 모여 앉으시오!”
정록청의 관리 하나가 마당 안쪽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마침 기둥 뒤로 등을 기대고 있던 우현이 퍼득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를 뒤따라, 마악 세수를 마친 유생들이 저마다 야단이던 목소리를 죽이며 마루로 건너와 가부좌를 틀었다. 하룻밤 사이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저들끼리 속닥이는 소리가 모여 청재 마루가 온통 소란스러웠다. 흐트러진 사모를 허겁지겁 붙잡은 관리가 품속에 넣어두었던 교지를 꺼내들었다.
“간밤에 주상전하께서 붕어(崩御)하셨소. 전하의 장례를 치르게 되는 3일간 성균관에서의 강학은 금하게 될 것이오. 장례행렬이 끝나는 나흘 뒤부터 강학은 다시 시작되오. 반궁의 문은 계속 열려 있을 것이나 곧장 귀가하실 상유들은 그리하여도 좋소!”
두루마리를 다시 둘둘 말아 넣은 관리가 정록청 쪽으로 급히 뛰어갔다. 짧은 기별을 전해 듣고 나서 너도나도 어안이 벙벙해진 상유들이 저희들끼리 눈을 맞추며 말소리를 높였다. 마루는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멀찍이서 그들을 관찰하던 재직들도 코를 훌쩍이며 저들끼리 어리둥절한 눈을 맞추었다. 그러기를 일 다경(15분) 즈음 후, 일단 갑세, 하는 말로 상유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귀가 하라니까 하긴 해야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식의 목소리들이 방 안으로 사라지기를 잠시, 곧바로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온 걸음들은 저들의 신을 갖춰 신기 시작했다. 마루는 곧이어 귀가하기 위해 나온 상유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현만이 마루 위에 넋을 놓고 주저앉아 북적거리는 섬돌 맡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른다고 해야 하는 게 맞았다. 우현은 대궐을 향한 집춘문 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앉았던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다, 이 시점에서는 지금 곧장 궐로 향한다고 하더라도 문지기가 쉬이 문을 열어줄 리가 만무했다. 우현은 한동안을 씹던 손톱만 덧이어 씹다가 경기를 일으키듯 벌떡 일어났다. 홍문관!
“도헌, 자네도 집에 돌아가 볼 텐가?”
허겁지겁 도포를 챙겨 입는 우현을 돌아다 본 그의 방우들이 그리 물었다. 벌써 대자로 뻗어 누운 두 방우들은 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집에 돌아갈 생각은 없어 뵈었다. 우현이 대답을 거르고 갓을 챙겨 맸다.
“우리는 집이 멀어 그냥 반궁에 묵고 있을 생각이네. 혹, 귀가하는 것이라면 돌아오는 길에 반촌에서…”
“반궁에 내려오는 조보는 승정원이 아니라 홍문관에서 발행하는 것이 맞지?”
대충 갓끈을 동여매며 화를 내듯 버럭 묻는 우현의 말에, 하고 있던 말을 끊겨 먹은 방우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홍문관이네. 그에게서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우현은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흑목화를 있는 대로 구겨 신은 우현이 바쁘게 청재 마당을 벗어나 달렸다.
제 아비가 수장으로 있는 부서였다. 그러면 적어도 승정원으로 통해 온 소식 정도는 들을 수 있겠지. 우현의 내달리는 발에 속도가 붙었다.
*
우의정의 집 마당에 하인들이 고꾸라졌다. 의금부의 관원들이 쳐들어오자 혼비백산이 되어 집안 곳곳을 뛰어다니던 하인들의 신발이 여러 짝 마당 위로 나뒹굴고 있었다. 우의정 김혁중은 어서 나와 오라를 받으시오! 안채며 사랑채를 샅샅이 뒤지는 걸음들이 포악했다. 결국 너댓명의 관원들에 두 팔을 결박당해 끌려나오는 우의정의 얼굴빛이 퍼랬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채 압송되는 이는 채 신도 갖춰 신지 못하고 버선발로 끌려오고 있었다. 순장을 맞닥뜨린 우의정의 입술이 달달 떨렸다.
