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재판 단편집
Gone Away Dream
/ 김태형은 조용한 색은 흰 색이라고 말한다.
젊은 여자가 내게 종이 하나를 건넸다. 흰 종이였는데, 그 안은 온통 적막으로 둘러싸여 있을 것만 같아 들여다보기가 싫었다. 여자는 불안하게 떨고 있는 내게 쉽게 펜을 넘겨주지 않았다. 나는 죽일 듯이 여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씨발년아, 빨리 펜을 줘. 펜을 넘겨. 죽여버리기 전에 넘겨. 씨발 넘기라고. 여자는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더 끈질기게 펜을 붙잡았다. 손을 잘라버릴까, 손을 잘라버리면 펜을 내려놓겠지. 어떻게 손을 잘라야 할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던 중 여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태형씨가 그때의 일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입을 꾹 다무실 것 같아서요. 이렇게 펜과 종이를 준비했어요. 저에게 말할 수 없는 얘길 여기에 적어내시면 됩니다. 제가 원하는 얘기가 나올 때까지 저는 계속 종이를 드릴 거예요. 어때요?”
“뭘 싸질러도 상관없단 얘기지.”
“사람 말을 귀담아 들으셔야죠. 제가 원하는 얘기가 나올 때까지 종이를 지급해드린다고 말씀드렸어요.”
“누구 좋으라고.”
“그럼 우리 계속 만나면 되겠네요. 전 태형씨가 마음에 들거든요.”
“쪼개지마, 썅년아.”
“이제 펜 드릴게요. 마음껏 써보세요.”
여자가 드디어 펜을 던져주었다. 나는 들개가 먹잇감을 물 듯 펜을 낚아채 적막 안으로 소리를 질렀다. 펜을 잡고 빈 종이를 미친 듯이 채워나갔다. 마구잡이로 선을 긋고 또 긋자 흰 종이가 어느새 검은 종이로 탈바꿈했다. 여자는 그런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는 바로 다음 종이를 건넸다. 또 흰 종이다. 씨발, 또 흰 종이다. 좆같은 흰 종이다. 나는 여자가 준 두 번째 종이까지 검은 종이로 만들어냈고 그 행동을 다섯 번을 더 반복했다. 여자는 이런 내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흰 종이를 건넸다. 역시 손을 잘라버려야겠다.
펜이 망가져버렸다. 여자는 망가진 펜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고는 하나의 펜을 다시 던졌다. 그리곤 흰 종이 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천천히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슬슬 나를 포기할 때가 됐지.
“제가 있으니까 부끄러우신가봐요. 제대로 적지를 못하시네요. 한 시간 뒤에 들어올게요. 제가 원하는 내용이 남겨져 있었으면 좋겠네요.”
여자는 그렇게 나갔다. 나는 두려운 적막 뭉치를 바라보고는 여자가 나간 문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왜 자꾸 찾아와서 사람 기분을 엿같이 하는지 모르겠다. 죽이고 싶어서 죽였다는데 왜 나한테 지랄일까. 내가 칼을 꽂았을 때, 그때 걔 표정이 어땠는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고.
/ 강한나는 조용한 가운을 입고 김태형을 바라본다.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 한나는 자신의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주저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태형은 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한나는 그런 태형의 모습을 의미 없이 바라보고는 문을 닫았다. 책상 위는 난잡했다. 이리저리 그어져있는 종이부터 욕지거리가 적혀있는 종이. 한나는 그 종이들을 눈으로 대강 훑어보고는 글씨가 적혀있는 것 같은 종이 몇 장을 집어 들었다.
/ 죄수번호 349041 독백
-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씨발
- 손부터 잘라버릴 거야.
- 좆같은 년들. 개새끼들.
-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진 게 하나 없는 좆같은 것들.
- 애국가라도 좋으니까 노래라도 틀어, 병신들아.
.
.
- 쓰고 싶어도 기억이 안 나서 못 쓰겠다.
- 토마토.
