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 화
* * * * *
남자가 머무는 공간은 푸르고 서늘함이 존재하며 따뜻한 인간미(人間味)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분명 남자의 손길이 닿는 공간이건만 한번도 사람의 손을 탄 것 같지 않는 기묘한 곳이었다. 가구 또한 필요한 최소한으로 갖춰져 있어 대체로 행한 느낌을 주었다.
한쪽에 위치한 매트리스 위에 그녀는 여전히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누워 있었다. 목에는 가죽 구속구가, 손목은 굵게 꼬아진 밧줄로 묶여 있었는데 같은 자세로 있으니 근육이 수축하며 부들부들 떨려왔고 경련(痙攣)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사정(事情)일 뿐, 남자가 고려할만한 성질이 되지 못했다.
아픈 감각은 그녀만의 것이고 남자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감정을 불살라먹은 악마(惡魔)같은 남자가 그녀의 고통을 헤아려줄리가 만무했다.
남자는 매일 그녀를 씻기고 음식을 제공(提供)했으며 따뜻한 이불을 덮어 혹시라도 추워서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돌보아 주었다. 초여름이지만 여름은 여름이라서 추울 날씨는 아니었는데 이 장소는 뭇내 추워서 이불이 필요했고 남자는 그 점을 세심하게 챙겼다.
자상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남자의 목적을 위한 행동의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전혀 위로(慰勞)가 되지 못했다.
처음의 낯선 사람의 손길, 특히나 자신의 명줄을 쥔 남자에게 씻김을 당한다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몇날 며칠이 반복되자 익숙해졌고 이제는 체념 단계에 들어섰다.
"입 벌려."
남자의 명령에 그녀는 입을 열었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물이 숟가락에 얹어져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씻는 것처럼 처음에는 입을 굳게 다물고 먹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반항을 했다. 그런 어리석은 행동에 남자는 삐뚜름하게 입술을 치켜 올리며 조소했고 단 한마디로 그녀를 굴복시켰다.
"먹지 않을거면 목에 구멍을 뚫어 직접 넣어주지. 아주 좋은 경험일거야. 그렇지?"
입을 쓰지 못하는 환자들이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목에 구멍을 내어 삽관한 투명한 튜브를 통해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을 TV로 본 적이 있는 그녀는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어쩔 수 없이 얌전히 남자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을 수 밖에 없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포식자의 흉폭함에 연약한 하위 생물체는 약소한 반항조차 어려웠다.
시력의 자유를 잃어버린 후 낮과 밤,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던 그녀는 남자가 씻겨주고 음식을 주는 횟수로 대략적인 날짜를 헤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시간의 흐름도 가늠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파악한 날짜가 열흘 정도 지났을 무렵, 남자는 그녀의 속옷을 벗겨내었다.
"꺄아!"
"조용히 해. 시끄러우니까."
"무, 무슨 짓을..."
"아...속옷이 더러워. 지금까지 입혀줬으면 충분하잖아?"
유독 청결성에 민감한 남자는 기어코 그녀의 최후의 보루였던 속옷마저 벗겨내었고 그 속옷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브래지어와 팬티가 벗겨지고 완전히 나체(裸體)가 된 그녀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느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겉옷은 쉽게 체념할 수 있었지만 속옷은 그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여성이 자신의 치부(恥部)를 적나라게 드러내고 싶어하겠는가. 누구나 모욕감을 느끼고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게 낫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실행할 수 없었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실패했을 경우 찾아올 남자의 행동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톨의 인정조차 없는 남자라면 능히 그녀를 능욕하고 당장 죽일 수 있을테니까. 현재는 어느 목적때문에 살려두고 있는데 수틀리면 죽여버리고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나서겠지. 상상만으로 끔찍하고 무서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울어?"
"......"
"수치스러워? 어째서? 겨우 속옷따위를 벗겨서?"
"......"
"큭큭. 웃기지마. 수치스럽다면 자살기도라도 해야하는 것 아냐? 그런데 넌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지."
남자는 노골적인 비웃음과 비난조로 그녀를 마구 밟았지만 그 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고 그녀가 자살기도를 쉽게 도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말없이 눈물만 흘렸고 남자는 그녀의 눈물을 친절하게 닦아주며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악마가 내뱉는 말보다 더욱 잔인함이 서려 있어 그녀의 심장을 죄어왔다.
"울지마. 울면 그 쓸모없는 눈을 파내고 싶어지니까. 알았어?"
포식자의 손에 놓은 애처로운 먹잇감은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 *
실종자 김소영의 예상 실종 장소 부근에 있는 그녀의 단골 가게에 도착한 성용과 다래는 가게 앞에 서서 간판을 올려다 보았다. 가게의 이름은 'Isabel(이사벨)'이었고 수입의류와 소품을 취급하는 개인 로드숍(Load shop)이었다.
"여긴 뭐하는 곳이야?"
"뭐하긴요. 옷가게죠."
"뭐? 별것도 없는 것 같구만...예약할 거나 있나?"
원래 이런 쪽에 관심이 없는 성용은 다래의 대답에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쓸떼없는 곳에 돈 쓰기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성용을 무시하며 다래는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고 성용도 뒤따라서 들어왔다. 문에 달린 차임벨이 맑게 울리며 손님이 왔음을 알려주었고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가게 주인에게 다가가면서 아기자기하고 감각적으로 디스플레이된 가게 내부를 본 다래는 상기된 표정으로 구경하기 바빴지만 성용은 심드렁했다.
