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오면서, 더웠던 날씨를 시기해 괜한 변덕으로 찾아온 습한 태풍이었다.
수능이 다가오면서 어수선했던 학교 분위기는 매년 그래왔듯 고3들만의 예민함에 둘러쌓여 괜히 찝찝한 분위기를 휘감고 있었고
지민은 늘 그래왔듯 정국과 함께 체육 창고에 숨어들어 한층 더 찝찝해진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애를 쓰고 있었다.
"야, 먹을 것 좀 줘봐."
정국과 함께 다니면서 그 때문에 배운 담배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곽들을 바라보던 정국이 미간을 구기며 침묵을 깼다.
창고를 뒤덮은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지민이 작은 막대사탕 하나를 정국에게 던졌다. 올해부터 금연을 실천하겠다는 정국을 위해 챙겨놓은 것이었다.
누구 때문에 저는 꼴초가 다 됐는데 그 누구는 마음 하나 몰라주고 금연을 하겠단다. 사탕 껍질을 까 입에 무는 정국을 보며 지민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웃기니까 웃지."
"뭐가."
보란듯이 사탕을 핥아먹는 너가. 지민은 조용히 침을 삼키며 정국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어둑해진 하늘을 잠시 쳐다보던 정국이 입에 물린 사탕을 굴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새벽 5시였다. 지민은 또 다시 침을 삼키며 손에 들린 만화책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는 무슨 의식이라도 하듯 이 시간만 되면 야한 동영상을 지민 앞에서 틀었다. 그리고 새벽 5시, 늦여름의 새벽은 해가 느리게 뜬다.
어제와는 또 다른 여인의 신음이 창고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벽에 몇 번이고 부딪혀 지민의 귀를 파고드는 소리는 꽤나 지저분한 소음이었다.
하지만 긴장한다. 만화책을 쥔 지민의 손에 조금씩 땀이 차기 시작한다. 책이 망가지는 걸 그 누구보다 싫어하는 성격에도 지민은 만화책이 울기 시작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씨, 지금 울고 싶은 게 누군데.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내는 여인의 소리와 얼핏 그 사이를 파고드는 남자의 소리가 섞여 창고를 뒤덮었다. 정국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다.
손에 가득한 땀을 교복바지에 닦은 지민은 입에 물린 담배를 바닥으로 던져 발로 밟았다. 아, 한 대 더 필까.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정국을 힐끗 쳐다보며 침을 삼킨다.
아무런 표정 없이 영상에 집중한 정국을 보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야."
"왜. 사탕 너가 다 먹었어."
"키스할래?"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던 지민의 손에서 곽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제야 정국은 시선을 지민에게 돌렸다.
아, 망했네. 속으로 온갖 욕을 지껄이던 지민은 상체를 숙여 곽을 집었다. 입에 물린 장초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불, 불 어디있지.
아무리 닦아도 금방 축축해지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라이터를 꺼냈다. 당장이라도 담배를 빨지 않으면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들 수 없다.
"뭐하냐."
몇 번이고 라이터를 딸각거리던 지민이 낮게 울리는 정국의 목소리에 그제야 담배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되는 게 없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지를 털고는 제게 다가온 정국에 지민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입에 물린 담배는 조용히, 아주 천천히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간다.
깔린 시선에 정국의 발이 보였다. 지민은 타들어가는 담배의 속도만큼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저를 바라보는 정국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야해.
입에 물린 담배를 손가락으로 집어 뺀 지민은 속으로 생각하며 연기를 내뿜었다. 얼굴에 닿은 연기에 정국이 미간을 구겼다. 야하다.
야한 영상을 보면서도 표정이 없던 정국의 구겨진 미간을 보며 지민은 침을 삼겼다. 다른 것 하나 없이 저만이 담겨있는 눈을 응시했다. 짙고 야했다.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던 그의 본능이 지민을 바라보는 시선에 모두 담겨있었다. 지민은 떨리는 손으로 다시 담배를 입에 갖다대며 입꼬리를 올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
지민의 물음에도 정국은 한참을 침묵했다.
구석에 던져진 휴대폰에서는 여전히 여인의 높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저분한 소음이라 생각하며 지민은 눈을 감았다.
입 안으로 가득 매워지는 담배 연기에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대로 후, 천천히 눈을 떴을 땐 또 다시 담배 연기에 미간을 구긴 정국이 보인다.
아무런 미동없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정국은 작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은 자신이 없어졌다.
입에 물려 조금씩 빠르게 타들어가는 담배 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손 끝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지민은 시선을 내리고 다 태운 담배 꽁초를 바닥으로 던졌다.
"... 잘 하네."
입 밖으로 퍼져나오는 연기를 보며 정국이 웃었다. 동시에 구석에서 신음하던 여인도 제 할 일을 끝내고 사라졌다.
걸음을 옮겨 제자리로 돌아간 정국이 구석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끄고는 주머니에 넣는다. 지민은 그제야 울렁거리던 속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아, 오늘도 당했네.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꿀꺽 삼키며 지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