- 락 발라드를 좋아했는데 그 가수 이름이 뭐였더라. 존나 시끄러워서 귀를 찢어버리고 싶었는데. 그 노래가 너무 듣고 싶다. 자꾸 귀에 맴돌아.
- 낮이 너무 싫어.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이 나아. 눈을 파버릴까.
- 새하얀 게 너무 무섭다. 태어날 때부터 무서운 게 없었는데, 무서운 고통이란 게 이거구나 깨닫게 되었다. 새하얀 걸 볼 때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 그래서 죽였는데.
- 존나 새하얀 새끼를 내가 죽였는데.
- 처음엔 토끼를 죽였다.
- 모든지 처음이 중요하다. 그 첫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고 잘 기억해놓아야 한다. 근데 난 기억력이 좋지 않다. 그래서 토끼를 죽였던 그 느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몇 안 되는 내 소중한 기억이었는데 그걸 잃어버리다니. 그래서 다시 찾으려고 계속 죽였는데 그때 느꼈던 느낌이 아니었어.
- 출소하면 제일 먼저 뭘 먹지.
- 토마토. 그래 토마토를 먹자.
- 나의 거울, 칼, 그리고 방패가 되어줘.
- 그건 내가 되어줄 수 있었는데.
- 오밀조밀 그 노래를 부르던 너가 참 예뻤는데 만날 수가 없으니까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그래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이젠 잃어버린다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아니까.
- 근데 널 왜 죽였더라.
/ 원점, 아마 계속 원점.
마지막 장을 다 읽었을 때, 한나는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은 저를 보고 있었다. 독기가 많이 빠져있는 눈빛이었다. 한나는 태형에게 조금의 경계심도 없었다. 한나는 그 종이를 자신의 가방 속에 넣었다. 그 과정을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태형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한나는 누워있는 태형을 주시하며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태형은 한나가 앉았음에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약간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이만하면 됐어요. 수고했어요. 김태형씨.”
“너 의사야?”
“비슷해요.”
“그럼 나 진찰 좀 해주라. 자꾸 기억이 하나씩 없어지는 것 같애. 이거 왜 이런 거야?”
“언제부터 그랬는데?”
“그것도 기억이 안나. 언제부터 잃어버린 건지 기억이 안나.”
“기억나게 해줄까? 언제부터 그랬는지.”
한나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모습이 순진한 어린 아이 같아서, 한나는 깜빡 속을 뻔했다.
/ (태형을 바라보며) 강한나 독백 시작
너 사람을 죽였어. 그건 기억나니? 너가 글 쓴 것들을 보니까 나사 빠진 것처럼 몇 군데가 없어서. 그거 보충도 좀 해줄 겸 말해줄게. () 싫다고?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여기 교도소에선 내가 갑이고 너가 을이야. 사회 나가도 다 똑같아. 너가 갑이 될 일은 없어.
열두 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어. 넌 재력이 있는 아빠를 따라 살았지. 아빠는 집에 안 들어왔어. 너는 집에 아빠가 없다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어. 대신 엄마가 그리웠어. 그래서 넌 니가 가진 같잖은 짐을 싸고 엄마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갔어. 근데 웬 남자 애가 있었지? () 그래. 걔야. 걔는 몸이 약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나가는 딱한 애였어. 넌 진즉에 눈치 챘지. 내가 있을 자리는 없구나. 내가 있을 자리를 이미 누가 차지해 버렸구나.
그리고 넌 집으로 돌아왔어. 지독한 사춘기를 겪었지. 물론 지금도. 넌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면서 방황했어. 돈도 훔치고 사람도 때리고 불도 지르고. 소년원에 여러 번 들락거리면서도 반성의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지. 사람들은 너를 두려워하고 너는 그 두려움 때문에 외로워졌어. 왜냐하면 그때도 아빠는 집에 없었거든. 사무치게 그리웠겠지. 따뜻한 손길이. 그래서 화가 났었니? 너만 외로운 게. 그게 그렇게 화가 났었니. 넌 제일 행복할 것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녔어. 그래서 찾아간 곳이 열두 살 때 들어갔다 나온 네 엄마 집이야.