“이, 이게 무슨 일이오? 나는 금상께서 승하하셨다는 조보조차 일 다경 전에 받아 보았건만 어찌 나를 압송하는 것이란 말이오!”
“상부에서의 명이오. 대감께서 며칠 전부터 지속적으로 영의정, 좌의정과 자리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 입증되었소. 대감을 독살 가담의 용의자로 체포하라는 명이오.”
압송하라! 순장의 엄포에 두 팔을 붙들고 섰던 관원들이 무자비한 힘으로 그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아,아니오! 모의나 작당 같은 것이 아니었소! 단지 사적인 만남이었을 뿐이란 말이오! 그러나 우의정의 발악은 그들의 무수한 발걸음 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날벼락을 떠안은 그의 처며 조부가 압송되어가는 우의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넋을 잃었다.
영의정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애초에 내의원 도제조를 겸직했다는 것 자체로서 연결고리를 내어준 자이기도 했기에. 왕이 승하하던 순간, 때마침 영춘헌에 자리하고 있던 영의정은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압송이 되었다. 수의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영의정과 나란히 포승줄에 묶인 그가 한참 후에야 검서청 앞에 와 닿은 대사헌을 마주했다. 힘없이 꺾여 있던 수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어젯밤 보았던 이의 매서운 눈과 다시 마주하자 수의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머지않았소.”
대사헌이 수의의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 눈을 마주했다. 수의의 눈이 힘겹게 떠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무슨 말이긴. 이미 영의정과 우의정을 잡아 들였단 말이오. 방금 전엔 좌상 대감의 집으로 의금부가 내려갔을 것이오. 삼정승 중 하나만 남았으니 그게 머지않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오?”
묘하게 여유로워 뵈는 목소리가 그리 물었다. 수의의 입이 허탈함에 벌어졌다. 꿇어앉은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대사헌이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이를 흥미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아마 세간의 음양가들도 예언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대들이 벌인 오늘의 거사를.”
“그런 적 없소! 우리가 무슨 덕을 보자고 금상을 시해하려 든단 말이오? 현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건 외려 당신들, 노론 쪽이었소!”
“반감이라니… 그 무슨 섭한 소리시오?”
“…….”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을 뿐이었소”
대사헌이 굽혀 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꿇어앉은 수의의 고개 또한 그를 따라 자연스레 올라가자 대사헌의 매서운 눈이 그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는 꼴이 되었다. 대사헌의 입가에 미소가 올랐다.
“그래, 모두 내가 한 짓이오.”
“대사헌!”
“이리 말하면 어느 누가 믿어줄 것 같소?”
“…….”
“이 조선이 누구의 편을 들 것 같소? 나의 말을 들을 것 같소, 대감들의 독살 증거들을 믿어줄 것 같소?”
차마 다물어진 입을 내려다보던 대사헌이 그의 포승줄을 잡은 관원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수의의 몸이 억지로 일으켜졌다. 눈바닥에 억지로 앉았던 무릎이 날카롭게 솟은 돌부리에 쓸리자 그의 얼굴이 쓰라리게 일그러졌다. 우악스럽게 연행되어가는 수의를 다시 한 번 가로막은 것은 대사헌의 다음 말이었다. 아, 내 아쉬운 바가 하나 있소.
“이로써 의약동참청의 명망 높은 이들을 모두 참수하게 되어 나로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태산 같소만… 내 대감의 의술 실력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던 바인지라 이 상황이 정말이지 개탄스러워 죽을 맛이오.”
“…….”
“허나 그것이 화를 부를지 모르는 일이잖소. 이것도 이 노신의 애먼 노파심이라 여겨 주셨으면 하오.”
수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대사헌이 억지로 수의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하여 대감께서 남긴 싹은 한 포기도 남기지 말고 잘라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리다. 제 오만한 스승에게서 무엇을 보고 들었을지 모를 새파란 싹도 같이 잘라내야겠소.”
대사헌의 목소리가 유하게도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수의의 굳었던 표정에 미묘하게 살얼음이 일었다. 힘주어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풀려갔다. 그 말은…?
