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일단. 내가 너의 팔자에 낀 마들을 없애주는 방법에는 세 개가 있어."
"네."
"선택권을 줄 테니까 잘 듣고 골라보도록. 첫째, 너도 령이 된다."
"…죽으란 말씀이세요?"
"근데 이건 싫을거 아니야. 둘째, 너의 액을 대신 받아 줄 사람을 찾는다."
"액?"
"액, 그니까 마를 말하는거야."
"아…."
"근데 이 방법은 별로 추천하지 않는게, 그 액을 대신 받은 사람이 너한테 악감정을 품게되면 배로 돌려받을 수도 있어."
오, 망할. 배로 돌려받는다니. 지금도 남자가 충분히 꼬이다 못해 아주 차고 넘치는데, 이것보다 더 꼬인다고…?
"그…그건 절대 안하고싶네요."
"그래? 사실 내 입장에선 이게 편한데. 아무한테나 넘겨주고 가면…."
"안돼!! 안된다고요, 다른거…다른건 없어요?"
왜 방법들이 다 이따위인건데? 좀 멀쩡한 방법은 없냐고?
"아직 하나 남았잖아. 마지막 하나는 내가 서서히 액들을 없애주는 방법."
"어떻게요?"
"내가 너랑 지내면서, 너한테 액이 들어올 때 마다 옆에서 그걸 쳐 내 주는거지."
손으로 무언가를 휙!하고 쳐내는 듯한 동작을 한 GD가 의기양양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효과는 제일 확실해. 부작용도 없음."
"…이거네요."
"그렇지? 역시 이럴줄 알았어. 영실씨도 니가 이럴 걸 알고 너한테 나랑 같이 지내면 식비 생활비 어쩌고 한거네."
"하…하하."
그…아주머니 성함이…영실씨였군요….
그건 둘째치고, 멀쩡한 해결방법이 마지막 꺼 밖에 없는데, 당연히 마지막 방법을 골라야 하는게 아닌가?
"뭐 아무튼, 잘 부탁한다. 그리고 그 팔찌는 잘 끼고다니도록."
"아…네."
"영실씨가 말을 제대로 안 해줘서 모르겠지만, 그 팔찌 속에 내 령이 있는 거거든."
"이 팔찌 속에요?"
에게, 이 조그마한 팔찌 속에? 검은색 끈에 허여멀건한 동그라미가 하나 달랑 달려있는게…?
"어.정확히 말하면 내 본체는 영실씨네 집 항아리 속에 있고, 지금 내가 그 항아리랑 멀리 떨어져서 돌아다닐 수 있는건 니 팔에 있는 그 팔찌 덕이거든."
"아…."
"팔찌가 부셔지거나, 끈이 끊어지면 영실씨한테 가서 다시 받아오면 되는거긴 한데…그게 조올라 귀찮고 나도 힘든 작업이니까 간수 잘 해."
"네…."
"그 팔찌가 없으면 당분간 니 옆에 나도 없는거니까 명심해라."
생각보다 중요한 거구나, 이 팔찌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팔찌를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앞서가던 GD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아, 그리고 한동안은 아마 액의 기운이 더 강해져서 여기 오기 전보다 더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될 테니까 명심해두고."
…예?
"헉, 허억…헉."
심장이 너무 빨리뛴다. 아, 옆구리도 아파…하긴, 밥을 먹자마자 미친놈 마냥 뛰어댔으니 멀쩡한게 오히려 이상한거지.
입도 제대로 다물어지지 않아서 침이 자꾸만 흘러나오려고 했다. 아, 죽겠다.
상황은 이랬다. 학식을 잘 챙겨먹고 과제나 해볼까 싶어서 도서관에 가고 있었는데, 웬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남자가 내 팔을 턱 붙잡더니
‘저…저기요.’
라고 말을 거는것이 아닌가. 늘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네?’하고 말하자, 남자는 갑자기 헤벌죽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너무 좋아해요…우리 한 번만 만나보면 안될까요?’
이런 미친. 잘못걸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웅성웅성대기 시작했고, 나는 내 얼굴이 창피함에 엄청나게 달아올랐음을 스스로도 느꼈다. 쪽팔려! 이게뭐야!
‘저…저기요. 사람 잘못 보신것 같은데요….’
‘아닌데…00대학교 조경학과 13학번 이승현…내가 너무 좋아하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소름이 쫘악 돋아서, 붙잡혀 있던 팔을 팍 내쳐버리고 미친듯이 달렸다.
‘사랑해! 내가 많이 사랑한다고! 늘 니 집 근처에서 니 방 불이 꺼질 때 까지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으아아! 미친놈아!! 왜 쫓아오면서 그런 얘길 하는건데?! 무서워, 무섭다고!
‘제발 한번만 만나줘!’
…가 내가 방금까지 겪은 일이다.
간신히 그 남자를 따돌려서 화장실에 숨기는 숨었는데…내가 왜 이래야 되는거야!
화도 나고, 억울하고, 몸은 힘들어 죽겠고. 변기 위에 미끄러지듯 앉아 숨을 골랐다.
"…아…죽겠다."