"무슨 일이시죠?"
가게 주인은 건들먹거리는 성용의 모습과 가게를 구경하면서 감탄은 하지만 손님처럼 보이지 않는 다래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녀의 질문에 다래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어 신분을 밝혔다.
"아, 안녕하세요. 강력반 형사 정다래라고 합니다."
"아, 네. 근데...형사님이 저희 가게에는 무슨 일로 오셨죠?"
"다른게 아니고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요."
"어떤...?"
"혹시 가게 손님 중에서 김소영씨라는 분 알고 계신가요?"
"김소영?"
"네. 이곳 단골이라고 들었거든요."
"단골이 많아서...잘 모르겠네요."
"두달 전, 이 가게에 예약 상품을 찾으러 온 김소영씨 모르겠어요?"
"두달 전이요? 예약 상품......아!"
형사라는 신분에 가게 주인은 경계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다래는 딱딱한 분위기를 풀고자 최대한 힐쭉 웃으며 질문했다. 다래의 질문에 가게 주인은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으려고 했고 딱히 기억을 되살리려는 기색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다래의 계속되는 질문에 기억이 났는지 탄성을 내질렀다.
가게 주인은 턱을 몇번 주억거리더니 카운터로 다가가서 무언가를 꺼냈는데 고객 리스트가 담긴 공책인 것 같았다. 종이를 몇장 넘기고 손끝으로 주르륵 훑더니 어느 한 지점을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 김소영씨. 두달 전...6월에 예약했던 물건이 들어와서 오셨어요."
"어떤 물건이었나요?"
"옷이었어요. 해외 브랜드 의류였는데 한국에서는 정식 수입이 안되는 관계로 소량으로 제가 가져오곤 했거든요. 그런데 김소영 고객님이 원하는 사이즈가 품절되어서 재주문을 넣었죠. 보름정도 지나서 옷이 도착했고 즉시 고객님께 전화 드렸어요."
"그래요? 그럼 예약 옷을 사갖고 가던 그날 특별한 점 없었나요?"
"글쎄요? 딱히 없었는데...그냥 원하던 옷을 살 수 있어서 무척 좋아했던 것만 기억나요."
"그런가요."
"네. 근데 김소영 고객님께 무슨 일 생겼나요?"
"아, 아니요. 별거 아니에요."
다래가 가게 주인과 대화를 나눌 때 성용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가게 내부를 오가면서 빈둥거렸다. 뒷통수를 몇번 긁적긁적 긁다가 하품을 찍찍 해대는 모습은 짝사랑하던 여자들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대화하는 내용만 주워들으면 별달리 얻어낼 것은 없는 것 같아서 어서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뒤좌우가 꽉 막혀 답답할만큼 진척없는 수사에 작은 단서라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성용에게는 전혀 그런 면모가 보이질 않았다. 다래는 적극적인 협조 감사드린다는 말을 건네며 빈둥대는 성용을 잡아끌고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전혀 도움되지 않는 성용에게 잔소리를 퍼붓었다.
"선배! 정말 이럴 거에요?"
"내가 뭘?"
"지금 제가 다 하고 있잖아요. 옆에서 질문 안하고 뭐해요?"
"네가 다해서 그냥 있었지."
"뭐라구요?"
"왜 성질이야...잘 해결 했으면 됐지. 너 생리하냐?"
"이...!이...!"
예의 밥말아먹은 성용의 거침없는 대사에 다래는 말을 잃고 말았다. 더이상 말을 이을 재간이 없었던 다래는 한숨을 내쉬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다음 장소? 거긴 어디야?"
"김소영씨 단골 카페에요."
"그 여자는 단골 아닌 곳이 없나? 죄다 단골이네. 단골."
"없는 곳보다 낫거든요? 아오...짜증나. 그냥 자철 선배랑 오는건데..."
"뭐? 아무렴 자봉 녀석보단 내가 낫지."
"제 눈에는 자철 선배가 나은 것 같네요. 어서 가기나 해요. 시간 없어요."
건들먹거리는 성용의 팔을 잡고 다래는 다음 탐문 장소로 이동했다. 급속히 늙는 기분을 맛보면서 다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끙끙 앓았다.
성용은 다래가 그러거나 말거나 긴다리를 휘적이며 걸어갔고 다래도 몇번 한숨을 내쉬며 걸어갔는데 아무래도 성용과 함께 탐문하는 것은 빚지는 장사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김소영이 다니던 단골 카페는 일반적인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아니라 큰 도로변에서 좀 떨어진 골목 사이에 있는 작은 카페였는데 작지만 아늑한 분위기와 편안한 인테리어, 맛좋은 커피와 음료, 단출한 몇가지 요리메뉴로 많은 단골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었다. 가게 겉면은 베이지톤의 벽돌로 꾸며져 있었고 나무결이 살아 있는 붉은 갈색 문이 카페의 정문이었다.
다래와 성용은 갈색문을 밀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고 듣기 좋은 음성이 명쾌하게 그들을 반겼다.
"어서오세요."
====================================
히륜입니다. 오랜만에 찾아뵙네요ㅠㅠ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사과드립니다. 죄송해요;;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지 업무량이 증가해서 그동안 많이 바빴어요.
어제 토요일도 나름 바빠서 지금에서야 글을 써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남겨주신 소중한 덧글의 답글도 최대한 빨리 달아드리도록 할게요ㅠㅠ
독자님 사랑합니다♥
※ 오타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