“혹시 모르는 일이잖소? 대감에게 독약을 만드는 법을 배워 놓았을지. 이 모든 것이 다 후대 왕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주시오. 그대의 제자가 수의에 오르는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후세 왕이 또다시 독살을 당할 위기에 처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오.”
“그…그 무슨, 그 아인 안 돼!”
설마하며 굳었던 수의의 입이 덜덜 떨리며 안 된다는 말을 뱉었다. 차분히 그의 말에 맞서 말하던 수의의 표정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독살을 일삼았다는 누명은 사실이 아니니 어떻게든 해명해 내어 풀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최대한 차분하게 표정을 고치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끔 한 순간 절제력을 잃은 수의의 목소리가 급기야는 커졌다. 그제야 대사헌의 입꼬리가 만족한다는 듯이 웃었다. 수의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이…이게 무슨 짓이오! 그 아이와는 일절 관련 없는 일이오! 내, 그 아이에게 손 끝 하나라도 댔다가는,”
“이미 관원들을 보내 놓았소.”
수의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안 된다는 말은 선정전 앞마당에서 그 아이와 나란히 앉아 직접 말하시오.”
“…….”
“내 그럴 기회를 드리리다.”
일벌백계. 내 말했잖소. 그 말을 끝으로 한 대사헌이 다시 한 번 턱짓으로 압송하라 명했다. 수의의 몸이 단번에 일으켜져 검서청 바깥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대사헌! 수의의 단말마 같은 목소리가 검서청 마당을 크게 울렸다. 대사헌이 끝내 웃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수의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삼정승을 끌어내게 되었다. 아마, 조정의 주요 당파를 비롯한 파벌에 있어서 새로운 판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내의원으로부터 점화된 불은 예조며 규장각을 가릴 것 없이 번져갔다. 삼정승을 비롯하여 호조와 예조의 높다 싶은 관리들은 죄다 선정전 앞마당에 꿇어앉게 되었다. 그야말로 줄초상이 하루아침에 벌어지고 있었다.
*
다락골 변두리 길목에 여인네들이 몰려 나왔다. 거의 살아생전 처음 보는 궐내의 관원들이 들이닥친 까닭에, 입소문을 타고 밖으로 나온 여인네들이 까치발을 들어가며 어느 집의 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줏빛 관복들이 허름한 집 앞을 빈틈없이 메우고 서 있었다. 웅성거리며 그 옆을 지키고 선 아낙 무리들이 저들끼리 속닥였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저 낡아빠진 집에 어느 정승이 살고 있기에 궐 사람들이 몰려와? 이 근방에 궐 사람이 사는 줄도 몰랐다며 호들갑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좁은 마을길에 야단이었다. 곧이어, 관원들의 팔에 이끌려 압송되는 이의 얼굴을 확인한 아낙들이 또다시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젊은 양반이네! 새파랗게 젊은 양반이야! 저 젊은 양반이 무슨 중죄를 저질렀길래 이리 험한 꼴을 당한담. 눈바닥 위로 거칠게 꿇어앉혀진 이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훑던 아낙들이 지레 손사래를 쳐가며 그를 화두에 올렸다.
이미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에 또다시 한기가 내쳐졌다. 날이 새도록 마당 앞에 앉았던 탓에 이미 얼대로 얼어버린 몸이 억지로 끌렸다. 호송되어 나오기 전, 필사적으로 손에 챙겨 쥔 뒤주머니와 종잇장이 억센 힘에 뭉그러졌다. 두 팔이 단번에 오랏줄에 묶였다.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으려 꽉 쥔 종이가 성규의 손 안에서 있는 대로 구겨졌다. 한껏 내리깔았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빨갛게 튼 손등에 성규의 눈물이 뚝 뚝 내려앉았다.
*
“벌써 사진하셨단 말이냐?”
숨에 부쳐 헐떡거리던 목소리가 단박에 터져 나왔다. 그에, 쩔쩔매며 집 앞을 지키고 섰던 하인이 수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요. 쇤네는 무지해 아무것도 모르옵지만 아마 궐내에 심상찮은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대감께서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사진하셨습죠.”
