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서 어쩌지?"
"네?"
"난 당신 밖에 안보여서,"
"........."
"다른 여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어."
::그대에게 물들다::
열네번째
톡- 톡- 기현이 유리를 두드리며 그 안에 시선을 고정했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손에 딱 들어맞을 반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현은 자신의 손을 펴 빤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곤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 예쁜 여주씨 손에 어울릴만한 반지가... 고민을 하며 그녀를 생각하던 기현이 살풋 웃음을 흘렸다. 여주 의 웃는 모습이 꽃처럼 피어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했다. 여보세요. 그러다 문득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기현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어디냐는 여주 의 물음에 기현이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자신이 고르길 기다리고 있던 여자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곤 가게를 나왔다.
"몸은 다 나았어요?"
"그럼. 우리 여주씨덕분에 더 건강해졌지."
"...나 기현씨 보고싶어."
천연덕스럽게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을 하던 기현이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에 웃음을 꾹 참았다. 기현이 아무 답이 없자 여주는 몸을 더욱 꼬아 "응? 나 기현씨가 너무너무 보고싶어. 오늘 옷도 예쁘게 입고 카페에 나왔단말이야." 그 한마디에 기현이 손에 잡은 핸드폰을 입가로 갖다대었다. 조금만 기다려, 아가. 달달한 말 하나를 끝으로 미소를 머금은 채 전화를 끊은 기현이 몇 걸음 걸어가 길가에 세워진 차에 탔다. 오늘 하루, 저 맑은 하늘처럼 기현의 마음도 덧없이 맑다.
-
카페 안은 커피를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붐볐다. 그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좋아 여주는 입꼬리를 말아올린 채,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손을 뻗어 일에 집중했다. 기현씨는 언제쯤 올려나.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직원들 몰래몰래 기현에게 줄 커피도 만들었다. 그런데 대뜸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주가 돌아섰다.
"저기..."
"네? 주문하시겠어요?"
"아니...아까전부터 쭉 봐왔는데..."
인상 좋아보이는 남자가 주변을 흘긋- 쳐다보더니 어색하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오- 사장님, 대박이다. 그 광경을 우연히 눈에 담은 직원들이 몰려와 여주를 한껏 띄워주었다. 그러나 여주만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잠시 당황함을 내비치는가 싶더니 흠- 숨을 한 번 들이쉬곤. 죄송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아...그러세요?"
"네, 죄송해요."
"그래도 한 번만 만나면-"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친구면 어쩔래요?"
"네?"
"그냥 깨끗이 포기해야할 것 같은데."
"........."
"난 그 '한 번'도 절대 용납 못하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언제왔는지 그 뒤에 기현이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자 남자는 핸드폰을 거둬들이곤 자리를 물러났다. 여주는 기현의 눈치를 보랴, 직원들의 시선을 이겨내랴 정신이 없었다. 그 뒤에서 가만히 보고있던 누군가가 어, 저번에 오셨던 분- 작게 중얼거리자 기현이 웃으며 눈인사를 하곤 얼굴이 민망함으로 물들어있는 여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주씨 보고싶어서 왔는데, 내 데이트신청도 거절할꺼야? 그런 그녀의 민망함을 덜어주기위해 건네는 기현의 말에 여주는 급히 만들어준 커피 두 잔을 들고 나섰다. 몇 직원들의 진심 반 장난 반 섞인 데이트 잘 하고 오라는 응원에 장난스레 눈을 찌푸리며.
"여주씨."
"네?"
"설마 그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예요?"
카페를 나서자 기현이 손에 주머니를 꽂은 채, 넌지시 건네는 질문에 여주가 화들짝 놀라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게 아니라...그러니깐 나는... 기현씨 맞아요, 맞는데..."
"........."
"그러니깐 나는..."
"듣고 있어요. 천천히 얘기해도 돼요."
"왠지 기현씨보다 훨씬 부족한 사람 같아서..."
여주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는, 이때까지 혼자 마음에 담아두었던 소리에 기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한 걸음 다가가 손을 올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여주는 기현이 자신에게 실망을 했을까 싶어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기현이 흠- 숨을 들이쉬었다 간결하게 내쉬고는 가만히 놓여있는 여주 의 손을 잡았다.
