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 바지가 보기 좋게 펄럭인다. 앙상한 뼈마디와 어딘가 불편한 발걸음. 싸구려 시장표 구두굽에서 소리가 난다. 덜거덕. 그게 꼭 제 소년일 적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웃음이 비죽 났다. 뼈는 삭아 굽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햇살은 내 어린 날의 너를 닮아 무척이나 따뜻했다. 완연한 봄의 시작이었다.
사진 인화는 다 되었습니까?
중절모를 쓴 노인이 사진관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외부에는 이리저리 금이 나고 페인트가 벗겨져 겉모습은 볼품없는 데에 비해 내부는 깔끔하고 아늑했다. 노인이 처음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증명사진을 찍은 곳이었다. 주인의 아들은 나이 53에 낳은 늦둥이였는데, 그는 병에 걸려 몸져누운 제 아버지의 수발을 들며 사진관을 운영했다. 노인은 그럼에도 사람좋게 웃는 그가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냈고 말고요."
노인이 답하자 20대 후반의 그는 말없이 눈꼬리를 휘었다. 어디서 내온 건지 알록달록한 분홍색 꽃무늬 찻잔이 유리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노인이 눈인사를 건내며 커피를 홀짝였다. 청춘이네. 답지않게 너털웃음을 지은 노인이 물었다.
"사진은?"
"아, 맞다. 여기요. 겨우겨우 찾아냈어요. 50년도 더 된 걸 찾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그가 입술을 비죽였다. 노인은 그의 손에 들린 사진을 넘겨받으며 대꾸했다. 수고가 많았겠네. 고생했어. 등을 토닥이자 그는 조금 쑥쓰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누가 할아버지에요?"
노인이 들고 있는 사진 속에는 두 사내 아이가 웃고 있었다. 키가 비슷하고, 생김새 역시 비슷했다. 형제인가? 청년은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지금껏 노인에게서 그의 가족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없으니.
"왼쪽, 교복 가슴팍에 명찰을 달고 있는 소년이 나라오."
아아, 그러면 옆에 계신 분은요? 할아버지 친구 분 이세요? 청년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노인은 그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입술을 달싹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얘가…….
"친구, 친구지. 내가 어렸을 때는 이 친구랑만 붙어 있었으니, 그냥 친구도 아니고 무척이나 친한 친구였었지."
청년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다는 작은 신호였다.
"중학교 입학서부터 대학교에 들어갈 때 까지 단 한 순간도 떨어진 적이 없었어. 대학에 들어가서도 끊임없이 만났지. 학교는 달라도, 우리는 그런 게 좋았거든. 오래된 친구, 말 하지 않아도 아는 그런 사이말이오."
주책인가? 노인이 기분좋게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커피를 홀짝였다가 입을 달싹였다. 고민하는 중이었다. 뭐를? 청년은 궁금했으나 딱히 재촉하려 들지 않았다. 분위기가 그랬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의 눈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이 일렁였다.
"그 아이의 이름이 그러니까..."
백현, 변백현이였지.
Fade in, Fade out
作 백날애
3월 초봄의 날씨는 몹시도 쌀쌀하고 추웠다. 한기가 두터운 교복 마이 안을 기어코 뚫어냈다. 아직까지도 생소한 소매가 멋쩍어 괜힌 신발코를 못 살게 굴었다. 개미떼 마냥 다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운동장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폼이 우습기도하고, 어쩐지 심심하지만은 않아서. 그냥 경수는 제 초등학교 친구들끼리 몰려있는 사내아이들이나 구경하고 있었다. 입학하기 전 전학을 온 터라 그 흔한 말동무 하나가 없었다. 딱히 끈끈하지도 않던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실없이 보고싶어졌다. 우울하다. 사나운 바람이 귓가를 철썩철썩 내쳤다. 어디선가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경수야, 도경수. 제 이름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다른 날보다 유난히 더 멋을 낸 엄마가 그를 찾고있었다. 엄마, 여기요. 조금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주변에 있던 애들의 시선이 다 제게로 꽂히는 게 느껴졌다. 창피하다. 고개를 푹 숙인 얼굴이 어쩐지 더 붉어졌다.
"여기 있었어?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데."