우현의 얼굴이 초조함에 무너져 내렸다. 쉬지 않고 뛰어온 탓에 밖으로 튀어나올 듯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에 돌덩이가 매달아진 것 같았다. 우현이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그럼 평소 퇴진 시간은 언제야!”
“퇴진은… 거의 술시가 다 되어서야…”
염병, 늦어! 하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악 문 우현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아비가 없는 집에 더 있어봐야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시간만 버렸다! 미처 숨을 고르기도 전에 다시 뜀박질을 시작한 우현이 왔던 길을 다시금 거슬러 내달렸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내의원은! 목구멍께로 내려왔던 숨이 또 턱 끝까지 차올랐다.
*
우악스레 팔을 잡아끄는 발걸음이 어느새 궐 앞까지 당도해 가는 듯싶었다. 성규의 눈에서 뚝 뚝 눈물이 떨어졌다. 반촌 앞을 지나는 호송 행렬에, 지나가는 장사치들의 온 눈이 그 쪽으로 쏠렸다. 저희들끼리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가시처럼 성규의 귓가에 와 박히는 듯 했다. 결국은 반촌을 절반쯤 넘어서야 성규의 목소리가 가까스로 터져 나왔다. 제, 제발!
“반궁에 들리게 해 주십시오. 아주 잠시면 됩니다. 그 곳만 거치게 해 주신다면, 소인 원이 없습니다. 부디 반궁을 거쳐 집춘문을 통해 궐로 들게 해 주십시오, 제발….”
무너지듯 자리에 꿇어앉은 성규가 제 팔을 붙들고 섰던 관원의 소매를 외려 붙들었다. 성규의 고개가 바닥까지 닿도록 깊이 떨어졌다. 제발, 제발…. 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조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 속에 섞여 들어갔다.
양 쪽으로 몰아쳤던 벼락은 끝내 같은 곳에 닿지 않았다. 이쪽에서 맞은 벼락과, 저 쪽에서 맞은 벼락은 결국 같은 자리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정이 동하면 위험했다. 마치, 그에 대한 천벌 즈음으로 여길 수 있음이었다.
“도헌, 어디서 무얼 하고 다녀오는 겐가? 방금 전 관군들이 들이닥쳤었다네!”
끝내 갈 곳을 몰라 우현이 다시 찾은 곳은 성균관이었다. 막무가내로 내달려, 창자가 끊어질 것처럼 턱 끝까지 찬 숨을 다잡기도 전에 들은 것은 또 벼락같은 소리였다. 쏜살같이 달려 도착한 청재 앞마당에 쓰러지듯 뛰어 들어온 우현을 맞은 것은 방에 남아 있던 두 명의 방우였다. 아마 저만큼이나 당황한 기색을 띤 방우들이 놀란 눈으로 우현을 훑었다.
“의금부로 압송되어가던 자가 반궁엘 들렸네. 자네를 찾았는데, 없다고 하니 금방 물러갔어. 한 일 다경 정도 됐을 거네!”
우현의 기도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
선정전 앞마당에 꿇어앉은 이들이 족히 서른은 넘었다. 앉으면 새로운 줄이 차고, 또 앉으면 그 뒤로 새로운 줄이 생겨 앉기도 여러 번. 약간의 간격을 두고 꿇어앉은 이들의 포승줄이 한데 엮어졌다. 새로운 무리들이 또 한 차례 앞마당으로 끌어졌다. 내쳐지듯 자리에 앉게 된 성규가 찬 눈바닥에 또다시 무릎을 대게 되었다. 눈물 자욱이 말라 볼품없이 튼 얼굴이 선정전 앞에 숙여졌다. 그러기를 한참, 성규의 고개가 서서히 옆으로 돌아갔다. 수의 대감과 눈이 맞았다. 성규의 눈에 다시 왈칵 화기가 찼다.
대감…. 무의식중에 떨어진 입이 제 스승을 불렀다. 엉망으로 꿇어앉은 대감의 눈 또한 서서히 끄덕여졌다. 성규의 입이 다시금 쉬이 떨어지지 못하고 달싹이고 있었다.