"왜 여주씨가 미안해, 내가 미안하지."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얼마나 예뻐해줘야 나한테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해 줄래요?"
눈을 맞추며 묻는 소리에 여주가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수줍은 웃음을 지었다. 약간은 민망한 듯, 단어 한 번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모습에 기현이 한결 편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다 곧, 여주가 자신을 가리키며 그럼 나 오늘도 예뻐요? 얼굴이 붉어지며 묻는 소리에 기현이 피- 웃음을 흘리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여주씨."
"네?"
"첫만남부터 지금까지 여주씨가 안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러면 다른 여자-"
"미안해서 어쩌지?"
"네?"
"난 당신 밖에 안보여서,"
"........."
"다른 여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어."
"...진짜 어떻게 그렇게 설레는 말을 잘해요?"
"여주씨는 내 곁에 서있기만해도 설레는데 나는 말이라도 잘해야죠."
기현이 누가 볼세라 짧은 입맞춤을 하곤 떨어졌다. 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입을 가리다 주위를 둘러보고는 가볍게 기현의 팔을 때렸다. 너무 커플이라고 티내는거 아니예요? 그녀의 물음에 기현이 더욱 심술궂은 말- 그럼 이미 티낸김에 뽀뽀 한 번만 더 하자- 을 해보였다. 그러곤 정말로 다시 얼굴을 가까이 하자 여주가 밖에서는 이러는거 아니라며 말리다 결국 두 손을 모은 채 입술로 짧게 내리눌렀다. 그제서야 기현이 물러나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
나 기현씨 그림 그린거 보고싶어요. 조수석에 타 옷을 정리하며 여주가 문득 건네는 말에 기현이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으나 그렇게 갑작스럽게 꺼낸만큼 정말로 기현의 그림이 보고싶었다. 안돼요? 여주가 신호가 멈춘 틈을 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기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기현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보였으나 곧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비스듬히 여주를 쳐다보았다.
"왜 굳이 벌써 볼려고 해요?"
"그냥 갑자기 보고싶어졌어."
"나랑 살면 질리도록 그림 그리는거 볼텐데."
"...난 기현씨가 뭘해도 안질릴 자신 있어요."
"역시 우리 여보, 말 예쁘게 하네."
초록색 불이 켜졌다. 기현이 창 밖을 쳐다보며 흘리는 말에 여주가 가득 웃음을 지어보이며 몸을 가까이했다. 그래서 보게 해줄거예요, 말거예요? 기대가 가득 담긴 질문에 기현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반달같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우리 여보가 보고싶다는데 보여줘야죠.
그렇게 온 곳이 바로 기현의 개인 연습실이었다. 단조로운 화이트 톤의 벽지와 함께 아직 걸리지 못한- 천으로 덮어놓은 그림들이 한가득이었다. 여주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쪼르르 달려가 정리되어있는 미술 용품들을 보았다. 고등학생때만 보던 붓과 색깔에 설레이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기현이 그 뒤로 다가가 살며시 안았다.
"오길 잘했네. 여주씨 좋아하는거 보니깐."
"그럼요. 내가 미술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러나 활기차게 대답한 것도 잠시, 여주가 두 손을 들어올려 한 번 훑고는 금세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만 해도 평생을 그림만 그리며 살아갈 줄 알았던 그녀였다. 기분이 좋을 줄만 알았는데 막상 우울함도 물밀 듯 밀려왔다. 그 차오르는 감정을 읽어낸 기현이 그녀의 몸을 돌려 눈가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말을 내뱉었다.
"그림 그려볼래요?"
"네?"
"난 여주씨 그림 그리는거 보고싶은데."
"...실력 다 없어졌을걸요."
"나 실력 신경 안써요."