GD씨는 이럴 때 안 도와주고 뭐하는 건지. 분명 나한테 액이 들어올 때 마다 쳐내준다고 했으면서…
팔찌를 조물조물 거리면서 한숨을 푹 내쉬자, 갑자기 팔찌에 있던 동그란 큐빅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어어?"
"짠."
그리고 나타난 GD…인데 어?
"얼굴이 있네요? 어 뭐지?"
"실체화 시키고 왔다. 이게 이 몸의 전생의 모습이란 말씀."
"오…와…."
뭐야? 왜 이렇게 생겨먹은건데? 뭔가 딱 정석적인 미남이라고 하기엔 부족했고, 조각 미남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얼굴이었지만, 잘생겼다. 그래 잘생겼어.
전생에 여자한테 인기가 많았다는게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좀 생겨먹은건 아는데 넋 그만 나가고. 내가 잠깐 못 왔다고 그새 뭔 일이 있었나보다?"
"…아! 아니, 왜 이렇게 늦게온거에요? 액이 들어올 때 마다 쳐내주신다고 했으면서…! 저 방금 미친놈한테 쫓기고 왔단 말이예요!"
"실체화 시키는 과정이 워~낙 복잡해서 말이지. 그래도 빨리 온 거라고. 내 발 봐, 아직 발 없잖아."
진…진짜다. GD는 발도 없는 주제에 땅에 서 있었다. 아마 발만 어제 본 것 처럼 하얀 형체로 있는 거겠지.
"오…밀려오네 갑자기."
"예? 뭐가요?"
"액이 몰려온다고. 오늘 널 괴롭힌게 저거구만."
어리둥절 해 있는데, GD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장실의 문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승현씨! 승현씨!! 문좀 열어봐요! 이 안에 있는거 다 알아요! 열고 나랑 얘기좀 해 보자고요! 안 열면…!"
안 열면…?
"강제로 문을 따고 들어가서라도 데려갈거니까 빨리 열어줘요!!!!!"
진짜 개 미친놈이구나!
내가 ‘어떡해요…?’라는 뜻을 담아 GD의 눈을 쳐다보자, GD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미친놈한텐 한 방에 효과보는 센 약이 답이지."
뭘…어쩌시려고…?
GD는 그 말을 마치고, 화장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니, 왜 열어! 나를 봤잖아! 어쩔거야 이제!
"역시 여깄었구나 승현씨! 어서 나와요. 내가 말 하는거 들었죠? 안 나오면 강제로라도…."
"야. 정신차려라."
GD는 ‘정신차려라’라고 말하며 남자의 귓구멍에 노란 종이?휴지? 뭉탱이를 쑤셔넣었다. 그리고…
퍼ㅡ억.
"헉."
강하게 남자의 배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저래도 되는거야? 진짜 세게 때린 것 같은데…다친거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GD에게 맞은 남자는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스르륵 무너져 화장실 바닥에 엎어졌다.
"저…저래도 돼요? 이거 위험한거 아니에요?"
"걱정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저렇게 화장실 바닥에 엎어졌는데!
"너 괴롭히던 놈인데, 남 걱정이나 하고…너도 마음 씀씀이가 쓸 데 없이 좋다."
"아니…그래도…."
"걱정 말고. 설명해줄테니 잘 들어, 내가 얘 귀에 박아넣은 노란종이는 니 요기를 흡수시키는 종이야."
"흡수…?"
"그리고 내가 배를 때린건, 몸에 흡수된 요기들을 입으로 빼내기 위해서고. 안 믿기면 니 발 밑을 보던가."
"에…엥, 헉!"
발 빝을 보자, 웬 붉은색의 연기가 내 발 밑에서 빙글빙글 돌고있었다.
"이게…뭐예요?"
"얘가 흡수한 니 요기."
"…제 요기요? 이 빨간 연기가?"
"어. 야, 그리고 쟤 귀에 꽂힌 종이 봐봐."
"빨…빨개졌네."
"니가 가진 요기가 이 정도 인거야. 일반인 중에서도 면역력이 약한 사람들은 그냥 너랑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니 몸에서 나오는 요기에 홀리는 거라고."
"……."
"어찌보면 얘네도 불쌍한거지. 체질 잘못 갖고 태어나서 요기에 휩쓸려다니는 거잖아."
"아…."
"니 잘못은 아니고…뭐 됐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됐나? 저 남자는 5분 안으로 깨어날 거니까 그냥 가면 돼. 어차피 이 일들 기억 못 할거거든."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늘 나를 쫓아오는 사람들 탓만 했는데 원인을 제공하는건 사실 나였다니….
충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 거리고만 있자, GD씨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니 잘못 아니야. 그리고 나는 앞으로…이런 방식으로 너한테 오는 액들을 쳐 낼거야."
"……."
"이렇게 쳐내고, 또 쳐내다 보면 언젠간 니 몸에 쌓여있는 요기들이 다 빠지게 될 거란 말이야. 그 때까지 도와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정 무서우면 그냥 나한테 다 맡겨. 내가 다 알아서 해 줄테니까."
쌓여있는 요기라니. 앞으로 이 짓거리를 몇번이나 더 해야되는걸까…생각하며 눈을 꼬옥 감았다.
제발, 되도록이면 빨리 이 뭣같은 요기들이 빠져나가기를 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