“네가…여기가 어디라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네가…”
성규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나자, 홀린 듯 넋을 잃은 수의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뱉어졌다. 서릿발에 헝클어진 머리칼이 자꾸만 시야에 어른거렸다. 성규야, 네가…. 그리 염려했던 네가 어찌…. 차마 끝마쳐지지 못한 말소리가 종래에는 끊어졌다. 수의와 나란히 눈을 마주하던 성규의 고개가 천천히 정면을 향해 돌아왔다. 문득 앞을 돌아보니 선정전의 거대한 현판이 머리맡에 자리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끊겼던 눈발이 한 두 송이씩 내리기 시작하더니, 그것은 어느새 무서운 기세로 나리기 시작했다. 완벽하게도 흰 함박눈이었다. 그것은 살랑거리며 눈앞을 유린했으며, 꽁꽁 언 콧잔등 위에도 사뿐히 내려앉았다. 성규의 눈에 초점이 가셨다.
곧이어 꿇어앉은 무릎 앞에 사발이 놓였다. 내의원에서 있을 적, 하루가 멀다고 보았던 탕약을 담는 큼지막한 사발이었다. 성규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졌다. 머리 위로 쉼 없이 떨어지고 있는 눈송이가 갈빛의 약 위에도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약의 단면 위로 떨어지는 눈이 녹아들고 또 녹아들며 자취를 감추었다. 성규의 눈이 가이없이 그것을 향했다. 무릎이 많이, 저려 왔다.
*
이미 숨에 달은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두 방우에게서의 기별을 전해 듣자마자 마음속에 벽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모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안 돼… 안 돼. 홀린 듯이 무작정 안 된다는 말만을 되뇌며 한 순간도 쉴 겨를이 없었던 다리가 다시금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집춘문 쪽이었다. 왕이 드나들지 않는 이상 열리지 않는 문이었건만 상관없었다. 무엇이든 해 보고 싶었으니까. 관군들이 반궁엘 들렀다면 필시 그곳을 통해 입궐하였을 게 분명했다. 우현의 달리는 발에 속도가 붙었다. 그러나 그것을 잠시 멈춰 세운 것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던 작은 각사 하나였다. 거짓말처럼 우현의 발길이 뚝 멈추었다. 세차게 뱉어지는 숨이 고요한 공기 중으로 뱉어졌다. 존경각의 현판이 우현의 눈길을 앗아갔다. 한순간 자리에 멈춘 우현이 한동안을 자리에 서서 밭은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자 우현의 다리는 다시 지체할 것 없이 도서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나. 이곳에 김성규가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우현의 서툰 발걸음이 문 앞에 걸려 있던 걸쇠를 내팽개치며 그 내부로 뛰어 들었다. 우현의 눈이 옥그릇을 향해 갔다.
“이게….”
한동안을 거두어가지 않았던 엽전들은 모두 온데 간 데 없었다. 우현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책장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우현의 손이 천천히 옥그릇을 감싸 들었다. 우현의 입에서 허탈한 숨 뭉텅이가 뱉어졌다. 엽전이 없다면 텅텅 비어있어야 할 게 마땅한 옥그릇에 낯익은 것이 내던지듯 들어 있었다. 구깃구깃한 종잇장 하나를 깔고 얹어진 다홍빛 향낭을 느린 손으로 집어 들었다. 우현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미 갖은 향이 모두 가신 성규의 향낭이었다. 우현이 덜덜 떨려오는 손으로 그와 함께 놓인 종이를 들어올렸다. 잠시 후에는 초조하게 흔들리던 눈빛이 일순간 바위처럼 굳었다. 답지 않게 서툴게 쓰인 글자 하나하나가 우현의 가슴을 칼침처럼 후벼 팠다. 종이를 붙든 우현의 손끝이 허옇게 변했다. 우현은 금세 제 눈자위가 따가워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우현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집어 던진 우현의 손길이 허겁지겁 향낭을 풀어 헤쳤다.
「도헌께서는 혹 기억하십니까? 하련대 앞에서 마지막으로 뵈었던 날, 도헌께서 소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도련님이 제게 어떤 존재인지를. 혹, 지금도 늦지 않았다면 소인 지금 대답하여도 되겠습니까?」
향낭을 연 손이 그 안에 들은 물건을 단번에 집어 들었다.