"1학년 8반 앞에 서 있겠다고 말 했잖아요. 아빠는?"
"…저, 경수야."
또야? 작게 중얼거리자 엄마는 아직까지도 한참이나 아기같은 제 아들의 손을 부여잡고 중얼댔다. 경수야, 알잖아. 아빠 많이 바쁘신 거. 우리 경수 이제 중학생인데, 그 정도는 이해해야 하지 않겠어? 말을 마친 엄마는 한참이나 내 푹 숙인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분명 내 주위는 시끄러울 텐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질질 흐르는 코를 먹으면서 으응. 하고 대꾸했다. 그렇게 해야만 엄마가 덜 외로울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엄마는 차가운 손으로 내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난 생각했다. 엄마가 불쌍해.
고작 14살, 중학교 입학식에 오지 않은 아빠를 보고 생각한 건 '내'가 아닌 '엄마'가 불쌍하다는 거였다. 물론 난 그런 말을 꺼낼 정도로 눈치도 없고, 대담하지도, 또 말을 잘 하지도 못 하는 한낱 어린 애일 뿐이였기때문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 *
"경수야. 미안해."
"응."
"끝나면 전화 해. 일 빨리 끝내고 올테니까. 알았지, 경수야?"
"알았어요."
으응, 그래 경수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엄마의 목소리가 잔잔한 파도처럼 흘러가다가 이내 끊겨버렸다. 또 다시 혼자다.
이 많은 내 또래 아이들 중에 내 이름을 아는 애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씁쓸함이 몰려왔다. 서러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바쁜 아빠는 나와 엄마를 챙길 시간도 없이 회사에 간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바쁘게 일을 한다. 그나마 있는 형제는 고3 이고, 나이 터울도 많이 져서 이제 고작 중학교 1학년인 나와는 어색하기 그지없다. 세상에서 동 떨어진 기분이다. 14살이 아닌 4살 애기 마냥 엉엉 울고싶어졌다. 자신을 담임이라 소개한 남자는 출석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5번 도경수? 네.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반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부담스럽다. 창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늘은 맑았다. 무척이나 새파랗게.
대량의 가정통신문이 가방 안에 꼬깃꼬깃 접혀져 들어갔다. 어느새 친해진 여자애들 무리 몇몇이 깔깔대며 반을 빠져나갔다. 교실에는 나와 담임, 단 둘 뿐이었다.
"저, 안녕히 계세요."
"어? 어어, 그래. 이름이 뭐였지?"
"도경수요."
"맞다, 5번 경수 맞지? 얼굴이랑 잘 어울리네. 선생님이 기억력이 안 좋아서, 미안하다."
다음에는 꼭 외워놓을게. 사람 좋게 웃은 담임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에. 대충 대답하고 문 앞에서 다시 꾸벅인사를 했다. 담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손짓으로 잘가라고 인사했다. 앞문을 빠져나가자 바로 서 있는 동그란 뒷통수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려고 할 때였다. 저기, 너.
"도경수, 맞지?"
"……?"
뒤를 돌아보자 태어나 단 한 번도 보지못한 낯선 얼굴이 코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응. 맞는데. 짧게 대꾸하자 걘 환한 미소를 내보였다. 할 말이 있으면 말을 하던가. 왜 저렇게 웃고만 있지. 실 없게. 추운 날씨에 짜증이 날 법도 한데 걔는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참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있잖아. 저기, 할 말 있으면…….
"경수야, 내 이름 기억해."
"…뭐?"
"내 이름 변백현. 기억하라고."
나랑 친구하자, 경수야. 너랑 친해지고 싶어.
자신을 '변백현'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애는 저 혼자 말을 다다다 쏘아내고는 계단 아래로 펄쩍 뛰어내려갔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보면 영락없는 제 또래의 사내남자애가 맞았음에도 또 다른, 형용할 수 없는 뭔가 다른 느낌이 퐁퐁 솟아났다. 14살 먹은 남자애가 동성에게 친해지고 싶다고 말을 붙이는 게 과연 일반적인 건가. 어쩐지 발을 쉬이 뗄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꽃이 흩날리는 청춘의 시작이었다.
* * * * * |
앞으로는 계속 어린 시절의 경수와 백현이만 나올 예정이에요.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