() 시끄러워, 나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그러게 내가 종이 줬을 때 다 쓰지 그랬니.
엄마 집에 갔을 때 너는 제일 먼저 엄마를 죽이려고 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엄마는 없었다. 그래서 넌 부엌에서 칼을 찾아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 하지만 오지 않았지. 그리고 봤어. 그 집 아들을. 넌 너처럼 커져버린 그 집 아들을 보고 첫 눈에 반했어. 그 집 아들, 사진 보니까 꽤 잘생겼더라. 나는 딱히 너의 성 정체성에 관심이 없어. 니가 남자를 좋아하던 여자를 좋아하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 애는 너를 기억했고, 친해지고 싶어 했지. 몸이 약해서 학교를 가지 못했으니까 친구는 뭐 있었겠니. 그 애는 자기가 먹고 있던 토마토를 줬어. 넌 그 토마토를 아주 맛있게도 먹었지. 토마토를 먹고 비디오 게임을 하고 재미있게 놀았지. 그 뒤로 넌 엄마를 죽여야겠단 본능을 잊어버린 채 재미있게 놀았어. 엄마가 왔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넌 숨었어. 그 애의 옷장으로. 그리고 밤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지. 칼을 숨기고 숨죽여서. 그 애는 새벽에 옷장 문을 열어줬지. 그리고 다시 재미있게 놀았어. 집에만 있는 애니까 놀 거리가 많았겠지. 너는 그 애가 점점 좋아졌고, 그 애도 너를 점점 좋아했지. 그래서 둘이 했니? () 근데 왜 죽였니. 외로운 너한텐 외로운 그 애밖에 없었는데.
/ 김태형은 과거 토마토의 맛을 기억해내려 애쓰다 애쓰다 애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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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ne Away Dream
출소를 할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저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찾아가고 싶어요. 학교 다닐 때 내가 때렸던 애들, 괴롭힌 애들한테 사과하고 싶어요. 제가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은 우리 부모님이에요. 내가 여기있어서 많이 외로울 텐데 어서 빨리 만나고 싶어요. 저는 이곳에 와서 많이 달라졌어요.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고 일도 잘해요, 그리고 운동도요. 밥도 남김없이 잘 먹고 있고 책도 읽으면서 제 나름의 행복을 찾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지민이가 너무 보고 싶네요. 근데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지민이 몸은 괜찮아요? 빨리 건강해져서 축구도 하고 싶고 게임도 하고 싶은데. 이곳에서 지민이한테 줄 선물을 하나 만들어봤어요. 근데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지민이가 좋아해 줄지 모르겠네요. 내 동생, 사랑하는 내 동생. 지민이만 떠올리면 어서 이곳을 출소하고 싶단 생각뿐이에요. 지민아,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금방 출소해서 선물 줄게. 사랑해.
마흔 여섯 번째 편지를 흥미 없이 읽어 내리는 한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6년이 지난 지금 태형은 저의 환상 속에 살고 있다. 처음 교도소에 들어와 상담을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나는 만날 때마다 달라져가는 태형의 상태를 적어내린 논문으로 부와 명예를 누렸다. 가끔씩 저에게 복을 가져다 준 태형을 보러 갈 때마다 한나는 태형이 좋아하는 줄이 쳐져 있지 않은 하얀색 노트 여러 권을 가져다준다. 태형은 그 노트를 받을 때마다 마치 산타한테 선물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곤 했다.
독기 빠진 이 아이를 보고 있자니 피실피실 웃음만 새어나온다. 백날 편질 쓰고, 백날 가족 생각을 하면 뭐하겠니. 박지민이란 애는 이미 네 손으로 죽여 버렸고, 그 때문에 가족은 산산조각 나듯 깨져버렸는데. 그래놓고 뻔뻔스럽게도 기억하지 못하는 구나. 한나는 그렇게 모두를 위로했다. 기억을 잃은 것으로 이 애는 자신의 죄값을 치루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 앤 절대 출소 따윈 하지 못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