「본디 어의라 함은 오직 임금을 섬겨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 줄 압니다. 허나 소인은 소인의 주군을 바꾸겠습니다.」
기다란 전침과 약침들이었다. 마구잡이로 들어있던 시침 도구들이 뿌옇게 흐린 눈앞에 드러나게 되었다. 우현이 한없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었다. 이미 있는 대로 녹이 슬어 볼품없어 진 데에다가, 침의 끝도 뭉툭하게 닳아 있었다. 사용하던 시침이라 보기에는 너무도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비쳐 보였다. 그러다 이윽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제 스승에게서 받은 것이라며 사용해보지도 않고 오매불망 쳐다보기만을 하던 성규의 오래된 침술 상자.
「주군이십니다.」
‘소, 손대지 마십시오! 소인에게 중요한 상자입니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제가 건드렸던 시침 상자를 빼앗아 안았던 성규의 목소리가 미친 듯이 우현의 마음을 흔들었다.
‘언젠가 소인의 주군을 보필할 때 쓰기 위해 아껴두는 것이란 말입니다.’
밉지 않게 새침했던 목소리가 어둡게 꺼진 귓가 위에서 생생하게도 살아났다. 기어코 눈물은 떨어졌다. 뿌옇게 흐려졌던 우현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러기도 잠시 다시금 흐릿하게 눈물이 차자 우현의 입에서 허탈한 숨이 뱉어졌다.
「소인의 연심이 다음 생에서야 가능한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허면 일전에 도헌께서 이르셨던 것처럼, 도련님은 저의 임금이셨으며 소인은 그 첩이라고 하셨으니…」
기어코 터진 눈물은 온 뺨을 미친 듯 타고 내렸다. 우현이 들었던 향낭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치고 존경각을 뛰쳐나갔다. 밖을 나오자마자 떨어지는 눈발이 우현의 머리며 얼굴에 쉼 없이 내리 앉기 시작했다. 지랄한다. 서생원! 우현이 이를 악물었다. 우현은 거칠 것 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가라앉았던 숨이 다시 기도를 막고 차오르기 시작했다. 당장에 집춘문을 향해 가는 걸음에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묻어났다.
「다음에도 소인을 곁에 둬 주십시오. 허나 다음 생에서는 소인, 도헌의 정비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 때는 첩보다 정비를 더 아껴주시겠습니까?」
그 땐 이미 세상에 날 적부터 연심을 갖고 있을 터이니, 아마 지금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더 많이… 좋아할 수 있을 텐데.
대책 없이 쌓인 눈더미 위를 헤치고 달리는 발이 저들끼리 걸리고, 돌부리에 채여 몇 번을 자리에 나뒹굴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미 눈물로 어룽져있는 뺨이 한기를 만나 차게 얼었다. 우현이 씩씩거리며 다시금 내달렸다. 집춘문, 집춘문이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
갈빛의 약이 사발 위로 재워졌다. 그 단면으로 비친 얼굴이 나무껍질처럼 말라 있었다. 이미 기도를 타고 넘어가고 있는 찬바람이 그 안에 구멍을 낸 것처럼 입 안을 마르게 만들었다. 성규가 멀거니 사발에 제 눈을 고정했다.
손목께를 세게 죄고 있는 포승줄에 피가 몰리는 기분도 잠시였다. 이미 감각을 잃은 손목이 무릎 위로 놓여졌다. 허옇게 핏기가 가신 입술이 다물렸다. 그 뒤로도, 저와 같이 참수 당할 이들의 무릎이 선정전 앞마당으로 자꾸만 들여졌다. 서른 명은 되었던 마당에 그들의 숫자가 꾸준히 늘어갔다. 소란스러운 등 뒤에서 질겁한 자들의 곡소리가 통탄하듯 뱉어지고 있었다. 아마 저희들의 앞에 놓인 사발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었음이라. 한참동안이나 악에 받친 곡소리들이 계속되었다. 이미 침침히 꺼진 눈은 사발을 향해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수의의 목소리가 먼저 트였다.
“성규야…”
“…….”
“성규야….”
“예.”