그냥 여주씨가 그림 그리는 모습이 너무 예쁠 것 같아. 기현의 잔잔한 부탁에 여주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기현이 여주 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끌어 의자에 앉혔다. 뒤에 서 팔짱을 낀 채, 어서 보고싶다는 듯 재촉하는 표정에 여주가 붓을 하나 들어 하얀 캔버스 위에 노란 점을 톡- 찍었다. 그러곤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마냥 물끄러미 기현을 쳐다보는 것이다. 기현이 입꼬리로 호선을 그리며 여주 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솔직히 말해도 돼요?"
"그럼요. 여주씨가 나한테 솔직하게 말한다는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
"창피해서 못그리겠어."
"왜요?"
"미술 하는 사람 앞에서 괜히 그림 못그리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
"왜 나를 미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난 정말 여주씨 남자친구로서 예쁜 모습 보고싶어서 그러는데."
등을 다독이며 긴장을 풀게끔 하는 소리에 여주가 잠시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다시 붓을 잡아쥐었다.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니였다. 뭐, 그래. 나도 기현씨 여자친구로서 한 번 그려보는 건데. 속으로 마음을 달래며 다시 한 번 그 옆에 노란 점을 톡- 찍었다. 그렇게 한 점 한 점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려내던 여주가 곧은 꽃줄기와 함께 보라색 리본끈을 묶는 것을 끝으로 수수한 꽃다발 하나를 만들어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며 쳐다보던 기현이 다른 의자 하나를 끌고와 옆에 붙어앉았다. 이거 우리 집에 걸어놓으면 되겠다. 혹시나 고칠 점이 있을까 싶어 마음을 졸이던 여주가 무심히 내뱉는 기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기현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이런 그림을 뭐하러 걸어놔요."
"매일 보면서 여주씨 생각할려고."
"그럼 나도 기현씨가 그린 그림 하나 줘요."
"........."
"나도 집에 걸어놓고 기현씨 보고싶을때마다 보게."
기현이 따라 고개를 돌리자 숨결이 한껏 가까워졌다. 여주가 자연스레 붓을 내려놓고 기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기현은 잠시 눈을 내리깔아 여주 의 얼굴을 천천히 훑더니 크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연히 알겠다며 대답할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야- 단호하게 내뱉는 대답에 여주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허공으로 돌렸다. 그러나 곧 다시 눈길이 자신을 달달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기현에게로 돌아갔다.
"여주씨 그림보다는 여주씨를 집에 들이는게 낫겠어."
"뭐라구요?"
"안그럼 여주씨가 나 데려가줄래?"
"...지금 고백하는거예요?"
"좋을대로 생각해요."
"...왜 이렇게 진지해요?"
"난 매일 진심이었으니깐."
예전과는 달리 금방 웃음을 터뜨리며 자연스레 상황을 넘어가지 않고 하나하나 대답을 하는 기현의 모습에 여주가 그 오묘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웃어보였다. 그러나 기현의 시선은 여전히 여주를 향했다. 여주가 한동안 그런 기현을 쳐다보다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하길' 기다리는 기현의 모습에 거짓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래요, 좋아요- 라며 대답하려는 찰나, 기현이 급히 입맞춤으로 그 대답을 막았다. 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나중에 다시 물어보면,"
"........."
"그 때 '좋아요' 라고 대답해줄래요?"
"지금은 안돼요?"
"응. 내가 좀 더 준비하면 받아줘."
"준비를 뭐하러 해요. 난 언제 해도 좋은데."
"지금 들으면 심장 터질 것 같으니깐."
"........기현씨."
"나중에 마음의 준비 하고 내 고백 받아주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모습 봐야지."
두 팔을 벌려 안아 곁에 붙어 목소리가 더욱 마음을 부풀게 만들었다. 여주가 잠시 숨을 참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현을 안았다. 그럼 나도 그 날 내 모습 좋아해주는 가장 멋진 모습 볼려고 준비해야되겠다. 푸스스- 여주가 웃음을 흘리자 기현도 고개를 살짝 떼 여주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고백의 진심과 대답의 진심은 들켜버렸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풍선처럼 들떠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미소를 지었다. 기현의 새끼손가락과 여주 의 새끼손가락에는 보이지않는 빨간색 실이 서로를 이어주고 있었다.