물기 없이 마른 목소리가 덧이어 그의 이름을 부르자 꼭 그것처럼 건조한 목소리가 대답을 돌려주었다. 수의의 눈도 제 앞에 놓인 사발에 가 닿았다.
“미안하다.”
“…….”
“내가 네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해…”
침착하다 싶던 목소리가 끝내 흐려지며 눈물을 비쳤다. 수의의 허리가 깔고 앉은 멍석 앞으로 꺾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 뒤로도 한참을 같은 말만을 되뇌며 그의 앞에 놓인 약 위로는 차가운 눈송이와 그의 눈물이 섞여들고 있었다. 성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힘을 잃은 스승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찬 가슴께를 울리고 있었다. 성규의 눈가에 찌르르, 열기가 올랐다.
눈바닥을 사각거리며 가르는 발소리가 귓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러 명의 관군들이 마침내 꿇어앉은 이들의 앞에 자리해 섰다. 성규의 눈은 오직 새까맣게 가라앉은 제 앞의 약사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관군들이 품속의 교지를 꺼내드는 소리에, 등 뒤로 꿇어앉은 자들의 곡소리가 한 층 더 높아지기 시작했다. 성규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으나, 소인… 일전에 합하께 아뢴 적이 있습니다.”
모두 자리를 바로 하시오! 정세를 가다듬는 관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마당을 울렸다. 조용조용히 뱉어지는 말소리가 가까스로 수의의 귓가로 가 닿았다. 수의의 표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성규의 말소리가 느려졌다.
“소인은 그 때 아마, 합하께서 걷는 길에 소인의 모든 패를 던졌다고 일렀으며, 그 생각은 아직까지 조금도 변한 바 없습니다.”
제일 앞에 선 관군의 뒤, 선정전 층계 위로 내금위 관원들과 사헌부의 감찰들이 늘어섰다. 가장 앞에 나와 선 대사헌의 허리춤에 칼집이 흔들렸다. 대사헌의 시린 눈빛이 제 앞에 꿇어앉은 수많은 이들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알게 모르게 흡족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의 눈은 특히, 한없이 꺼진 수의와 삼정승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솟구치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려잡는 것도 힘이 들었다. 대사헌의 두 손은 위용 있게도 뒷짐을 지고 있었다. 이윽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의금부 판사의 목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사약을 드시오! 가만히 성규의 말소리를 듣고 있던 수의의 눈빛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처연히 내려앉았던 손이 꽁꽁 언 사발을 집어 들었다. 억센 힘으로 포박당한 손아귀에 큼지막한 사발이 들렸다. 마른 줄로만 알았던 눈에서 다시금 눈물 줄기가 두 뺨을 어룽지게 만들었다. 성규의 두 볼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운명이고, 숙명인 일입니다.”
“…….”
“그 분께서도 아마, 그리 말하셨을 테니까.”
이윽고 하얗게 튼 입술이 손에 들린 약과 만났다. 냉수를 들이키듯, 목구멍을 태워 들어가는 약에 하염없이 떨리던 손이 차츰 경직되었다. 마지막까지 그리던 얼굴은 사약의 단면 위에서도 꿈결처럼 어른거리고 있었기에, 못내 꾹 감아버린 눈 아래로 눈물은 가이없이 떨어져 내렸다.
먼저 약을 들이킨 자들이 바닥으로 떨어트린 사발이 쩡, 소리를 내며 두 동강으로 갈라지는 진풍경이 시작되었다. 깔고 앉은 멍석 아래로 갈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차츰 떨리던 손이 결국 약사발을 놓쳤다. 흰 눈바닥 위로 마지못해 남겨진 약이 속속 색을 타고 있었다.
*
반궁의 온 각사의 풍경이 빠르게 눈앞을 지나고 있었다. 우현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지랄하네, 진짜. 지랄한다고, 진짜! 이미 엉망으로 눈물이 번진 뺨에 눈송이들이 엉겨 붙었다. 집춘문을 향해 달리는 우현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담긴 것은 수복청 뒤뜰의 작은 각사였다. 달리고 있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저린 마음이 파도처럼 크게 일었다. 우현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솟았다.
성균관의 겨울은 어떠합니까? 그리 물었던 조용한 목소리에 대답했던 제 목소리까지 덧이어 들려왔다.
‘대궐과 성균관을 이어주는 집춘문 옆. 거의 반궁의 끄트머리지.’
‘…….’
‘수복청과 가까워서 상유들이 지날 일도 없는 곳이고. 게다가 뒤뜰에 숨겨진 작은 전각을 애써 찾는 서리들도 없다. 그래서 봐줄 만은 할 것이다, 이 뒤뜰이.’
‘…….’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보고 싶다면 이곳이 네게 적당하다.’
아무도 밟지 않아 깨끗이 펼쳐진 백설의 풍경이 빠르게 우현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나았을 것이었다. 쉼 없이도 달리는 우현의 억장은 차근차근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미 시리도록 저려 아픈 가슴에 수천개의 화살이 하늘을 가르고 날아와 박혔다. 이윽고 정확하게 집춘문 앞으로 와 닿은 우현의 몸이 굳게 닫힌 문짝 위로 부딪혔다.
“김성규! 서생원 이 새끼야!”
이미 엉망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서는 다짜고짜 문짝을 두드리는 주먹이 아프도록 맞부딪혔다. 열리지 않는 문짝 위로 어깨를 부딪혀보고, 여러 차례 넘어진 탓에 까진 살갗으로 부술 듯이 그것을 두드려보아도 반대편의 문 뒤에서는 어떠한 응답도 떨어지지 않았다. 우현의 입에서 결국은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야…김성규.
“정비고 뭐고, 지랄하고 있네… 당장 나와.”
제발… 내 눈 앞에 좀 나타나. 끝내 힘을 잃은 다리가 굳세게 닫힌 문 앞으로 주저 앉았다. 우현의 허리가 꺾였다. 흐드러지도록 녹은 마음에 한이 섞여 독이 되어 퍼져가는 것만 같았다. 우현의 흐느끼는 소리에 밭은 숨이 섞어졌다. 결국은 소리 내어 울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그것은 때로 굳게 닫힌 문짝을 힘없이 뒤흔들기도 하였고, 키보다 높이 솟은 담장 위를 바람을 타고 넘어가기도 하였다. 차근차근 쌓아 올렸던 그 동안의 연심이 마침내 부질없이 와르르, 발치까지 무너져 내렸다. 이성이, 억장이. 또 그가 가졌던 세상의 전부가.
*
알 굵은 함박눈이 마치 호롱불처럼 환하게 선정전 앞마당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층계 위에 대동한 대사헌의 눈이, 마침내 눈바닥 위로 쓰러진 이들의 머리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가장 마지막으로 눈바닥 위로 허리를 꺾은 것은 수의의 옆에 앉혀놓았던 그의 제자였다. 그가 들었던 사발이 끝내 눈 위로 나동그라졌다. 결국은 땅에 처박힌 머리를 내려다보던 대사헌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뒷짐을 지고 섰던 그의 손에 구깃구깃 접혀 들어갔던 짤막한 서찰 하나가 끝내 보이지도 않게끔 엉망으로 구겨졌다.
「과인의 병세가 나아진다손 치더라도 이미 명이 성치 못할 것을 예견하는 바이다. 해서 이리 승정원을 통해 말을 전하려 함이로다. 앞으로 선정전의 업무는 이조, …며 예조의 공권력을 강화하라. …고, 내의원을 벌하지 말라.
과인의 주치의에 어떠한 벌도 내리지 말도록 하라. 절대로, 절대로
ㅡ내의원을 벌하지 말라.」
1799年 창덕궁. 칼바람이 분 선정전 앞마당 위로, 찬 눈송이가 소금꽃처럼 내려앉던 날이었다.
*
‘솔직하게 답해야 합니까?’
좋아하고… 좋아했을 겁니다. 아마 전생에서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생에서도 이리 도헌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귀에 담은 목소리가 끝내 절여졌다. 그것을 끝으로ㅡ 하련대 앞에서의 발자욱은 먼저 등을 돌렸었다. 자리에 남은 이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더없이 솔직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한겨울 촛불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